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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만화와 웹툰

‘달려라 하니’ 작가 부부는 두 딸의 이름으로 만화를 그렸다[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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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까만 머리에 키는 작고 못생긴데다 성질은 개떡 같은 애.”

얼핏 들으면 영락없는 비하 발언이다. 하지만 누가 어떤 맥락에서 이 캐릭터를 설명했는지 들으면 수긍이 간다. 1980년대 국내 TV 애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이끈 작품 속 주인공에 대한 원작자의 설명이기 때문이다.

<달려라 하니>와 <천방지축 하니>로 ‘하니 시리즈’의 인기를 정상에 올려놓은 만화가 이진주 작가(70·본명 이세권)가 말한 주인공 ‘하니’의 캐릭터는 딱 이 모습이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달릴 거’라던 하니는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그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들을 안타깝게도, 열 받게도 하지만 결국 아픔을 이기고 엄마에게 우승 메달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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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지축하니><달려라하니>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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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못난 애라도 주변의 도움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는 것이 이 작가가 말하는 하니의 인간승리 스토리의 배경이다. 4월 19일 경기 광주시에 있는 이 작가의 작업실에서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근황부터 물어보겠는데, 지난해 한 유명 와인 유튜버가 올린 영상에 뜬금없이 출연해 팬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적이 있다.

“첫째 사위가 미국에서 와인 사업을 하면서 유튜브에 영상도 올린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크게 확산되기 직전 미국에 사는 딸과 사위를 만나러 갔다가 그때 사위가 만든 영상에 나왔던 거지. 그때 미국에 갔다가 귀국하니 직후부터 코로나19가 엄청나게 확산되더라. 하마터면 한동안 한국에 못 들어올 뻔했다. 두 딸이 모두 결혼하고 미국에 가 있어 지금은 사위가 보내준 와인을 냉장고 가득 넣어두고 혼자 심심하면 마시며 지낸다.”

-20여년 몸담았던 대학에서 강의도 그만두고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나.

“원체 성격이 ‘은둔형’이라 전혀 쓸쓸하지 않고 심심해하지도 않는다. 여기 시골 화실에 학생들과 조교, 지인들이 찾아와주기도 하고. 대학은 정년 맞아 퇴직한 뒤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강의도 했는데, 올해는 미국에 있는 애들 보러 다녀보려고 하니 강의 맡기가 망설여져 안 하고 있다.”

-부부가 각자 필명을 두 딸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2011년 세상을 떠난 아내(고 이보배 작가)가 둘째 이름으로, 나는 첫째 이름으로 필명을 지었다. 데뷔 당시에는 다른 이름을 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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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주 만화가가 경기 광주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 책상에 앉아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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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나온 김에 데뷔 직후의 작품 얘기부터 하면 당시엔 로봇만화로 시작했다.

“1976년에 군대 제대하고 1978년에 결혼을 했다. 그때는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일은 다 해주고 작품은 선생 이름 달고 나가던 시절이니까. 출판사도 딱 두곳뿐이라 선생 승낙 없으면 데뷔 못 했다. 여기저기 잡지와 출판사에 작품 던져놓고 데뷔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혼한 그해 가을 한 방송사에서 일본 <마징가Z> 판권을 샀다며 각색한 만화 그려보지 않겠냐고 하더라. 맡긴 했는데 그래도 최소한의 자존심이 있잖아, 마징가 캐릭터랑 주인공은 원작 그대로 써도 대충 베끼지는 않고 스토리나 그림은 내가 직접 만들고 그린 거다. 사실 내 치부니까 이 시절 이야기 자세히 밝히는 게 별로 안 좋긴 하다. 그땐 독립하고 싶은 절박함이 있어서 그랬다. 내 이름 석자 박힌 책이 나온 뒤 자다가도 깨서 책 다시 만져보고 했을 정도로 좋았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서 데뷔가 더 절박했나 보다. 이보배 작가는 어떻게 만났나.

