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제안한 종전선언에 대해 “관련국들이 소극적이지 않다”며 적극 추진 의지를 밝혔다. 북한은 24일 연쇄담화를 통해 ‘종전선언 이전에 적대시 철회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조건부’ 남북관계 개선 여지를 남기기는 했지만, 종전선언을 둘러싼 남북 간의 인식차가 확연히 드러난 셈이다. 미국도 “종전선언 가능성을 논의하는 데 열려 있다”면서도 비핵화 조치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종전선언’ 논의를 통해 남북, 북·미대화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문재인 정부 구상에 험로가 예상된다.
문 대통령은 23일 미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기자들과의 기내간담회에서 남·북·미·중 모두 종전선언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종전선언이 주한미군 철수나 한·미동맹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도 밝혔다. 문 대통령은 “종전선언은 평화협정과는 다르다”면서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북·미 간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은 나중에 평화협상을 거쳐서 평화협정이 체결돼야만 가능한 것이고, 평화협정도 비핵화가 불가역적 단계에 들어가야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종전선언이 당사국 간 신뢰를 쌓는 출발점일 뿐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각 나라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북한이 7시간 간격으로 발표한 담화를 보면 북한 역시 종전선언에 일정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 부부장은 이날 오후 1시쯤 낸 담화에서 “종전선언은 흥미로운 발상이자 좋은 제안”이라고 평가했고, 이에 앞서 리태성 외무상 부상은 “평화보장 체계 수립으로 나가는 데서 종전을 선언하는것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라고 했다.
그러나 김 부부장과 리 부상 담화 모두 종전선언의 선결조건으로 ‘대북 적대시 철회’를 내걸었다. 김 부부장은 남측을 상대로 “쌍방간 존중 보장, 편견적 시각과 적대시정책, 불공평한 이중기준 철회”를 요구했다. 리 부상은 미국을 겨냥해 “미국의 적대시정책이 바뀌지 않는 한 종전을 열백번 선언한다고 하여도 달라질것은 하나도 없다”면서 “미국남조선동맹이 계속 강화되는 속에서 종전선언은 지역의 전략적 균형을 파괴하고 북과 남을 끝이 없는 군비경쟁에 몰아넣는 참혹한 결과만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김 부부장이 언급한 ‘이중기준 철회’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발사 등을 하는 남측이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간주하지 말라는 주장으로 보인다. 한국에 제재 완화를 이끌어낼 것을 요구하는 속내가 담겼다는 해석이 나온다. 리 부상은 적대시정책의 사례로 주한미군 주둔, 미국의 한반도 내 전략자산 전개, 한·미연합훈련 등 한·미동맹 이슈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이는 종전선언을 통해 북한을 대화에 복귀시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구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북한이 대화 재개에 이어 종전선언에까지 ‘적대시 철회’를 요구하며 문턱을 한껏 높였기 때문이다. 북·미 협상 장기 교착 국면에서 한국 정부를 움직여 미국이 대북 적대시 철회를 하도록 압박하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 부부장은 “남조선은 이러한 (선결)조건을 마련하는것부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라며 적대시 철회 등이 이뤄지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대화에 나설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앞서 김 부부장은 지난달초 남북통신선 복원 조치를 두고서도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제기되자 ‘한·미연합훈련 완전 중단’을 정상회담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바 있다.
정부는 북한이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내비친 것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외교부 당국자는 “종전선언은 당사국간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의사 표명의 중요한 부분”이라며 “종전선언은 (미국의 대화) 의지를 보여주고 북·미대화가 시작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종전선언 제안이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북한이 제안 이틀 만에 두 차례 담화를 내놓고, 조건부이긴 하지만 ‘긴밀한 소통’과 ‘건설적인 논의’를 언급한 점에 주목하는 기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종전선언에 대해 관한 이전보다 더 강경해진 요구 조건을 제시한 데다, 미국도 종전선언 등 신뢰구축 조치는 비핵화 협상이 시작되면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알려져 종전선언 실현을 위한 여건 마련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제기된다. 북한에 거듭 ‘조건없는 대화’를 제의해온 미국이 북한의 적대시철회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도 낮다. 마크 램버트 미 국무부 부차관보는 이날 한미연구소(ICAS) 주최 화상 대담에서 종전선언과 관련 “어떤 형태로든 주한미군 주둔이나 한·미동맹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잘못된 인상을 북한에 주면 안 된다는 것이 미국의 우려”라고 말했다.
김유진·정대연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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