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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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별세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과실이 많은 대통령으로 평가된다.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7년간 재임하며 ‘신군부 철권 통치’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1980년 ‘광주 5·18 민주화항쟁’ 유혈진압은 1950년 6·25 전쟁 이후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정치적 비극으로 평가 받는다.
◆춘래불사춘… 12·12 이후 얼마 못 간 ‘서울의 봄’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권한대행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던 전 전 대통령은 그해 12월12일 신군부를 동원, 정 사령관을 연행하고 국방부와 육본을 점거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권을 장악한 그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쳐 군부정권 집권의 단계를 밟았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이 분출했다. 많은 이들은 박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독재가 무너져 곧 민주화가 이뤄지고 김대중 또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최소한 당시 여당이었던 공화당 김종필 총재나 최규하 대통령이 상당 기간 정권을 이끌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았다.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박 전 대통령 사후(死後) 정치 과도기적 상황을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이라고 빗댔다. 1980년 2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소위 ‘3김 회동’에서였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됐다. 서울의 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전두환 신군부는 그 해 5월18일 비상계엄령을 확대해 김대중·김영삼 등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거나 연금했다. 국회도 폐쇄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군홧발에 짓밟혔다. 특히 광주에서 군부 쿠데타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군을 동원해 무참하게 시민 시위대를 진압했다. 바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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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시곗바늘 거꾸로 돌린 5.18 광주 유혈진압
1980년 5월18일 새벽 2시 전남대와 조선대 등 이 지역 대학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시작된 ‘5.18 유혈진압’은 9일 뒤인 27일 새벽 4시55분 계엄군의 전남도청 접수로 ‘악몽의 10일’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 열흘의 기억은 훗날 전두환정권의 반민주적 철권통치를 종식하는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30여년이 지났지만 실체적 진실 규명과 국가 공권력의 희생자들에 대한 상처 치유는 현재진행형이다. 광주학살의 책임 소재를 가릴 핵심인 당시 최초 발포와 집단발포 명령자를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헬기사격 책임자, 성폭력 가해자, 암매장 장소 등에 대한 조사도 남아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위권 발동을 내세우며 발포명령자를 부정해왔고, 1995∼1997년 이어진 검찰수사에서도 발포 명령자를 기소하지 못했다. 전두환 등 피고인 5명은 5월 27일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인 전남도청 무력 진압작전에 개입한 일에 대해서만 내란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이다. 최근에는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전투기 무장출격 대기 사실이 밝혀졌고, 계엄군과 보안사 수사관의 성폭력 등 성범죄 폭로도 이어지면서 진상규명 범위도 넓어졌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1980년 9월 1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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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신군부 독재정치의 시작과 끝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1일 선거인단을 동원해 간접 선거로 치러진 ‘장충체육관 선거’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1981년 1월 민주정의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올랐다. 그는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그해 3월 역시 체육관 간선제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올랐다. ‘신군부 독재’ 5공화국의 시작이었다.
7년간 재임한 그는 본격적인 철권 통치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했다.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 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하에 삼청교육대를 창설했으나 무고한 일반인들까지 구금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동아방송 등 언론기관들은 야당 성향이란 이유로 강제 통폐합하며 언론탄압을 자행했다.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별세했다. 사진은 1988년 11월 23일 백담사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 내외가 경내를 둘러보며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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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은 5·18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에 의한 대표적 용공조작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체포된 22명 중 19명이 국가보안법, 계엄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당시 변호사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이흥록, 이돈명 변호사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다. 김근태 전 의원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등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강제감금·고문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고 수사를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기도 했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2011년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 운동 세력에 대한 폭력상은 정권 말기인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경찰은 1987년 1월14일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이던 박종철 군을 불법 체포한 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하다 사망케 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은폐했다.
5개월 뒤인 6월9일 연세대학교 정문 앞.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대정부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이던 이한열 군이 경찰에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위험에 처한 사실이 알려졌고 이는 6·10 민주항쟁을 부르는 도화선이 됐다. ‘4·13 호헌조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했던 전 전 대통령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시위에 무릎을 꿇고 만다.
대한민국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 씨가 23일 별세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는 법적·역사적 책임을 묻지 못했다며 그의 사망 소식에 허망함을 드러냈다. 사진은 이날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추모관에 전시된 전씨 관련 기록의 모습.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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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한강 88올림픽 유치는 성과로 평가돼
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의 실현’,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을 4대 국정 지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중임을 제한하는 대통령 단임제를 채택하고,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프로 스포츠도 확대했다. 다만 이는 스크린(Screen)·스포츠(Sports)·섹스(Sex)를 일컫는 ‘3S 정책’은 신군부 정권의 대표적 우민화(愚民化)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전두환정권은 야간통행 금지 조치 해제와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등을 시행하며 정권에 반발하는 세력에 대한 유화 정책에 주력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등을 유치한 것은 전두환정부의 공으로 평가 받는다.
장혜진 기자 jangh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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