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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뉴욕타임스(NYT)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고발했던 고(故) 김학순 인권운동가의 부고 기사를 실었습니다. '지나쳤던 인물들'(Overlooked) 시리즈의 일환입니다. 이 시리즈는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인물의 부고 기사를 통해 늦게 나마 삶을 조명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됐습니다.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인용, "김학순 운동가는 20세기 가장 용감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도 김 운동가의 1991년 회견 덕분에 시작됐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와세다대학교의 사회학과의 아리마 테츠오 교수가 트위터에 남긴 글이 논란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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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면에서 위안부는 일본군보다 혜택받았다. 하지만 위안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있어도 일본 병사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 완전 역차별. (10월 3일)
あらゆる面で慰安婦は日本兵より恵まれていた。でも慰安婦を可哀想がる人はいても日本兵を可哀想がるひとはいない。…… 完全に逆差別。
감금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휴일 외출을 허가하고 있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서는, 드디어 참을 수 없게 되면, 도망치는 것이다. …… 성노예라니 판타지. (9월 4일)
監禁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から、休日外出を許可されているから、場所によっては、いよいよ我慢できないとなったら、逃げるでしょう。…… 性奴隷なんてファンタジー。
아리마 교수는 일본 학계에서 위안부 망언을 일삼아온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위안부 역사 왜곡 논란을 일으켰던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교수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아 '위안부는 모두 합의 계약을 했다'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대학생단체 '무빙 비욘드 헤이트'(Moving Beyond Hate)가 아리마 교수의 해임을 요구하는 글을 세계 최대 청원 사이트 체인지닷오알지(change.org)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아리마 교수의 글 내용이 새로울 건 없습니다. 위안부가 위력에 의해 감금된 게 아니며, 위안소 생활이 풍족했다는 건 일본 극우의 반복적 주장입니다. 저희 사실은팀도 지난해 이 부분을 팩트체크한 적 있습니다. 지금껏 학계와 언론은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과 열악한 근로 조건을 입증하는 자료를 차고 넘치게 제시했지만, 망언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팩트체크가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아리마 교수의 발언을 팩트체크하는 작업을 너머, 다른 시선으로 문제의 본질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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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 보고서 제49호'를 두고 벌어진 발췌 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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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7년 발굴한 영상
한국은 일본의 자료를, 일본은 한국의 자료를 믿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주로 다른 나라 자료가 자주 활용되곤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자료가 1944년, 미국 전시정보국(OWI) 심리전팀이 작성한 '일본인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입니다. 일본이 패하면서 버마에 버려진 조선인 위안부 20명에 대한 심문 기록입니다. 이들이 고향을 떠나온 과정과 타국에서 겪었던 일이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2014년 외부에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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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미국 전시정보국(OWI) 심리전팀이 작성한 일본인 전쟁 포로 심문 보고서 제49호
사실은팀이 전문을 살펴봤습니다. 보고서는 이들이 1942년 5월 조선으로 몰려온 일본인 대리인(agent)들의 속임수 때문에 왔다고 썼습니다.
일본의 대리인들이 사용한 유인책은 많은 돈, 가족 빚을 갚을 기회, 쉬운 일, 그리고 새로운 땅,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속임수'로 많은 소녀들이 해외 징병에 입대하여 몇백 엔의 선금을 받았다.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이경원 기자(leekw@sbs.co.kr)]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위안부의 계약은 일본 군대 규정에 묶여 있는 형태라고도 썼습니다. 공권력에 의한 '통제'가 명확히 드러난 문장입니다. 일본 우익들은 민간 업자들 사이의 자율 계약임을 주장해왔습니다.
그들은 계약을 체결하면서 일본 군대 규정에 묶여 있었고, 그들이 가계에 진 빚에 따라 6개월에서 1년의 기간 동안 위안소에서 일하도록 했다.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ork for the "house master"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포주들의 착취는 일상적이었다고 적었습니다.
포주들은 소녀들과 계약을 맺을 때, 소녀들이 얼마나 많은 빚을 지는지에 따라 소녀들의 총 수입의 50~60%를 받았다. 많은 포주들은 음식을 비롯해 물품에 비싼 가격을 매겨서 소녀들의 삶을 매우 힘들게 만들었다.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Many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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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우익들의 혐한 시위
그런데, 일본 우익들은 이 보고서를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보고서에 포함된 다음과 같은 대목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버마의 다른 곳과 비교해 사치스러운 편에 속했다. 그들은 식량과 물품의 배급 제한이 심하지 않았고 원하는 물품을 살 돈이 충분했기 때문에 잘 살았다.
They lived in near-luxury in Burma in comparison to other places. They lived well because their food and material was not heavily rationed and they had plenty of money with which to purchase desired articles.
그 소녀들은 손님을 거절하는 특권을 허락받았다. 이것은 그 사람이 너무 취했을 때 종종 행해졌다.
