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과 첫 외교관계, 남북관계 물꼬…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도
대통령 취임 선서하는 노태우 |
(서울=연합뉴스) 고동욱 기자 = 26일 사망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세계적인 탈냉전 시대와 겹친 재임 기간에 외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부 수립 이래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북한에 대한 인식 전환과 함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첫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같은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도 쌓았다.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 취임사에서 "이념과 체제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같은 해 7월에는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7·7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공산권 국가와 수교를 추진해나갔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는 물론 1991년 8월 알바니아까지 동유럽 7개국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1990년 6월 소련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9월 전격 수교했고, 1992년 8월에는 중국과도 국교를 정상화했다.
공산권 국가와의 수교를 통한 화해 분위기 조성은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유엔헌장의무 수락선언서 서명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 |
1989년 9월 첫 남북 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킨 노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 재정립에 나섰고, 이는 1991년 말 남북화해와 불가침을 선언한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과 비핵화 공동선언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1989년 10월 당시 강영훈 총리가 우리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찾아 2차 회담을 가졌고,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후 남북한 총리가 8차례나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기본합의서를 탄생시켰다.
합의서에는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행위를 하지 않으며 남북군사공동위원회 구성, 군사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같은 상호 협력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내용이 담겼다.
이 합의서는 지금도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89년에는 분단 이후 첫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다.
자주·평화·민주의 3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 통일민주공화국을 실현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은 이후 여러 정권에서 계승됐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991년에는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이라는 성과도 이끌어냈다.
당시 북한은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유엔 동시 가입에 부정적 입장을 유지해왔지만 노 전 대통령의 동구권 수교 확대 등의 영향으로 국제무대에서 북한 편에 섰던 소련이 동시가입 지지로 입장을 바꿨고, 중국도 우리나라의 유엔 가입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북한도 동시가입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후 1991년 12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사용 금지, 핵 재처리 시설 및 우라늄 농축시설 보유 금지 등에도 합의했다. 이에 따라 남한 내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됐던 핵탄두도 모두 철수됐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이런 북방외교와 남북관계 개선 노력을 통해 남북간 교류 협력을 증진했고 한중간 국교 수립으로 중국과 사회·문화·경제적 교류도 급격히 증가시키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sncwoo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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