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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취재파일] '사람이 먼저'라는 정부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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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7월 7일, 김용복 씨는 복숭아를 한 아름 안고 화성 집에 도착했다. 두 자녀를 위해 가욋일로 우비를 써가며 품앗이한 과일이었다. 8살 딸 현정이에게 "학교 다녀와서 먹어"라고 한 말이 마지막이었다. 끝내 딸은 복숭아를 먹지 못했다. 현정이는 사라졌다.

경찰은 '실종'이라고 했다. 김 씨는 발품만 팔면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도 찾아가고 현정이 친구도 만났다. 분명 집 600미터를 앞두고 느리미 부락 앞까지 같이 왔다고 했다. 딸의 통학로를 수십 번, 수백 번 돌고 돌았다. 전단지도 뿌리며 수소문했다. 몇 장 없어 더 귀했던 현정이 사진을 언론사, 경찰서에 제공했다. 그들은 나중에 좋은 소식과 함께 사진도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서른 번의 겨울이 지났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다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딸도, 사진도, 소식도 돌아온 건 없었다. 남은 건 현정이 사진 한 장뿐. 친척 결혼식 단체사진 속에 흐릿한 표정을 지은 현정이 얼굴뿐이었다.

30년이 흐르는 사이, 현정이가 존재했던 모든 곳이 변했다. 딸이 걸었던 통학로엔 반듯한 도로가 생겼다. 논과 밭은 사라져 고층 빌딩이 들어섰다. 느리미 뒷산은 고층 아파트와 근린공원으로 변했고 지하철도 들어왔다. 모든 게 변했지만, 김 씨 가족은 30년 전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했다. 언젠가 딸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문도 잠그지 않았다. 경찰의 실종 처리는 김용복 씨 가족에겐 생존을 위한 주문이자, 믿음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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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밝힌 진실① 30년 전 현정 양 시신과 유류품 은폐한 경찰



2019년 9월 연쇄살인범 이춘재의 자백 사실이 보도됐다. 당초 경찰이 파악했던 연쇄살인 9건보다 더 많은 살인이 있었다는 소식도 연이어 나왔다. 김용복 씨는 직감했다. "혹시 내 딸도…" 무서운 일감(一感)이 들었다. 바로 경찰서로 출발하려는 김 씨, 현정이의 오빠는 "아직 수사 중이라는데 더 확실해지면 가보자"며 아버지를 말렸다.

김 씨의 발걸음은 이미 경찰서를 향했다. 경찰은 "아직 현정이 사건은 수사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확인받았지만, 한 편엔 희망이 고문이던 30년의 세월도 스쳐갔다. 그때만 해도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김 씨는 몇 주 뒤 딸 현정이도 이춘재의 연쇄살인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시에 30년간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잔인한 사실을 마주했다.

현정 양에게 경찰도 가해자였다. 30년 전 현정 양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들이 실종 다섯 달 뒤인 1989년 12월 21일 이미 현정 양의 시신과 유류품을 찾아냈다. 느리미 뒷산 7부 능선에서 줄넘기에 묶인 현정 양 시신(일부), 책가방, 신발주머니, 샌달, 양말, 팬티, 필통, 줄무늬 셔츠, 실내화 1짝, 탬버린. 현정 양이 마지막까지 소지했던 모든 걸 발견했지만, 가족들에겐 30년을 숨겼다. 이 모든 것이 살인사건을 실종사건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경찰은 지난해 7월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현정 양 시신 은폐 혐의 등으로 당시 형사계장 등 경찰 2명(1명은 2009년 사망)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김용복 씨를 1989년 7월 7일에 머문 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한 '30년간의 은폐'는 경찰 2명이 벌인 짓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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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밝히지 않은 진실② "저기 현정이가 잠들어 있다" 경찰 집단적 은폐…악의 평범성



현정 양과 그녀의 가족을 괴롭힌 '30년 은폐'의 진실은 '경찰 수사 결과 보도자료'에 담긴 게 전부가 아니었다. 늘 그렇듯 국가기관에서 공표한 국가폭력사건의 진실은 압축적이고 건조한 반면, 실체는 더 잔인하다.

