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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재국의 야구여행] "스쿨존 지킴이 하루방이 LG 마지막 우승 감독님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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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티비뉴스=서귀포(제주), 이재국 기자] “얘들아, 이쪽으로 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있는 새서귀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감귤색 점퍼를 입은 할아버지가 아침부터 초등학생들을 맞이하느라 땀을 흘린다. 등교 마감 시간이 임박해지자 학생들을 태운 승용차들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정신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행여나 사고라도 날까. 할아버지는 왼손에 든 노란색 '정지(STOP)' 깃발로 차량을 막아선 뒤, 오른손으로 맞은편 횡단보도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길을 건너오라 부지런히 손짓을 한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그래, 안녕~.”

“안녕하세요.”

“오냐. 빨리 이쪽으로 건너와~.”

책가방을 둘러멘 초등학생들은 할아버지에게 연신 인사를 건네며 교문으로 들어선다. 할아버지는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어린 친구들이 인사도 잘해”라며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초등학교 '스쿨존 교통안전 지킴이'를 하며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할아버지는 LG 트윈스의 마지막 우승을 이끈 이광환(73) 전 감독이다. 그는 1990년대 초·중반(1992~1996년) LG 트윈스의 ‘자율야구’와 ‘신바람 야구’ 전성기를 열었고, 1994년 LG의 마지막 우승 감독으로 남아 있다.

지난해 2월에 아내와 함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 제주도 서귀포시에 내려와 살고 있는 이 전 감독은 매일 오전 7시 반에 집에서 나와 새서귀초등학교 운동장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곤 오전 8시부터 교문으로 나가 학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은퇴 후 봉사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제주도 하루방은 "매일 손주 같은 아이들을 만나니 신이 난다"며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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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정신이 없네요?

“9시에 수업 시작인데 8시 반 전후로 학교 앞을 오가는 차량들이 피크를 이루지. 애들 내려주고 출근하는 부모들도 몰려들고. 그땐 정신없어. 8시50분쯤 되면 차가 많이 줄어들어. 간혹 한두 대가 급히 와서 아이를 내려놓고 가지.”

-학생들이 감독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죠?

“아이들이 어떻게 알겠어. 여기 있는 사람들 거의 다 날 못 알아봐. 그냥 할아버지 한 분이 교통안전 지킴이 봉사하고 있나 보다 하는 거지. 허허.”

-하긴 이렇게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계신데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엄마들은 대부분 나를 잘 모르지. 어쩌다 아빠들 중에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해.”

이광환 감독은 최근 몇 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 가끔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쉰 목소리로 말을 겨우 이어가곤 했다. 그래서 몸 상태부터 물었다.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여기저기 안 좋아서 작년 2월에 제주도로 내려왔잖아. 폐섬유화라고 하지. 폐가 굳어지는 거 말이야. 현재 다행히 진행은 안 되고 있는데 갑자기 나빠질 수가 있다고 하네. 암으로 진행될 수가 있다고 해서 1년에 한 번씩 서울 가서 초음파 검사하고, 폐기능 검사도 하고 그래. 갑상선도 안 좋아. 그저께 서울 병원에 다녀왔는데 27일에 결과 보러 또 서울 가야해. 갑상선은 16년 전에 수술했어. 초음파 검사하는데 그것도 비싸더만. 보험도 안 되고.”

-기관지도 안 좋다고 하셨는데….

“옛날에 담배를 많이 피워서 그런지 안 좋아. 미세먼지가 많으면 목에 더 안 좋으니까 서울에 있는 것보다 공기 좋은 제주도로 내려왔지. 한동안 목소리도 잘 안 나왔는데 지금은 미세먼지가 없으니까 많이 좋아졌어.”

-운동은 좀 하세요?

“여기 서귀포시가 조성해 놓은 편백나무 숲이 좋아. 보통 주말이면 틈만 나면 거기 올라가. 한 5시간 있다가 내려오는데 거기가 내 병원이야. 2시간 반 올라가고, 편백나무로 만든 평상에 누워있다가, 또 내려오고 그러면 걷는 것만 해도 한 4시간 이상 걸리거든. 서울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여기서 운동을 더 많이 하지.”

-언제부터 여기서 스쿨존 교통안전 지킴이 봉사를 하셨어요?

