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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취재파일]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더 위험한…국정원 고위직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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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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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는 한 통의 제보 '손 편지'로 시작됐습니다. 전화, 이메일, 문자, SNS, 화상메신저 등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제쳐놓고, 제보자는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손 편지'를 택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글씨는 삐뚤빼뚤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국가정보원 2급 국장이 같은 부서 여직원을 두 차례나 성추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것은 또 다른 5급 직원도 피해 여직원을 다시 추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보자는 그러면서 '이와 관련한 소문이 국정원 안에서 돌고 있는데도, 일부 고위 관계자들이 입단속에 나섰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뜬금없지만, 여기서 쉬운 질문 하나. 라면의 생명은 무엇일까요? 역시 면발과 국물일 것입니다. 양은 냄비, 국물에 말아 먹을 식은 밥이란 대답도 있을 수 있겠지만, 다수의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 택배 서비스의 생명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신속성일 것입니다. 기사의 친절함 등을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신속성 앞에 선 부차적입니다.

그렇다면 정보기관의 생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보안입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보안, '보안' 그리고 또 '보안'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이 모든 게 쉽게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기자의 관점에서 해석하자면 취재가 어렵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내부서 일어난 일이 밖으로 좀처럼 새 나오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것이 내부가 일어난 성범죄라면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일요일·부서장 집무실' 그리고 '서울 근교·상사의 차 안'



사건이 처음 발생한 건 지난해 6월 말이었습니다. 국정원 모 부서장이던 A 국장은 같은 부서 여직원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내 추행한 것입니다. 그날을 공교롭게(?)도 일요일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근무자 인원이 적은, 그래서 보는 눈도 적은 휴일. 그리고 부서장의 집무실이라는 폐쇄적인 장소. 범죄는 그런 시점, 그런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이었습니다. A 국장은 열흘 뒤, 피해 여직원을 서울 근교로 데려가 차 안에서 또다시 추행한 혐의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강이 보이는 한적한 서울 근교, 그리고 부서장의 차 안.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유·무형적 힘이란 뜻의 '위력', 위력은 그런 곳에서 그렇게 사용됐습니다.

그럼에도, A 국장은 승승장구했습니다. 다음 달 이뤄진 인사에서, 3급에서 2급으로 승진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북 전략 등을 총괄하는 핵심 부서로 영전까지 했습니다. 성범죄를 저지른 고위 관계자의 승진과 핵심 부서로의 영전, 이것이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에서 단행된 인사였습니다. 인사를 담당하는 조직이 비위 사실을 알았다면 은폐한 것이고 몰랐다면 무능한 것입니다. 법적 처벌과 징계를 논하기 이전에, 과연 정상인이 가진 상식에 들어맞는 인사인지는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은 '비상식적인' A 국장 인사, 당연히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국정원 내부에서는 "A 국장이 현 정부 특정 고위직 인사와 매우 가깝다.", "특정 인사를 매우 가까운 곳에서 모셔서 승진한 것이다"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승진 인사는 바로 그 특정 고위직 인사가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 뒤인 9월, 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같은 부서에 있던 5급 직원 B 씨가 피해 여성을 다시 추행한 것입니다. 이쯤 되면, 특정 개인의 예상치 못한 비합리적인 일탈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집니다.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이어진 범죄, 내부 시스템과 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게 됩니다.

※ 참고로, 국정원에 정통한 국회 관계자는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들이 성추행 혐의는 인정했지만, 성폭행 혐의는 부인한 것으로 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국정원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는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라는 반응이 나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철저한 사실관계 파악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건 발생 뒤 열 달 만에 이뤄진 직무 배제와 감찰 조사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국정원은 지난달 1일과 16일, 각각 가해자로 지목된 B 씨와 A 국장을 직위 해제하고 감찰에 나섰습니다. 이후 지난 11일까지 한 달 가량 감찰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오는 21일 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통보한 상태입니다. 지난 6월 처음 사건이 벌어진 지 열 달 만입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피해 직원이 지난 3월 18일에서야 피해 사실을 신고했고, 다음날 원장에게 보고한 뒤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A 국장의 직무 배제가 늦어진 것과 관련해서는, 당시 해당 부서에 코로나19 밀접 접촉자가 발생해 1차 조사가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사건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축소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고가 없어서 몰랐다"입니다.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특히 성범죄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면 수긍할 수 있는 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국정원의 내부 감찰 시스템이 한계를 보였다는 비판'까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한 국회 관계자는 "국정원 내부에서는 사건과 관련한 소문이 연말부터 퍼졌다."라고 전했습니다. 연말에 국회 관계자까지 파악한 이야기를 내부 감찰부서에서 파악하지 못했다고 것, 여러모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오히려 국정원이 내부적으로 '입단속'에 나섰다는 제보도 이어졌습니다. 한 국회 관계자는 "사건 관련 이야기가 돌자, 특정 부서에서 '유언비어를 퍼트리면 엄벌하겠다'라는 내용의 공문을 내려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해자로 지목된 A 국장이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해 여직원을 자신의 부서로 데려가려고 했고, 이에 다시 공포감을 느낀 여직원이 신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성추행 사건을 처음 보도한 SBS 보도가 나간 뒤 한 국정원 관계자는 "사건 터지고 입단속한다고 난리였는데…"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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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지 않는, 드러낼 수 없는, 그래서 더더욱 위험한



이 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국정원 내부 감찰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정보기관의 생명은 보안입니다. 국정원 직원들은 언론인이나 정치인, 특정 기관 관계자를 만나거나 접촉하면 사전은 물론 사후에라도 신고하게 규정돼 있습니다.

