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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미 정치권에 소환된 학문 '비판적 인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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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인종차별 주목한 이론…작년 흑인시위서 촉발되고 트럼프가 확산

내년 중간선거 앞두고 공화당 쟁점화…민주당은 경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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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연합뉴스 / 재판매 및 DB 금지]


(워싱턴=연합뉴스) 류지복 특파원 = 최근 미국 언론의 정치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CRT)이다.

이 용어는 1년 전만 해도 많은 미국인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갑자기 모든 곳에 퍼졌다고 뉴욕타임스가 평가할 정도다.

CRT는 70~80년대 킴벌리 윌리엄스 크렌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법학 교수 등이 발전시킨 이론으로, 미국 내 인종 차별은 개인이 아니라 백인이 주도해온 사회 시스템과 법률 차원의 구조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40년 넘은 CRT가 대중에 회자된 계기는 지난해 경찰이 무릎으로 목을 눌러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 전역의 인종차별 항의시위로 번졌고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면서 CRT가 종종 언급됐다.

학문 성격이 강했던 CRT를 정치 공방의 장에 올린 이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작년 6월 "분열적이고 반미국적인 교육을 해선 안 된다"며 연방 기구의 인종차별 금지 훈련 프로그램에서 CRT 등이 들어간 내용을 빼도록 지시했다.

작년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인종차별 항의시위로 궁지에 몰리자 CRT에 부정적인 백인 지지층을 규합하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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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플로이드 사건' 선고 앞두고 거리행진 하는 미 시위대 [EPA=연합뉴스]


비록 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이 지시를 철회했지만, 정치권에서는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겨냥한 CRT 공방전이 여전하다.

보수 성향인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의 교육위원회는 지난 6월 공립학교에서 CRT 교육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리틀 트럼프'로 불리는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CRT 교육에 대해 "서로 미워하는 것을 가르치는 일", "국가가 허가한 인종차별주의"라고 비난했다.

공화당이 CRT를 공격 소재로 다루는 것은 득표전에서 불리할 게 없다는 인식이 작용했다는 평가다.

CRT가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백인에게 떠넘기며 반(反)백인 정서를 부추긴다는 주장이 백인 표심 확보에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흑인 표심을 잃겠지만 백인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이익이 남는 장사라는 게 공화당의 판단인 셈이다.

작년 11월 대선 때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흑인 유권자는 87%가 바이든 대통령을 찍었을 정도로 민주당 지지가 압도적이다. 문제는 흑인 유권자 비중이 13%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반면 백인 유권자 중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57%의 득표율로 바이든 대통령(42%)을 앞섰다. 미국에서 백인 비중은 60%다.

최근 선거 때마다 대도시와 시골의 중간지대인 교외지역의 백인이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표심임이 확인됐음을 감안하면 공화당 입장에서 CRT 공격은 밑지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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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CRT 교육에 반대하는 시위대 모습 [AP=연합뉴스]


더욱이 민주당과 공화당의 상원 의석이 동수이고 435석의 하원은 민주당이 8석의 불안한 우위여서 내년 중간선거 때 의회 권력 탈환을 노리는 공화당으로선 CRT가 승부처인 교외지역 백인층 공략을 위해 유효한 수단이다.

공화당 전략가인 포드 오코넬은 정치전문매체 더힐에 CRT 이슈는 공화당이 교외지역을 되찾는 일을 도울 수 있다며 특히 하원 다수당을 위한 '레드 웨이브'(공화당 지지 물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에서도 위기감이 감지된다. 민주당 그레고리 믹스 하원 의원은 CRT가 전선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고, 한 민주당 운동원은 CRT에 관한 담론을 피할 필요는 없지만 정치연설의 일부가 돼선 안 된다고 경계심을 보였다.

정치분석가인 J. T. 영은 "CRT가 민주당에 위험한 분열적 정치 쟁점"이라며 CRT가 흑인에 초점을 둠으로써 백인은 물론 히스패닉, 아시안 등 다른 비백인 유색인종까지 소외시킬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CRT 논쟁은 인종 차별과 갈등이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정치권은 여기에 더해 이를 득표전에 활용하는 미국 사회의 한 단면이다.

jbry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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