“작년에 제주도 내려왔는데 오자마자 하필 코로나가 터져서 어디 움직이기도 힘들더라고. 집에만 있으니 우울증이 와. 특히 집사람은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소일거리가 있어야 되겠다 싶더라고. 여기 시니어클럽이 있어. 노인들 활동할 수 있도록.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 집사람은 교사 자격증도 있으니 유치원 보육교사로 나가고, 나는 만날 여기서 스쿨존 교통안전 지킴이 하고 있지.”

-매일 나오십니까?

“애들 학교 나오는 날에는 거의 다 나오지. 애들 방학하면 나도 방학이고. 등하교 시간에 차가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 올라오고 정신없어. 그땐 내가 횡단보도 한가운데로 가야해. 교통경찰이 되는 거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 할아버지는 팔순이 넘은 분인데 아직 정정해. 나하고 거의 매일 만나고 있지. 손이 부족할 땐 가끔씩 학부형들도 당번 정해서 나오긴 해.”

-힘들진 않나요?

“애들 보면 손주 같으니까 예뻐 죽겠어. 근데 우리가 여기 없으면 애들이 천방지축이라 차가 오는지도 모르고 막 뛰어가고 그래. 봉사라 생각하면서 하고 있지. 손주 같은 애들 매일 보니까 내가 신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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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장선생님도 몰라 본 하루방…LG 마지막 우승 감독


이광환 전 감독과 대화를 이어가자 중년의 여성 한 분이 다가온다. 아무래도 기자가 학교 앞에 서성이며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자 수상히(?) 여긴 모양이다.

“실례지만 어떻게 오셨어요? 저는 이 학교 교장입니다만.”

“아, 네. 감독님이 제주도에서 교통안전 지킴이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해서 인터뷰를 좀 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화들짝 놀란다.

“감독님요? 무슨 감독님…?”

프로야구 감독 경력을 설명하자 교장선생님은 한 번 더 놀란다.

“아니,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작년부터 매일 여기 오셔서 그냥 봉사활동하시는 할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는데.”

교장선생님과 얘기를 하고 있는 사이 맞은편에 있던 젊은 남성도 다가온다. 그 역시 선생님이었다.

교장선생님이 “이분이 예전에 프로야구 감독 하신 분이라고 합니다”라고 소개하자 남자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감독님이셨어요? 맞네요. 이광환 감독님. 저 어릴 때부터 야구팬이라 감독님 잘 아는데 마스크 쓰고 계셔서 지금까지 감독님이신 줄도 몰랐습니다”라며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학교에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알리지 않았던 이광환 감독은 그제서야 선생님들에게 “작년부터 제가 학교에 T볼도 갖다드렸는데 코로나 때문에 체육시간에 야외 운동도 하지 않으니 가르쳐줄 수가 없었다”면서 “코로나 끝나고 애들 T볼도 가르쳐 주면 더 좋겠다”며 웃었다. 선생님들도 “감사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코로나19 때문에 못하는 게 너무 많았네요.

“T볼 안내 책자도 있고, 학교 체육교사들이 있으니까 자기들끼리 할 수 있어. 최근에 다른 초등학교, 중학교 몇 군데 가서 T볼 장비도 나눠주고 아이들한테 좀 가르쳐줬는데 여기 새서귀초등학교에도 시간이 되면 가르쳐 주면 좋겠지. 제주도에 축구장은 많고 축구는 활성화돼 있는데 아직 야구에 대한 관심은 적어. 야구팀도 제주시 쪽에 리틀 하나, 초등부 2개 있고, 여기 서귀포시에는 초등부는 없고 리틀 하나 있지. 제주시에 중학교(제주제일중)도 하나, 고등학교(제주고) 하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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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제자 류지현이 우승하면 더 좋지
"

선생님들이 수업 시작 시간이 되자 인사를 한 뒤 학교로 들어갔다. 이광환 감독은 “이제 등교는 다 끝났어. 나중에 하교 시간에 또 나와야지. 아침도 안 먹었는데 한 그릇 하자”며 기자를 단골 설렁탕집으로 안내했다. 밥값을 기자가 내자 이광환 감독은 “아이 참, 모처럼 우리 동네 왔는데 그냥 보내면 내가 서운하다”며 커피집으로 이끌었다. 서귀포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운치 좋은 커피집이었다.

-이런 멋진 곳이 있었네요.

