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이슈 불법촬영 등 젠더 폭력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가스라이팅에 가려진 데이트폭력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데이트폭력 연 1만8000건 발생
폭력행사 후 '사랑'으로 합리화
설득 당하거나 두려워 신고 안해
실효성 있는 보호 대책마련 시급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 해줬는데…" A씨의 남자친구는 A씨에게 수 차례 데이트폭력을 행사했다. 저항도 하지 못하는 A씨를 때린 뒤 흥분이 가라앉으면 "사랑해서 그런 것"이라며 자신의 폭행을 합리화시켰다. A씨는 '피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려선 안 된다'는 남자친구의 말을 굳게 믿고 수 개월을 지낸 뒤에야 자신이 '가스라이팅'에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친밀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여전히 제도권 안에서도 위험에 노출된다. 친밀한 사이에서 벌어지는 데이트폭력은 집이나 직장 등 피해자의 신변이 노출됐기 때문이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실효성 있는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데이트폭력' 연평균 1만8천여건

15일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신고건수는 최근 4년 간 연평균 1만8000여건 접수됐다. 지난 2017년 1만4136건, 2018년 1만8671건, 2019년 1만9940건, 2020년 1만8945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매일 데이트폭력 신고가 52건씩 발생한 셈이다.

이 기간 연인에 의한 폭행·상해, 체포·감금·협박, 살인 등으로 형사 입건된 이들은 1만 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실제 데이트폭력을 당하고 있지만 '가스라이팅'을 당하거나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하지 않는 사례까지 더하면 실제 발생하는 데이트폭력 건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산된다.

가스라이팅은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피해자의 심리를 지배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가해 행위다. 가해자들은 데이트폭력 피해 사실을 피해가 아닌 '사랑'이라고 합리화해 이를 믿도록 피해자를 설득했다. 결국 피해자들은 병원 진단서를 끊는 등 피해사실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A씨도 수 차례 데이트폭력을 당했지만 "사랑한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니 고맙다고 해라"라는 말에 남자친구를 고발하지 못했다. 자신만 잘 하면 관계가 원만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A씨는 "(피해사실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알릴 경우 힘들어 할테니 절대 알리지 말라고 남자친구는 당부했다"며 "나를 위한 일이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고 말했다.

■ 가해자의 보복 위험 노출 여전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은 신고 후 보복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지만 보호망은 느슨하다.

A씨는 데이트폭력 신고 전 법률적 도움을 얻기 위해 대한법률구조공단에 연락했지만 "데이트폭력은 일반 폭력 사건"이라며 "피해사실이 입증되더라도 벌금 20만원 정도 내고 약식기소로 끝날 단순 사건"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후 A씨는 데이트폭력 피해를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A씨는 "다행히 현재 여성단체의 도움을 받아 전 남자친구를 폭행, 재물손괴 등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 상태"라며 "다만 혹시라도 모를 보복을 대비해 거주지를 옮긴 상태"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복 위험에 노출된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 김도연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장은 "데이트폭력 신고 후에도 2차 가해가 이어져 피해자들은 제도권 안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에 굉장히 절망하고 많이 분노한다"며 "데이트폭력방지법 등 관련 법안 마련을 통해 가해자 처벌 및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신변보호 조치 기간도 짧고,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 후 법원 판단이 나오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려 그 기간 동안 2차, 3차 피해를 입는 등 끔찍한 시간에 노출되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범죄피해평가제도를 통해 심리 상담이 필요한 피해자의 경우 일정 기간 동안 유관 상담소에서 무료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제도도 있지만 이를 알고 있는 피해자들은 매우 적다"며 "이 기간 받은 심리평가보고서는 형사재판에서 가중처벌 요소로 양형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있고, 실제 가중처벌이 이뤄진 사례도 있다"면서 유관기관의 도움을 적극 활용할 것을 당부했다.

gloriakim@fnnews.com 김문희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