끝까지판다팀이 입수한 이춘재 수사기록을 보면 현정양 가족에 대한 공권력을 이용한 범죄, 국가폭력, 국가범죄로 불리는 '국가의 오류'는 끔직하고 조직적이었다. '악의 평범성'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30년 전, 경찰 2명이 자행했다는 현정 양의 시신 은폐는 이미 당시 화성연쇄살인 수사팀 다수의 경찰관이 이미 알고 있었다. 뒤늦게 이춘재의 자백이 나오자 이들은 검경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현정이 사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를 덮었다는 말도 들었다." (A 경찰)
"사체가 발견됐는데, 형사계장의 지시로 묻었고, 최초 발견자를 돈으로 입막음했다고 들었다." (B 경찰)
"한 동료가 합장하듯 손을 얼굴에 가져가더니 산 밑을 가리키며 '저기 현정이가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전부터 시신이 발견됐는데도 묻은 걸 알고 있어서 더 묻지도 않았다." (C 경찰)
"실종 1, 2년 뒤 우연찮게 현정 양 사건 서류를 보고 동료에게 물었더니 '현정 양 사체가 발견됐는데 덮었다'고 했다." (D 경찰)
"유류품이 발견된 장소에서 시신이 발견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E 경찰)


경찰 수사 결과와 달리, 당시 수사팀 최소 10명 이상이 이미 현정 양 시신 발견 사실을 알고도 침묵했던 것이다. 취재진이 추적해 만난 당시 수사팀 관계자도 이를 시인했다. 또 다른 경찰들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수사팀 상당수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현정 양 시신 은폐는 여려 동료에게 들었다"고 진술했다. 화성경찰서 수사팀뿐만 아니라 인근 파출소 근무자도 알고 있었다는 시신 은폐 사실. 경찰관 2명이 아닌 경찰의 조직적 침묵과 은폐가 명백했다.

30년 동안 경찰 그 누구하나 현정 양 가족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 줄 생각도, 의지도, 노력도 없었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시신 은폐와 함께 죄의식도 희석돼 있었다. 딸을 찾아 30년간 경찰서를 드나든 김용복 씨에게 "실종"을 말했던 경찰관들, '악의 평범성'은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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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밝히지 않은 진실③ 현장 증거 조작 의뢰조차 안 해…이춘재 대신 살인 은폐 경찰



수사기록엔 경찰이 공개하지 않은 불편한 진실들이 다수 기록돼 있었다. 증거를 수집하는 경찰이 증거를 조작한 것도 그 중 하나다. 이춘재는 지난해 11월 검찰청에 출석해 "살해 이후 현정 양 옷 등을 현장 주변에 던졌다"고 진술했다. 살해 사실을 숨기기 위한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정 양의 유류품이 발견된 다음날인 1989년 12월 22일 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를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가출인(현정 양)의 옷이 신발주머니 속에 정리돼 넣어져 있어 불상인이 가출인의 옷을 새로 구입 내지 사전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게 한 후 근처에 버린 것으로 보여 단순 가출로 사료됨. (1989. 12. 22. 보고서 中)'


살인을 했다고 털어놓은 이춘재, 살인이 없었다는 경찰. 극단적으로 상반된 사실을 두고 경찰관들은 30년이 지나서야 검찰 조사에서 이런 진술을 했다.
"속옷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A 경찰)
"현장만 보면 현정이가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B 경찰)


취재진이 접촉한 경찰관은 "옷이 가시나무에 걸려 있었고, 유류물을 들춰 보니까 명찰에 현정이 이름이 있었다"고 실토했다. 증거 조작이었다. 살인을 실종으로 바꾸기 위해 현장 증거까지 조작한 것이었다. 경찰이 시작한 거짓말의 결과는 처참했다.

경찰이 시신을 은폐하고 현장 증거를 조작하면서, '현정 양 시신을 묶었던 줄넘기 줄'에 대해 국과수에 의뢰조차 하지 않았다. 이춘재가 손을 댈 수밖에 없었던 범행 도구를 경찰이 감춰준 것이다. 범인 대신 경찰이 범죄를 숨겨준 꼴이 됐다. 결과적으로 현정 양의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든 것도 경찰이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현정 양의 유품조차 김용복 씨는 만질 수 없었다. 현정이의 가방, 신발, 옷가지 그 무엇 하나 경찰은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경찰이 밝히지 않은 진실④ "수사 재개하려 했다" 과거 잘못 옹호하는 경찰



당시 수사팀은 30년 만에 진실을 말했지만, 철저히 제3자적 관점을 유지했다. 나의 업무가 아닌 다른 이의 업무인 양 진술했다. 직접 접촉한 경찰관들 중에서도 반성을 입에 올린 이들은 없었다. 그들은 침묵의 이유에서 변명을 택했다.
"서로 금기시하는 분위기였다." (A 경찰관)
"말석이라서 감히 이야기 못했다. 나만 입 다물면 된다고 생각했다." (B 경찰관)
"또 연쇄살인으로 시끄러워질까 봐…." (C 경찰관)


한 전직 경찰관은 검찰 조사에서 "경찰관들은 참회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스스로 반성의 주체가 되진 않았다. 그가 말한 반성의 대상자들은 침묵한 자신이 아닌 시신을 직접 은폐한 경찰관이었을 뿐이었다.