“이보배 작가는 순정 쪽으로 문하생을 하다가 모임에서 만났다. 습작도 같이하며 가까워졌는데 내가 군대에 가게 됐다. 1000일 정도 되는 복무기간 동안 매일 한통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최전방에 근무하면서도 편지는 계속 주고받았는데 얼마 지나니 편지 쓸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스토리 쓴 것 보내고…. 그게 훈련이 됐나보다. 순정만화 했다가 로봇도 했다가 여러 그림체 오가며 손댄 경험 역시 나중엔 어떤 그림을 그려도 할 수 있게 훈련이 됐다.”

-그러다 ‘하니 시리즈’의 초창기 순정만화를 내놓기 시작했다.

“순정을 집사람이랑 둘이 같이 해보자 그래서 하니를 주인공으로 하고 <하니와 황태자의 첫사랑> 같은 작품을 그 시절 그렸다. 처음엔 하니가 아니라 포니란 이름으로 해서 출판사에 보냈는데 포니 자동차가 있어서 안 된다 하더라. 그래서 영어로도 읽을 수 있는 하니(Honey)로 하고 한자로도 ‘물 하(河), 진흙 니(泥)’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그러다 15권짜리 <하니의 동그라미 사랑>도 하게 됐고.”

-<하니의 동그라미 사랑>은 보통 순정만화와는 달리 좀 가벼운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그때부터 순정만화 바탕에 엉뚱한 캐릭터들을 쓴 코믹요소를 집어넣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의 풋사랑 얘기를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해 가벼운 쪽으로 승부하려던 때였다. 그 무렵부터 순정풍 작품은 집사람한테 주고, 나는 일본만화 <터치>처럼 상큼한 청소년들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그때부터 하니 시리즈가 떠서 매달 고료도 알아 올려주고, 집으로 라면박스 한상자씩 편지가 올 정도로 인기였는데 집배원은 한숨 쉬더라.”

-그런 변화를 보이면서 <달려라 하니>부터 대박을 쳤다.

“말했듯이 하니 시리즈 순정물은 집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본격적인 청소년 만화로 가려던 참이라 <달려라 하니> 처음 구상할 때는 하니 캐릭터 대신 나애리를 주인공으로 하려고 했다. 가제도 <새벽을 달려라>라고 붙여놓았지. 그런데 <보물섬> 쪽에서 하니를 주인공으로 넣어 달래. 작품이 좀더 연령대 낮은 아이들에 맞춘 거라, 결국 키 작고 못 생기고 성질 개떡 같은 캐릭터로 바꿨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만화가들 사이에서 ‘육상 만화는 망한다’는 속설이 있었다. 스포츠물은 복싱·야구·축구만 있던 때라. 그래도 코믹 감각 넣어서 만들고 1986년에 아시안게임 임춘애 선수 금메달 딴 일도 있어서 1987년 연재 끝날 때까지 인기 끌었다.”

-연재 종료 후 곧이어 TV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계속 인기가도를 달렸다.

“88 서울올림픽도 열리고 당시 육상이 인기가 있어서 KBS가 13부작으로 만들자고 하더라. 올림픽 주최하는데 외국인들이 한국 와서 TV 틀면 일본 만화나 디즈니만 나와선 안 되겠다고 한 거지. 그때는 원작 제공해주고 콘티 만들 때도 참견했다. 녹음실도 같이 가고. 결국 히트 치니까 인터뷰 요청이 엄청 들어왔다. 집사람 보고 인터뷰 나가라고 했는데 집사람은 나보다 더 은둔형이라 ‘책상에 박혀 죽으면 죽었지 못 나간다’ 그랬다. 결국 내가 인터뷰에 나가면서 하니 시리즈 그린 이진주 역할을 계속 맡게 됐고, 집사람은 이보배란 이름으로 따로 ‘깨몽 시리즈’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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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가 보관 중인 <달려라 하니> 인쇄 전 원화의 한 장면. 이진주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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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선 여성 주인공이 전면에 나오는 게 흔치 않았다.

