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5 (목)

이슈 지역정치와 지방자치

[필살입법]시행령 몇글자에 '새 시장'이 탄생하는 마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머니투데이 서인석 AP입법교육원 원장] [편집자주] 25년 국회 경력을 가진 서인석 AP입법교육원 원장(전 보좌관)의 연재 기고 '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입법'(필살입법)을 시작합니다. 서 전 보좌관은 입법활동 전반에 대한 책을 쓰고 강의를 하며 행정사와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 전 보좌관이 입법 노하우의 정수만 뽑아 총 10회에 걸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the300]②입법을 통한 새로운 시장 창출

머니투데이

서인석 AP입법교육원 원장/행정사(전 보좌관)




입법적 리더십의 9가지 형태 중 그 첫 번째 사례는 '입법을 통한 새로운 시장 창출'이다. 이는 법안을 제·개정함으로써 기존에 없던 시장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례는 생각보다 많다. 없던 판로가 열리고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볼 때 말 그대로 '대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입법적 리더십의 9가지 형태 중 기업이 가장 좋아하는 사례다.


'투척용 소화기'와 소방시설법

입법을 통해 기존에 없던 시장을 새롭게 만들어 낸 대표적 사례로는 '투척용 소화기'를 들 수 있다. 투척용 소화기는 말 그대로 '던져서 불을 끄는 도구'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생소한 대상이다. 혹 집에 어린 아이가 있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야할 일이 생긴다면, 방문 시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그러면 1m50㎝ 정도 높이 벽면에 보온병 모양 물체가 여러 개 부착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인복지시설, 예컨대 경로당이나 요양원 같은 시설을 방문하더라도 투척용 소화기를 볼 수 있다.

이는 정부가 2006년 12월 '소방시설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소방시설법) 시행령을 개정해 노유자시설(老幼者施設)에 투척용 소화기 비치를 '의무화'한 데 따른 것이다. 소방시설법 개정안에 따르면 면적에 따라 산정된 소화기 수량의 1/2 이상을 투척용 소화기로 설치해야 한다. 정부의 이 같은 규정에는 기존 소화기 작동법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힘이 약해 소화기를 작동할 수 없는 노약자와 어린이들도 투척용 소화기를 이용하면 쉽게 불을 끌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정부의 이 같은 조치는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당장 어린이로 하여금 투척용 소화기를 화기에 던져 불을 끄라고 하는 건 난센스라는 주장이다. 의무 설치되기 전까지 투척용 소화기에 대한 공식적인 검정(檢定)이 이뤄진 적이 없다는 시행상의 문제점도 제기됐다. 이를 설치해야 할 대상과 협의도 없었다. 무엇보다 가격이 비싸고 의무비치가 기존 노유자시설까지 모두 적용된다는 점, 특히 기존 소화기를 치우고 그 1/2 이상을 투척용 소화기로 교체해야 한다는 점에서, 관련된 기관들의 불만이 높았다.

60여 평을 기준으로 일반용 소화기 2대를 설치할 경우 드는 비용은 4만 원 정도이다. 하지만 소화기 1대를 투척용 소화기로 교체하기 위해서는 적게는 15만여 원에서 많게는 35만여 원이 든다. 일반용 소화기 1대의 진화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투척용 소화기 4개들이 한 세트를 한꺼번에 사용해야 하고 실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완벽히 진화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200평 규모의 유치원을 운영할 경우 투척용 소화기를 구입하는데 최소 60만원에서 최대 약 140만원이 든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유자시설이 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 수 십만 원의 비용을 들여 투척용 소화기를 사야한다. 만약 구입하지 않으면 1차 적발 시 2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며, 2차 적발 시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지 않을 수 없다. 정부 또한 바로 이 때문에 시행 시기를 2007년 6월에서 2008년 3월로 한 차례 유예했다.


'의무비치'는 독점적 수익 보장

하지만 입법적 리더십 관점에서 우리가 주목할 건 바로 전국에 산재한 수만 곳의 노유자시설에서 비싼 투척용 소화기를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무 구입이란 기업 입장에서 볼 때 '땅 짚고 헤엄치기식' 영업을 의미하는 건 물론 이로 인해 기존에 없던 시장이 새롭게 만들어져 매출이 급신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개정안이 시행된 2008년 3월에 투척용 소화기 판매업체가 단 2곳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법률 개정은 그렇지 않아도 독과점의 지위를 누리고 있던 판매업체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작용했다. 투척용 소화기는 턱 없이 비싼 가격에 판매됐다.

4개들이 한 세트 가격이 부품 수입 후 국내조립은 15만원 정도 하고, 일본 수입품은 35만원 정도 한다. 의무설치 대상은 아동복지시설, 노인복지시설, 장애인시설, 사회복지시설 등인데 통계에 따르면 법이 시행되던 2008년 6월 기준 전국의 보육시설은 3만2149개소로 나타났다. 15만원과 35만원의 중간 값인 25만원을 기준으로 3만여 개의 보육시설에 단 1세트씩의 투척용 소화기만을 설치했다고 계산해도 그 돈은 무려 80억원이 넘는다. 하지만 보육시설의 규모 때문에 최소 2세트 이상은 구입해야 한다. 여기에 전국의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시설, 사회복지시설까지 합치면 의무설치를 규정하는 법조항 때문에 투척용 소화기 구입에 아무리 못해도 200억원 이상이 소요됐다고 추산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의무비치'라는 달랑 한 줄의 법률 개정으로 국내 단 2곳의 회사가 단시간에 최소 2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는 걸 의미하다. 이 건 한마디로 애초 존재하지도 않던 시장을 모법(母法)도 아닌 시행령 한 부분을 몇 글자 고침으로써 기존에 없던 시장을 만들어 내는, 마치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게 '법이 갖는 현실적 힘'이다. 투척용 소화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강제규정을 시행령 <별표 4>에 규정해뒀기 때문에 전국의 수만 개 노유자시설이 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가격과 상관없이 무조건 투척용 소화기를 구입해 비치하지 않으면 안 됐던 것이다.

투척용 소화기는 애초 일본에서 선박용으로 개발됐다. 하지만 투적용 소화기를 개발한 일본은 물론 전 세계 어디에서도 노유자시설에서의 의무비치를 규정하고 있지 않다.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법률로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법 도입 단계부터 특정업체를 위한 입법이라고 비난받던 의무비치 규정은 2008년 3월 시행 후 2년이 채 되지 않은 2010년 2월 '설치할 수 있다'는 임의조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설치해야 한다'라는 강제 규정 2년여 동안 단 2곳의 회사가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법률은 이처럼 어떻게 개정하느냐에 따라 기업 입장에서는 커다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서인석 AP입법교육원 원장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