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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인-잇] 방송에서 소개하는 책, 다 이유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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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 비문학 작가, 책 칼럼니스트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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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KBS, MBC, EBS, CBS. TBS. CPBC 가톨릭평화방송. 내가 고정 출연했던 방송사들이다. 대부분 라디오다. KBS는 1라디오, 2라디오, 사회교육방송 등에 모두 고정 출연했다. 방송사 숫자로는 유재석이나 김구라 같아 보이기도 한다. 실상은 교양 또는 음악 프로그램의 책 소개 혹은 출판 소식 코너에 짧으면 10여 분, 길면 한 회 분 출연했다. 매주 방송 스케줄이 빼곡할 때도 있었다. SBS 아침 생방송 마치고 KBS로 급히 가서 녹음하고 CBS로 이동하는 날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방송 코너 출연료는 박하다. 부지런히 여러 방송사를 오갔어도 수입이 눈에 띄게 많아지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능력 있는 진행자들과 즐겁게 방송할 수 있었으니 후회는 없다. SBS의 한수진, 박진호, CBS의 변상욱, MBC의 정은임, 방현주, 박경추, KBS 최원정, 조수빈, 오동진(영화평론가), CPBC 가톨릭평화방송 류시현, 김지현 선생이 생각난다. TBS에서는 김미화 선생과 함께 했고, KBS에서는 이주향 선생과 제법 오래 함께 했다.

가장 재미있었던 방송 경험은 SBS의 ‘책하고 놀자’에서 소설가 김영하 선생과 함께 했을 때였다. 김영하 선생, 아니 김영하 형은 대본의 최소한만 지키고 거의 자유자재로 방송했다. 매주 한 번 책 한두 권을 놓고 1시간 동안 얘기했다. 시작 멘트를 제외하면 진행자와 출연자들이 제 맘대로 수다를 떨었다. 그런 자유방임이야말로 진행자 김영하 형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었다.

충격적이고 슬픈 일도 있었다. 2004년 MBC 아나운서 정은임 선생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내가 고정 출연하던 TV 프로그램은 이미 종방했지만, 속보를 접한 나는 곧바로 영안실에 갔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슬프게 실감했다. 종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임 아나운서와 작가 한 분,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이 고기 구우며 술 한 잔 했던 일이 얼마 전인 것만 같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첫 번째 고려한 것은 시사성이다. 2017년 11월 15일 포항에서 지진 피해가 크게 발생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일주일 연기될 정도였다. 그 즈음 내가 방송에서 소개한 책은 지진을 비롯한 자연재해에 관한 책이었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를 즈음해서는 정치적 리더십에 관한 책을 소개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라는 책을 소개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홍명보의 <영원한 리베로>를 소개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면, 수상자의 작품 가운데 우리말로 번역된 책을 읽고 소개했다. ‘가정의 달’ 5월에는 가족에 관한 에세이나 심리 교양서, 소설을 소개했다. 제헌절을 앞두고서는 우리나라 헌법에 관한 교양서를 소개했다.

두 번째로 고려한 것은 성찰과 반성이다. 우리 사회가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주제에 관한 책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노동 문제, 소수자 인권 문제, 양극화 문제, 부동산 문제, 지방 소멸 문제, 교육 문제 등등 끝이 없어 보인다. 이런 문제를 다룬 책 가운데 특히 구체적인 현실을 담은 책들을 소개하는 게 좋다. 예컨대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정훈이 쓴 <배달의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는 배달 노동자의 관점에서 한국형 플랫폼 노동의 구체적 현실을 전해준다.

세 번째는 재미있는 책, 흥미로운 책이다. 물론 그저 재미있기만 한 책을 뜻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국문학자 한성우의 <우리 음식의 언어>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음식에 얽힌 말들을 흥미롭게 다룬다. 그러면서도 ‘밥상 인문학’이라는 말에 맞게,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지식과 성찰을 전해준다. 번역가 조영학의 <여백을 번역하라>는 번역 노하우를 담은 책이면서 번역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입담 좋게 펼친다. 요컨대 유익하고 재미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책을 소개하는 것은 신문이나 잡지에서 글로 소개할 때와 당연히 다르다. 주어진 시간이 10분 안팎인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 시간에 두 권 이상 소개해야 할 때도 있다. 압축적이면서 간결하게, 무엇보다도 인상적으로 소개해야 한다. TV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영화 소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핵심적인 부분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놓치는 부분도 있다. 어떤 책이든 부족한 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점을 지적할 겨를이 없어지는 것이다. 소개만 들었을 땐 정말 좋은 책 같았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소개에서 받은 느낌만 못하다는 독자들이 드물지 않다. 책 소개만 믿기보다는 독자 스스로 신중하게 판단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이 주선해준 소개팅 만남에서 상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만나는 당사자들 몫이다.

네 번째를 빼놓을 뻔 했다. 방송에서 책 소개할 때 가장 유념할 점은 프로그램 각각의 특성이다. 교양인지 예능인지 시사인지 고려해야 한다. 주요 시청자 층의 연령대나 성별도 감안해야 한다. 방송 시간대도 고려 사항이다. 그래서 책 소개 자체보다 책 고르는 게 더 어렵다. 모든 고려 사항들에 맞는 책을 고르긴 어렵지만, 그래도 최대한 맞춰보아야 한다. 제작진과 진행자와 책 선정을 놓고 자주 상의해야 한다.

2000년대 초중반에는 정말 많은 프로그램들이 책 소개 코너를 개설했다. 책만 다루는 책 프로그램들도 TV와 라디오 모두 적지 않았다. 대략 2010년대 이후 그런 유행이 잦아들었다. 나는 이런 흐름이 SNS의 확산과 일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SNS가 책을 소개하고 책에 대해 얘기하는 매체로도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매체 환경 변화 때문이라면, 예전처럼 책 소개가 방송에서 활발해지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책과 방송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좋은 이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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