“둘째 딸 낳고 애들이 모두 여자이니까 주인공도 여자로 했다. 하니는 따지고 보면 삐딱한 애야. 라이벌들이 따지고 보면 제대로 된 애들이고. 하니는 주변에서 감싸 안아줘 성장할 수 있게 된 거지. 목에 힘을 안 준 그런 캐릭터는 우리 딸이나 조카들처럼 주변에 있는 흔한 아이들 모습을 반영했다. 딸이 수학공부는 잘 못 하고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고 넣은 거다. 그밖에도 주변 사람들을 캐릭터 녹여야 나는 스토리가 잘 풀리더라. 반면 홍두깨 선생님은 어릴 적 선생님이 있는 집 자식만 대우해주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어 ‘저런 선생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었고. 하니 새엄마 유지애는 당시 잘나가던 배우 유지인씨 보고 캐릭터를 잡았다.”

-애니메이션 <달려라 하니>가 인기를 끈 뒤 나온 차기작이 <천방지축 하니>였는데 둘 다 성공했다.

“<달려라 하니>가 인기를 끄니까 방송국에서 바로 속편을 달라고 하는데, 그때는 마라톤을 하는 하니로 속편 생각했다. 그런데 워낙 시일이 촉박하니까 결국 이전에 <천방지축 오소리>라고 하니와 비슷하지만 다른 캐릭터가 나온 2권짜리 출판만화에 양념을 더 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시청자들은 좀 어리둥절했지. 두 작품이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니까. 일이 너무 몰리니까 여기저기서 의뢰는 많이 들어오는데 다 받을 수가 없어 거절하다 보니 ‘많이 컸네’ 그러면서 업계에서 욕도 많이 먹었다.”

-하니 캐릭터가 너무 강렬하고 인기를 끌다 보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아쉬운 작품은 없나.

“<오추매 빵점일기>가 애착이 많은 작품이었다. 딸 키우면서 느낀 진솔한 이야기를 옴니버스식으로 그린 작품이다. 원래는 저녁형 인간이었다가 우리 애들이 유치원가고 학교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경험도 있고. 나름 애들 심리는 잘 파악해서 ‘꼬마들에게 빙의해 그렸나’ 하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였다.”

-이후 하니 시리즈 애니메이션의 차기작을 만들려는 시도도 계속 있었던 것 같다.

“시놉시스까지 다 짜놓았다. 케냐에 동물보호 자원봉사를 간 하니가 동물들과 교감하고 동물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줄거리다. 그런데 지자체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해놓고 시간 지나니 사업이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또 다른 제작사들도 찾아왔다가 실패할 걱정 때문에 저예산으로 하자 그러니, 내 입장에선 하니를 노처녀로 끼고 살면 모를까 아무 데나 보내긴 싫어 관뒀다. 한때는 지브리 스튜디오처럼 내가 직접 나서서 기념관도 꾸미는 게 꿈이었는데 국내 여건에선 그것도 힘들더라.”

-현재 구상 중인 차기작은 어떤 내용인가.

“나도 대학에서 만화를 가르쳤지만, 요즘 웹툰이 시대에 맞게 빠르게 전개되는 스토리로 인기를 끌고는 있어도 단편적인 약점이 있더라. 기본기를 충실히 다져야 한다고 내내 가르쳤는데 사실 승부도 급하게 하려고 하다 보니 작가들의 생명도 길지 않고. 그런 추세와는 반대되지만 아름답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너무 입이 걸어서 진솔한 이야기 하려면 유치원생 이야기를 해볼까 싶기도 하고, 다른 쪽으로는 주변 곳곳의 현장을 다니며 소재를 찾아 아름다운 사연을 만화로 풀어내고 싶기도 하다.”


김태훈 기자 anarq@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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