과거 경찰의 과오를 수사한 현재 경찰은 선배 경찰관 2명만 입건하면서, 검찰에 58페이지 분량의 의견서를 보냈다. 범죄 사실, 적용 법조, 검토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현 경찰은 의견서 서두에서 이 사건을 이렇게 규정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쳐 민주화 시대로 진입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민생 치안의 공백에 따른 이면을 대표하는 사건. (의견서 2p)'


그리고 경찰은 현정 양 시신과 유류품을 은폐한 선배 경찰관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경찰은 이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볼드체를 사용했다)
'피의자들은 김현정의 사체 등을 완전히 은닉해 살해 사실을 영구히 감추려 했다기보다는 일시적인 수사업무 부담감에서 벗어나고자 사체를 은닉하고 허위 보고를 한 뒤, 추후 용의자가 정확히 특정 검거되면 수사를 재개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견서 27p)'


죄의식이 마비된 과거 경찰을 두고 현 경찰은 '일시적 수사업무 부담감'을 말했다. 김용복 씨의 믿음을 이용해 딸의 살해 사실과 시신까지 숨겼는데도 말이다. 애당초 경찰은 용의자를 찾지 않기 위해 현장 증거를 조작했고 시신까지 은폐했다. 이춘재의 자백이 없었다면 김용복 씨는 지금도 딸을 찾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사 재개'라는 단어를 썼다. 경찰이 의견서를 통해 확인시켜준 건 하나다. 반성은 고사하고, 재발 방지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장짜리 불기소 결정문' 피해자 위에 군림하는 검찰



30년 전에도, 이춘재 자백 이후에도 이 사건 수사 주체는 경찰이었지만, 검찰은 지휘 책임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지금까지 수많은 용공 조작 등 과거사 사건에서 검찰은 당사자였다. 정권 교체 후 문무일 검찰총장이 과거사를 공개 반성하며 비상상고(확정된 판결에서 오류가 발견돼 검찰총장이 직접 대법원에 제기하는 구제 수단)까지 했지만, 본질은 그대로였다. 재심 사건에서 무죄 구형한 검사를 징계했던 옛날 검찰, 피해자는 안중에 없던 과거와 달라진 게 없었다.

국가폭력 피해자가 진실이 드러나면 마주하는 첫 번째 벽이 있다. 공소시효다. 김 씨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공소시효를 연장할 수 있는 각종 판례를 주장하며 지난해 1월 고발장을 제출했다. 경찰의 직무유기죄가 성립되고, 직무유기죄는 계속범(즉시범과 달리 범죄 상태가 계속되는 범죄)이니 공소시효는 현정 양의 시신을 은닉한 1989년이 아니라 은폐 사실이 드러난 2019년부터 산정해야 된다는 게 요지였다. 검찰의 답은 어땠을까.

고발 1년 만인 지난 1월 '불기소 결정문'이 김용복 씨 앞으로 도착했다. 5줄 내외 피의 사실을 제외하고. '불기소 이유'는 39자가 전부였다.
'본 건은 1995. 1. 11 및 1997. 1. 11.의 경과로 5년 내지 7년의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


김 씨의 주장을 왜 받아줄 수 없는지 설명은 없었다. 법 해석상 수용 불가능한 주장이었다면, 그 이유라도 쓰여 있어야 했다. 하지만 30년 동안 이뤄진 범죄를 A4 반장에 압축시켜놓더니, 공소시효 기산점 산정 이유는 말해주지도 않았다. 검찰은 국가기관의 횡포에 시달린 김용복 씨에게 또 다시 국가기관의 이름으로 군림한 것이다.