The girls were allowed the prerogative of refusing a customer. This was often done if the person were too drunk.
1943년 후반에 육군은 빚을 갚은 어떤 소녀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일부 소녀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위안부 피해자들이 빚을 갚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 풍족했다는 내용입니다. 아리마 교수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국내 일부 보수 언론도 "(위안부 생활이 풍족했다는) 보고서의 중요한 부분이 누락돼 알려져 여론이 휘둘리고 있다"는 식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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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7년 발굴한 영상
그러자 이번엔 보고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주장들이 국내에서 나왔습니다.
일부 언론은 이 보고서를 "편견에 가득 찬 보고서", "믿을 수 없는 내용"이라고 평가 절하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언론은 당시 심문 당사자를 추적하며, '엉터리 보고서'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일본인 포주 부부가 위안부를 통제하며 심문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하나의 자료를 두고, 서로에게 이로운 내용으로 '발췌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위안부 피해자와 피해자다움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피해자다움'에 집착해왔습니다. 달리 말하면, 위안부 피해자들은 '극단적으로' 비참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 비참함을 반박하는 자료가 나오면 - 심문 보고서 49호의 사례처럼 - 자료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손쉬운 길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진보적 역사학자 조지 래윅은 1972년 펴낸 책 <미국의 노예 : 복합적 자서전> (The American Slave: A Composite Autobiography)에서, 흑인 노예 공동체에 대해 기존과 다른 시각을 제시한 걸로 주목 받았습니다. 흑인 노예의 일상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규명하려 했던 당시 진보적 역사학자들과는 달리, 래윅은 노예제라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노예들이 어떻게 가정을 이루고, 문화를 향유했는지 집중했습니다. 진보 학계에서 '비참하기만 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흑인 노예들에게도 '일상성'을 부여하며, 피해자는 늘 비참해야 한다는 '피해자다움'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였을 겁니다. (래윅이 '피해자다움'이란 말을 쓴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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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뷰퍼트에서 일하던 노예 가족. 사진 속 주인공은 5대가 가족을 구성하며 살았는데, 미국 노예 가족 연구에 많이 인용되는 사진이다. 자료는 미국 국회 도서관
즉,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 노예의 삶이 늘 비참한 것만은 아니었다'며 사례를 여럿 나열할 때, 래윅은 '아니, 사람 사는 곳에서 그건 당연한 거고, 그게 아프리카에서 잘 살던 사람 끌고 와 노예로 부려먹어도 된다는 명분이 되느냐'며 맞받아칠 논리를 제공했던 겁니다. 노예 역시 사람이기에 비참함 속에서도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해 애쓴 것 역시 역사이며, 주인들은 안정적인 노동력 확보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흑인 노예에게 일정 부분 혜택을 준 것 역시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흑인 노예는 그 자체로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문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들 역시 삶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겁니다. 비참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행복해야 할 이유를 찾았을 겁니다. 이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일본군은 위안소 노동의 효율성을 위해 위안부의 지속적인 건강 관리나 기본적 혜택을 미끼 삼았을 겁니다.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당시 일본군의 야만성이 변호될 수는 없다는 건 당연합니다.
위안부의 삶이 늘 비참한 게 아니었다는 증거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위안소 제도의 비인간성과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결코 합리화하는 논거가 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달리 말하면, 위안부 피해자 인생의 궤적이 우리 생각하는 것만큼 극단적으로 비참해야 하는 건 아니며, 누구도 그걸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건, 위안부 피해자들 역시 본능에 충실할 수 있는 인간 '개인'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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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와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이 지난 2017년 발굴한 영상
피해자다움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나의 문서를 두고 사실상의 '발췌 토론'을 하다가, 문서의 진정성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방식은, 결과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에게 이익이 됩니다. 진실을 감추려는 이들은, 진실이 늘 진위 논란에 휩싸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 만으로도 진실의 순수성을 퇴색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피해자다움'에 집착할수록, 극우주의자들 공격의 외연이 넓어지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위안부 망언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결국, 심문 보고서 제49호 내용은, 비록 근로 조건과 관련해 우리의 기대와 다른 부분이 있을지라도, 모집의 강제성과 관련한 진술을 담고 있으며, 군이 개입했다는 증언을 녹여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라고 판단합니다. 심지어 심문 당사자가 위안부 피해자를 "직업 여성(prostitute)과 다르지 않다"고 표현하며 왜곡된 여성관, 지배적 역사관을 내비치면서도, 그 강제성을 명징하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최근 심문 보고서 제49호에 다시금 주목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지난 8월 출간된 <미국 비밀 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에서는 보고서에 등장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서울기록원도 심문 보고서를 소개할 때, "조선인 위안부의 동원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위안소의 설치 경위, 위안부의 생활과 위안소 운영의 체계 등 아주 상세한 정보를 포함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인턴 : 권민선, 송해연)
이경원 기자(leek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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