녹화선도공작의문사진상규명대책위 소속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23일 서울 중구 군사망사고위원회 앞에서 의문사 김용권 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군사망사고위원회의 발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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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군 입대 후 의문사한 고 김용권씨의 유가족 등이 해당 사건을 ‘자해사망’으로 결론 내린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했다. 강제징집 후 프락치 활동을 강요한 국가 폭력으로 벌어진 일임에도 군사망규명위가 이를 명확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당시 보안사령부)에 관련 자료 공개를 촉구하면서 국방부에도 진상 규명에 협조하고 공식 사과할 것도 요구했다.
‘녹화·선도공작 의문사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대책위)’는 23일 서울 중구 소공로 군사망규명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대생 군 의문사 김용권 사건은 당시 보안사령부가 자행한 녹화·선도사업으로 인한 살인공작이 본질인데 군사망규명위 조사 결과는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고 축소됐다”고 밝혔다. 녹화·선도사업은 1980년대 초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징집한 뒤 ‘프락치’로 활용한 전두환 정권의 공작을 말한다.
서울대 경영학과 83학번인 고 김용권씨는 입학 후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1985년 10월 카투사로 입대해 미8군 2공병여단에서 복무했다. 입대 1년 4개월 만인 1987년 2월 내무반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됐다. 질식사가 어려워 보이는 낮은 난간에 목을 맨 점, 사건 당일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점 등이 의혹으로 제기됐지만 타살을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아 2000년대 군의문사진상규명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에서도 각각 ‘진상규명 불능’, ‘각하’ 결정을 받았다.
2018년 대통령 직속으로 군사망규명위가 출범하자 유가족은 2019년 위원회에 해당 사건에 대한 진정을 제기했다. 보안부대가 김씨의 군 복무 당시 휴가 기간에도 지속적인 감시를 했을 정도로 프락치 활동을 압박했고, 김씨가 이를 거부하자 고문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취지였다. 유족들은 당시 진정에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보안부대 측이 위장했다. 사망 원인을 제대로 밝혀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군사망규명위는 2년에 걸친 조사를 지난달 마무리하며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김용권은 보안부대로부터 구타·고문·회유 등을 통해 민주화 학생운동 관련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은 것이 주된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게 됐다고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세 번째 만에야 ‘사망의 주된 원인이 프락치 활동 강요’였다는 점이 규명됐다. 하지만 유족은 미흡한 조사 결과라고 말한다. 전두환 정권의 녹화·선도사업 공작 과정에서 일어난 조직적 국가폭력의 결과였다는 점이 명시되지 않았고, 이번에도 ‘증거 부족’을 이유로 타살 가능성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책위는 “김용권이 구타, 고문 등을 통해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판단하면서도 이를 자해사망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당사자에게 전가하려는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면서 “군사망규명위는 김용권의 죽음을 보안부대 행정계장의 일탈행위로만 판단했다”고 지적혔다.
군의 비협조적 태도도 성토했다. 대책위는 “군사망규명위가 김용권의 죽음에 보안사령부가 관련돼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에 착수했지만 군사안보지원사령부(옛 보안사령부)로부터 충분한 자료협조를 받지 못했다”면서 “수사가 아닌 조사라는 권한의 한계 때문에 해당 정보기관의 존안자료가 제출되지 못했다”고 했다.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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