“저 바다는 태평양으로 연결되지. 제주도 같은 곳 외국에도 잘 없어. 사이판 가봤자 바다밖에 더 있나. 제주도 같은 산이 없잖아. 여름밖에 없고. 제주도는 앞으로는 바다가 있고, 뒤로는 산이 있어. 사계절도 다 있지. 나도 다 못 다녀봐서 모르는데 여기는 경치 좋은 데도 정말 많아.”

-제주도 좋죠.

“제주도가 우리나라 보물섬이야. 태풍이 올라오면 여기 부딪혀서 태풍이 갈라지는데, 제주도 없으면 호남평야나 김해평야 박살날 거야. 늘 얘기하지만 여기가 그래서 대한민국 보물섬이야.

-요즘 야구 보십니까?

“보고 있지.”

-감독 그만두신 분들 중에 야구 안 보시는 분들도 많던데요.

“난 가끔씩 봤는데 (류)지현이가 감독 하니까 매일 보게 되더라고. 아무래도 다른 팀보다 눈이 많이 가는 게 사실이야. 우리 집은 다 지현이 잘 되기를 기원하니까.”



-1994년 우승 당시 신인으로 들어와 우승을 함께한 애제자니까 남다른가 봅니다.

“에피소드가 있었어. 당시 신인 지명할 때 스카우트 보고서가 온 거야. ‘어깨가 다 돼 쓰기가 힘들다’고. 그러면서 류택현이 낫다고 하더라고.”

-그해는 LG가 한양대 유격수 류지현, OB가 동국대 투수 류택현을 1차지명해 주사위 던지기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LG도 스카우트팀에서는 처음에 류택현을 뽑자고 했어. 난 류지현이 고등학교(충암고) 다닐 때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정도로 재치 있고 야구 잘한다는 소리 들었어. 고등학생이 국가대표 뽑힌 것만 해도 보통 애는 아니다 생각했지. 내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연수 갔을 때 아지 스미스가 메이저리그에서 어깨 제일 나쁜 선수라는 소리를 들었어. 근데 공을 잡아서 던지는 게 제일 빨라. 그러면서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유격수가 됐지. 류지현도 송구 동작이 빨랐어. 대시도 잘하고. 이종범(해태)은 어깨가 강하지만 노려서 공을 때리는 스타일이었고, 유지현은 공을 빼서 던지는 게 빨랐지. 재치가 있으면 하다못해 2루수라도 쓸 수 있잖아. 그래서 내가 지현이 잡자고 했어. 그러니까 애정이 더 강한지 몰라.”

-당시 신인이던 류지현은 지금 LG 감독을 하고 있고, 서용빈은 kt 2군 감독, 김재현은 SPOTV 해설위원을 하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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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팬들은 아직도 1994년 마지막 우승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LG 야구 어떻게 보십니까.

“마운드가 많이 정비돼 있으니까 쉽게는 안 무너질 것 같은데, 올라갈 것 같으면서도 못 올라가는 건 힘이 조금 달리는 거라고 봐야지.”

-류지현 감독이 감독으로서 잘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LG 팬들 중에는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지 비판하는 팬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마음대로 되나. 난 잘 하고 있다고 봐. 초보 감독인데. 어디를 가나 반대파들은 있지. 내가 감독 할 때도 얼마나 난리였는데. 예전엔 팬들이 청문회하자고 야구장 밖에 진을 치고 그랬어. 홈페이지에도 많이 들어와서 욕도 많이 하고. 그런 거 다 신경 쓰면 감독 못 해.”

-LG가 우승할 수 있을까요? 힘들어진 것 아닌가요?

“아직 몰라. 게임수가 많이 남아 있는 건 장단점이 있는데, 자력으로 게임차 줄여나갈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에 변수가 있거든. LG도 LG지만 kt나 삼성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두고봐야해. 2등으로 (포스트시즌에) 올라가도 마운드가 되니까 또 몰라. 마운드가 안 되면 2등으로 올라가더라도 우승은 힘들겠지만.”

-LG 마지막 우승 감독으로 계속 남아 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요?

“허허허. 제자가 우승하면 더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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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의 신바람야구를 이끌었던 전설의 사령탑.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제주도 하루방이 됐다. 치열한 승부의 세계를 벗어난 그는 제주도의 자연을 벗삼아, 어린 학생들을 친구삼아 봉사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다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저 하얀 뭉게구름 같은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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