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손 들어준 판결 잇달아…정부 운신 폭 커졌지만 일관성 결여
정부 "열린 입장으로 일측과 협의"…G7 계기 한일정상 대화 가능성
1심 각하 판결에 '항소' 의견 밝히는 '강제징용' 피해자들 |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김동현 기자 = 일본군 위안부에 이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서도 일본 측의 배상 책임을 물은 기존 판결과 반대 결과가 나오면서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사법부가 한일관계를 고려해 일본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하면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정부의 부담이 감소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일관성 있는 대응이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개인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해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이라고 했는데, 이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일본 정부의 그간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한국 정부는 협정 체결 당시 일본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관련 법적 배상 책임도 부인했기 때문에 식민지배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 청구권은 인정된다는 입장이다.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여운택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원씩을 지급하라고 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도 이 논리를 따랐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 제27조를 거론하며 정부가 일본의 식민지배가 국내에서 불법이라는 이유로 한일 간 조약인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제27조는 "어느 당사국도 조약의 불이행에 대한 정당화의 방법으로 그 국내법규정을 원용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한다.
재판부는 강제징용 피해자의 청구를 받아들이면 제27조 및 '이전 언행과 모순되는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봤다.
추념사 하는 문 대통령 |
그간 한국 정부의 국제법 위반을 주장해온 일본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결과다.
이번 판결을 두고 외교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1월 1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물은 위안부 판결에 대해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밝힌 이후 사법부에 한일관계를 고려하는 기류가 형성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법원은 올해 1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정부가 피해자 1인당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지만, 3개월 뒤 이용수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낸 소송에서는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 이유 중 하나로 "(한일 간) 추가적인 외교적 교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는데 이번 재판부도 "원고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판결이 선고돼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질 경우 국제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역효과"를 거론하는 등 한일관계를 염두에 뒀음을 분명히 했다.
다만, 이 건 외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제기한 소송 10여건 재판이 진행 중이고 이미 피해자들이 최종 승소한 판결도 있어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은 더 지켜봐야할 것으로 보인다.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는 "정부의 운신의 폭이 넓어진 측면이 있지만, 이미 나온 판결들이 있기 때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는 여전하다. 사안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그래픽]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엇갈린 판결 |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엇갈린 판결로 인해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일관된 대응 전략을 세우는 데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재신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 고문은 "사법부가 양심과 신념에 따라 판결을 하겠지만 원칙에 관해 일관성을 보여주지 못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며 "한일관계를 다루는 정부나 외교부 입장에서는 곤혹스러울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교부는 "정부로서는 앞으로도 사법판결과 피해자 권리를 존중하고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서 양국 정부와 모든 당사자가 수용 가능한 합리적 해결방안을 논의하는 데 대해 열린 입장으로 일측과 관련 협의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가운데 오는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가 대화할 가능성에 주목된다.
교도통신은 지난 5일 복수의 일본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일본 정부 차원에서는 사전에 한일 정상회담을 조율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굳혔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양 정상은 G7 기간 환영식과 만찬, 초청국도 참여하는 확대회의 등 자리에서 함께하기 때문에 2019년 11월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때처럼 즉석 환담이 이뤄질 수도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
blue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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