검찰은 김 씨를 그저 검사가 결정하면 따라야 하는 대상, 법에 있어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겠지만, 그는 적어도 법과 공소시효의 존재 가치에 대해선 검사보다 더 절실히 알고 있었다. 불기소 결정문을 쥔 김 씨의 손은 연신 떨렸다. 결정문을 작성한 검사의 이름을 인터뷰 내내 부르며 한탄했다.
"검사가 나한테 어떤 말이라도 들어보고 이런 판결(결정)을 했으면… 나한테 한 번도 말이 없었어요. 경찰이 고생해서 범인을 잡으려 하다가 못 잡으면, '이제 그만하라'고 공소시효가 있는 거 아닌가요? 이 사안은 경찰이 30년 동안 시신을 숨겨 놓은 건데, 이제 와서 공소시효가 없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검사나 판사들은 자식 안 키우나요? 자식을 잃어버리고 30년, 40년 있어봐라 해요. 차라리 죽었다고 했으면 가슴에 묻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유품이라도 봤으면, 온 산을 다 뒤져서 시신이라도 찾았을 것 아니에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가범죄에서 시효를 없애자"고 말한 지 16년이 흘렀다. 2005년 그의 '시효 폐지' 제안을 국회는 파격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세상은 조금씩 변했다. 13세 미만 성폭행,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사라졌고, 이젠 국가폭력 앞에 멈춰서 있다. 언제까지 검찰이 공소시효를 전가의 보도마냥 국가폭력 면죄부로 활용하는 걸 지켜봐야 되는 걸까.

'한명숙 총리 기록' 대신 '현정 양 수사기록'을 봤다면…피해자에게 책임 떠넘긴 법무부



지난해 3월, 김용복 씨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도 제기했다. 형사 고발과 민사 소송 모두 딸의 시신 은폐에 책임을 묻기 위한 것이었다. 딸의 죽음에 진실을 밝히고, 국가의 책임을 확인받기 위한 의지가 그만큼 강했다.

첫 재판이 시작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현정 양 사건 기록의 열람 등사를 어렵게 하는 방식으로 정부는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 현정 양의 어머니는 숨을 거뒀다. 김용복 씨는 아내가 끝내 딸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게 한스럽다고 한다.
"마누라는 현정이가 죽었다는 걸 인정 안 하고 갔어요. 시신을 봤어요? 가방을 봤어요? 유류품을 봤어요? 뭘 봤어요? 아무 것도 못 봤으니까…. 죽기 전엔 나한테 현정이 데리고 오라고 말도 했어요. 예전엔 못 살아서 현정이를 어디 맡겨 놓은 거 아니냐면서, 이젠 밥은 먹고 살만하니까 데리고 오라고 그런 말까지 했어요."


공소시효도, 재판 지연도, 시간은 언제나 강자의 무기였다. 현정 양 가족의 빈자리가 또 하나 늘어나는 사이, 정부는 더 가혹한 방식을 취했다. 3월 18일 첫 재판 전, 법무부, 즉 정부는 "김용복 씨의 청구를 기각해달라. 소송 비용도 김 씨가 부담하게 해달라"고 짧은 입장을 내놨다.

법무부가 법정에서 김 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이, 법무부 장관은 6천 페이지 분량 '한명숙 전 총리의 수사기록'을 직접 검토하는 사진을 SNS에 게재했다. '전직 총리 사건기록' 대신 '8살 현정 양 사건기록'을 봤다면, 시간이 없어 기록 전체는 힘들어 요지라도 검토했다면 "책임이 없다"는 말을 감히 김 씨에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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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 없던 과거 정권 비판했던 文 정부 "소멸시효 완성" 주장



과거사 사건을 자주 수임했던 한 변호사는 이런 말을 했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길을 가다 머리에 화분을 맞은 사람과 같아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당한거죠.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국가는 화분이 떨어지는 사이 왜 못 피했냐고 그래요."

'화분이 떨어지는 사이', 바로 시효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두 가지 벽이 있다. '공소시효'와 '소멸시효'다. 화분을 떨어뜨린 게 사인(私人)이라면 처벌도 배상도 물을 수 있겠지만, 국가라면 달라진다. 국가의 조직적 은폐 탓에 실체가 드러나는 것도 어렵고, 드러나도 시간이 한참 지난 뒤다. 국가는 공소시효 뒤로 숨게 된다.

민사적으로 책임을 묻기 위해 배상을 요구하면, 국가는 '소멸시효'로 답한다. 피해자가 일정 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 권리는 이미 소멸했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잘못은 옛날 옛적에 했는데, 왜 이제야 우리한테 책임을 물어요"라는 식이다. 졸지에 국가폭력 피해자를 '권리 위에 잠자는 자'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이다.

