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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 (화)

이슈 [연재] 중앙일보 '김식의 야구노트'

[김식의 야구노트] 신화를 깨운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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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오른쪽)가 약 100년 만에 루스를 소환했다. ‘원조 투타 겸업’ 루스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여줬다. [중앙포토, USA투데이=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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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일본인들은 엄청난 인기와 존경을 받는 베이브 루스(1895~1948)를 미국의 왕으로 인식했다고 한다. 1910년대 투수로 더 유명했던 루스는 1920년 54홈런, 이듬해 59홈런을 터뜨리며 야구의 매력을 세상에 알렸다. MLB 인기는 그의 업적 위에서 만들어졌다. 그와 뉴욕 양키스에서 함께 뛴 투수 웨이트 호이트는 “모든 메이저리거의 아내와 아이들은 식사 전 루스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루스는 1930년 MLB 최초로 연봉 8만 달러를 받았다. 이는 당시 미국 대통령 연봉(하버트 후버 7만 5000달러)보다 높아 사회적 반발이 일부 있었다. 루스는 “내 연봉이 후버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올해 난 그보다 나았다”고 일갈했다. 올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연봉은 40만 달러다. 트레버 바우어(LA 다저스)는 4000만 달러를 받는다.

미국 야구의 신화는 2021년 자주 소환됐다. ‘일본의 루스’로 불리는 오타니 쇼헤이(27·LA 에인절스) 덕분이었다. 그는 4일(한국시간) 시애틀 매리너스와 MLB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1회 솔로홈런을 날렸다. 9월까지 아메리칸리그(AL) 홈런 선두를 달렸던 오타니는 홈런 46개로 시즌을 마쳤다. AL 홈런왕은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살바도르 페레스(캔자스시티 로열스·이상 48개)가 차지했다.

그래도 오타니가 루스와 비교될 만큼 위대한 시즌을 보낸 건 틀림없다. 마지막 날 터진 홈런으로 그는 MLB 최초로 한 시즌 100이닝, 100탈삼진, 100안타, 100타점, 100득점 이상(130과 3분의 1이닝, 156탈삼진, 138안타, 100타점, 103득점)을 기록했다. 이른바 ‘퀸튜플(quintuple) 100’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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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겸 타자


시속 160㎞ 이상의 강속구와 낙폭 큰 포크볼을 던지는 오타니는 올해 마운드에서 9승 2패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했다. 마지막 두 경기(8이닝 2실점, 7이닝 1실점) 중 한 번이라도 이겼다면, 1918년 루스(13승·11홈런) 이후 103년만에 10승·1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됐을 것이다.

오타니 덕분에 팬들은 진기한 장면을 자주 봤다. 그는 7월 14일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선발 투수이자 지명타자로 올스타전에 나섰다. 8월 13일에는 홈런 1위였던 오타니가 마운드에서 당시 홈런 2위 게레로 주니어를 삼진으로 잡아내기도 했다. 2021년 MLB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니 시즌’이었다.

그가 2018년 미국 야구에 상륙할 때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미·일 전문가들은 “오타니의 꿈을 응원하지만, 결국 투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일본에서 때린 홈런은 22개(2016년)가 최다였기에 MLB에선 타자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오타니는 학창 시절부터 큰 목표를 세웠고, 엄청난 노력과 인내로 기어이 이뤄냈다. 그리고 더 큰 꿈을 꿨다. 오타니는 자신을 탐낸 여러 MLB 구단 중 투타 겸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에인절스를 선택했다.

2018년 4승·22홈런을 기록하며 AL 신인왕에 오른 그는 시즌 뒤 오른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2019년엔 타자로만 나섰고, 2020년에는 투타 모두에서 부진했다. 투타 중 하나를 선택하고 집중하는 게 순리로 보였다. 그렇지 않으면 MLB에서 생존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오타니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키(1m93㎝)가 큰 데도 신체 균형이 뛰어났던 그는 지난겨울 혹독한 훈련과 식이요법으로 근육을 키웠다. 오타니의 체중이 100㎏을 돌파하자 “투수의 몸이 아니다”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오타니는 개의치 않았다. 야구 만화의 주인공처럼 던지고, 때리고, 달리는 게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그는 올해 3루타 8개(AL 1위), 도루 26개(AL 5위)를 기록했다. 그가 투수와 타자 중 하나만 선택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이닝과 타석 기회를 얻었다면 어떤 기록을 만들어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루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1927년 60개) 기록은 로저 매리스가, 통산 홈런(714개)은 행크 에런이 경신했다. 신화가 깨질 때마다 미국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특히 흑인 에런은 숱한 살해 협박을 받았다. 루스보다 99년 늦게 태어난 아시아인 오타니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둘을 직접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 것이다. 또 오타니의 노력과 집념을 통해 팬들은 100년 전 루스와 재회한다고 여기는 것도 같다.

미국 팬들도 만화 같은 꿈을 꾸는 오타니를 사랑하고 경외하고 있다.

김식 스포츠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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