이것은 국정원 직원은 공직자나 조직원처럼 언론이나 외부기관, 시민단체, 정치인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게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익명 게시판 앱에 피해 사실을 쓰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국정원 내부 감찰 시스템이 선제로, 정교하고, 세밀하며, 조심스럽게 잘 돌아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국회에서 파악하고 있던 사실을 신고가 들어오지 않아 인지하지 못했다는 설명은,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과거 70년대, 라디오를 통해 우리나라 권투 선수들의 해외 원정 경기 중계방송을 듣고 있으면 무조건 우리 선수가 이기게 돼 있습니다. 경기 내내 우리 선수가 맞은 것은 그저 조금 스친 것이고, 때린 것은 결정타라고 하니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작 결과는 우리 선수의 패배인 경우가 꽤 많았습니다. 경기를 직접 볼 수 없는 청취자들의 물리적 한계, 그리고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설명하는 애국심 가득한 아나운서와 해설자, 이 둘의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낸 촌극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드러낼 수 없는, 그리하여 더 위험한 정보기관의 특성. 70년대 권투 경기와 국정원의 상황이 묘하게 겹칩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자문 받은 국정원 출신 한 법조인도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국정원 보안은 정보활동에 있어서 보안일 뿐이다. 보안을 이유로 조직 내 성범죄를 비호하는 건 법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저희가 이 사건을 기사를 통해 공론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국정원을 담당하는 국회 정보위원회도 조만간 국정원 관계자들을 상대로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중징계와 형사 고발 등 엄중한 후속 조치를 촉구할 계획으로 알려졌습니다.

1번의 대형사고, 그리고 그 뒤에 가려졌던 사건들



세상의 수많은 법칙 가운데 '하인리히 법칙'이란 것도 있습니다. 1903년대 초, 미국의 보험회사 관리자였던 H.W. 하인리히가 고객상담을 통해 사고를 분석해 보니, '1대 29대 300'이란 법칙이 도출됐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하나의 대형사고가 나기 전에 이미 그와 유사한 29번의 경미한 사고가 있었고, 그 주변에서는 300번 이상의 이상 징후가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인리히 법칙은 이번 국정원 성추행 사건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앞서 2017년 3급 처장급 인사가 특수학교·특정 직군 출신 여직원들을 성추행한 일이 발생했고, 2018년에는 인사 담당 부서에서 여성 상사와 남자 부하 직원 사이에 비위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엔 1급 국장이 여직원 2명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온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정보기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으면 진작 언론 등을 통해 알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해 당사자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큰 불이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묻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묻혀 있는 사건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드러난 1번의 대형 사고 외에 29번의 경미한 사고, 300번의 이상 징후들이 여전히 감춰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국정원의 내부 감찰 시스템은 더 정교하고 철저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이례적인 공식 사과 그리고 기대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서 이런 사실이 발생했다는 것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SBS 보도 이후 국가정보원이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이같이 사과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과 설명, 해명, 추후 예정 상황까지 신속하고 소상하게 전달했습니다. 앞서 국정원 관련 취재하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긍정적으로)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진정한 소통을 원한다면 불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자리를 피해서는 안 된다."라는 이창동 전 문화관광부 장관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앞서 박지원 국정원장은 자신의 언론관을 이렇게 밝힌 바 있습니다. "언론에 거짓말하지 마라. 매체 차별하지 마라. 모든 식사는 언론인과 하는 등 끊임없이 소통하라." 그러면서 "언론인을 만나면 평균 도덕적인 감을 유지케 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주어 항상 언행을 스스로 점검하게 된다."라고도 했습니다. 이번 조치는 이 같은 언론관이 반영된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앞서 말씀드렸듯이 정보기관과 언론과의 접촉은 제한적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뿐 아니라 시민단체 등 외부와의 접촉 역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보기관이란 특성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관 스스로 방부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내부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정보기관으로서 국민의 신임을 받고 생명력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의 동양철학자 윌리엄 E. 그리피스는 1882년, '은자의 나라, 조선(Corea, the Hermit Nation)'이란 저서를 통해 "어두운 길을 걷는 메신저(The Messenger on the Dark path)"란 표현을 썼습니다. 바로 암행어사를 일컫는 표현이었습니다. 지금 국민은 우리나라 최고 정보기관에 엄중히 묻고 있습니다. "우리 정보기관 내부에는 과연 '어두운 길을 걷는 메신저'가 있는가?" 이제 국정원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답해야 할 시점입니다.

▶ [단독] "국정원 국장, 여직원 성추행"…뒤늦게 징계 착수
한세현 기자(vetm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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