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영욕의 90년'…권력에 눈 먼 정치군인
[앵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한평생은 말 그대로 '권력 무상'이었습니다.
대통령 각하에서 백담사 유배, 수감 생활을 거치며 '죄인'으로 전락했는데요.
동시대인은 물론 후세들에게도 그는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정치군인 전두환'으로 낙인됐습니다.
성승환 기자입니다.
1931년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두환 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에 입학하며 무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 출세 가도를 달렸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창설 멤버로서 박정희 정권에서 군부 엘리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 대통령을 보좌하며 정치군인의 삶을 시작했는데, 이는 곧 정권찬탈 야욕의 시작점이 됐습니다.
이후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와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국회 해산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며 '신군부 시대'가 막을 올립니다.
11대, 12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취임 일성으로 비리·부패·정쟁의 일소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은 비리로 점철된 독재로 평가받았습니다.
실제 1988년 퇴임 한 달여 만에 동생 전경환 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된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가 이어지며 증언대에 서야 했고, 하산 뒤에도 권력 장악 과정의 불법성과 일해재단 등 재임 중 비리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1995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 검찰의 출두 통보에 반발하며 냈던 '골목길 성명'은 큰 질타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 전 대통령(지난 1995년 12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물론 대통령 재임 시 치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물가를 한 자릿수 이내로 잡았고,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27년간 정치군인과 대통령으로서 큰소리를 쳤던 그가 30년 넘는 시간을 세상의 비판과 단죄를 받는데 보낸 사실이 최종 평가로 남았습니다.
연합뉴스TV 성승환입니다. (ssh8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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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전두환 전 대통령의 한평생은 말 그대로 '권력 무상'이었습니다.
대통령 각하에서 백담사 유배, 수감 생활을 거치며 '죄인'으로 전락했는데요.
동시대인은 물론 후세들에게도 그는 '대통령 전두환'이 아닌 '정치군인 전두환'으로 낙인됐습니다.
성승환 기자입니다.
[기자]
1931년 경남 합천군에서 태어난 전두환 씨는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1951년 육사에 입학하며 무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 등 출세 가도를 달렸고,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 창설 멤버로서 박정희 정권에서 군부 엘리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6년 대통령경호실 차장보로 박 대통령을 보좌하며 정치군인의 삶을 시작했는데, 이는 곧 정권찬탈 야욕의 시작점이 됐습니다.
박 대통령 시해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12.12 군사반란'을 획책하며 박 대통령과 똑같이 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후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와 국가 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국회 해산을 거쳐 정권을 장악하며 '신군부 시대'가 막을 올립니다.
11대, 12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취임 일성으로 비리·부패·정쟁의 일소를 부르짖었지만 현실은 비리로 점철된 독재로 평가받았습니다.
실제 1988년 퇴임 한 달여 만에 동생 전경환 씨가 비리 혐의로 구속된 이후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친구' 노태우 대통령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오르고자 했던 그는 결국 같은 해 11월, 친구에 의해 설악산 백담사에 사실상 유폐됐습니다.
이후 국회에서 광주 청문회, 5공 청문회가 이어지며 증언대에 서야 했고, 하산 뒤에도 권력 장악 과정의 불법성과 일해재단 등 재임 중 비리로 고초를 겪었습니다.
1995년 반란수괴 등의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되기 전 검찰의 출두 통보에 반발하며 냈던 '골목길 성명'은 큰 질타를 받았습니다.
<전두환 / 전 대통령(지난 1995년 12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2년 뒤 김영삼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사면하며 철창신세를 벗었지만 과오는 평생 그의 발목을 잡았고 노구를 이끌고 법의 심판대에 서야 했습니다.
물론 대통령 재임 시 치적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물가를 한 자릿수 이내로 잡았고, 88 서울올림픽을 유치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27년간 정치군인과 대통령으로서 큰소리를 쳤던 그가 30년 넘는 시간을 세상의 비판과 단죄를 받는데 보낸 사실이 최종 평가로 남았습니다.
연합뉴스TV 성승환입니다. (ssh8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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