누가 봐도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황당할 테지만, 불행하게도 이런 비상식적 주장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과거사 소송에서 국가는 기계적으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했다. 사법부는 한 술 더 떴다. 피해자에게 지급해야 할 배상금을 줄여 정부 책임을 경감하기 위한 기교 사법이 난무했다. 사법농단 문건에서 노골적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이런 몰염치한 행태를 비판했던 게 이번 정부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국가폭력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재심>을 관람하며 과거사 반성에 인색했던 과거 정부와 차별성을 내세웠다. 취임 이후인 2018년 4월엔 '국가폭력 배상 소송의 절차 지연을 줄이고, 조기에 피해구제 절차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한다'는 법무부 보도자료까지 배포했다. '과거사 사건에 대한 진정성 있는 후속조치가 이뤄지고 있다'는 자찬도 덧붙였다.

현실은 달랐다. 진정성도 후속 조치도 없었다. 3월 18일 첫 재판에서 이미 '김용복 씨의 청구를 기각 시켜달라'는 짧은 입장을 밝혔던 정부였다. 한 달 보름 뒤인 4월29일, 정부는 두 번째 입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5월6일 열린 2차 재판을 앞두고 정부의 공식 입장을 가다듬은 21페이지 분량 준비서면(변론 내용을 미리 적어 법원에 제출한 문서)이었다. 여기서 정부는 과거사 소송에서 더는 등장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단어까지 꺼내 들었다. '소멸시효 완성'이다.
"원고(김용복 씨 가족)들이 주장하는 (정부의) 위법행위가 1989년 당시 있었다고 가정해도, 이 사건 소는 그때로부터 5년이 도과해 소멸시효가 완성된 후 제기됐습니다. (준비 서면 3p)"


1989년 7월 현정 양이 사라진 후 다섯 달 뒤인 12월 경찰의 시신 은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 때로부터 5년이 지났기 때문에 정부의 배상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번 정부가 비판했던 과거 정부의 행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리어 퇴보한 셈이었었다. 이전 정부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시효 완성은 재판에서 번번이 깨져 왔다. 법원은 '국가의 방해로 권리행사에 장애가 있었다면 국가의 시효 완성 주장은 신의성실 원칙에 위배된다'는 판례를 공고히 했다. 이미 확고한 판례가 있는데도, 이번 정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는 걸 정부도 모를 리 없다. 김용복 씨가 경찰의 시신 은폐를 알게 된 건,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2019년 말(이춘재의 자백 시기), 경찰이 시신 은폐 사실을 공식 발표한 건 이듬해인 2020년 7월 2일, 김 씨가 소송을 낸 시점은 이보다 넉 달 앞선 2020년 3월이다.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불법행위가 있던 날로부터 5년'이다. 시효가 충분히 남아있다는 뜻이다. 이런 구구 절절한 설명이 없어도 뻔히 아는 사실인데도, 법률전문가 집단인 법무부(국가)는 시효 완성을 외쳤다. 그래서 더 악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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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먼저다'는 이번 정부, 김용복 씨의 자리는 없었다



국가폭력 사건은 국가기관의 오류가 겹치면서 발생한다. 정부, 법원, 검찰, 경찰 등 각 기관 중 한 곳에서라도 제 기능을 수행했다면 오류는 막을 수 있었다. 국가의 무오류는 기대할 수 없다지만, 피해자가 치러야 할 고통은 처참하다. 국가의 잘못으로 피해가 발생했고, 국가의 은폐로 고통은 가중됐고, 진실이 드러나도 국가는 외면한다. 국가폭력을 당하면 늪에 빠지게 되는 이유다.

국가폭력 피해자는 현정 양의 아버지 김용복 씨 외에도 많다. 인혁당재건위, 죽산 조봉암 선생, 진도간첩단, 유서대필 강기훈 선생 등 무수한 과거사 사건 피해자가 있지만 정확한 규모조차 알 수 없다. 국가의 법률 사무를 담당하는 법무부에서 취합조차 않으니, '많다'라는 단어 말곤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형사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2000년부터 2019년 6월 사이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을 받은 게 1천19건이라는 추정치가 나온다. 그러나 이 역시 '재심'만 포함될 뿐 김용복 씨 같은 피해자는 포함 되지 않는다.

이번 정부는 '사람이 먼저다'고 외쳤지만, 그곳에 김용복 씨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의 자리는 없는걸까. 김 씨에게 있어 정부는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못했다. 정부는 치졸한 방식으로 반성을 회피했고 가혹한 방식으로 김 씨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김 씨에게 있어 법률과 공권력은 '선을 위장한 악'으로 작동했을 뿐이다. 이젠 국가의 존재 가치도, 법의 효능감도 상실해버린 김 씨, '인권'을 기치로 내건 이번 정부에게 인권은 정치적 수사였을 뿐이었다.


권지윤 기자(legend8169@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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