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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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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소생술사' 김종인, 윤석열과 같이갈까 [레이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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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매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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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1940년 7월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시 관악구)에서 태어났다. 다섯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할아버지 손에 컸다.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로 선생이다.

서울 덕수국민학교를 다니다 6.25 전쟁 발발 후 광주로 피난을 가 광주 서석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광주서중에 진학해 1년 반을 다니다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와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했다. 1959년 한국외대 독일어학과에 입학한 뒤 1963년 졸업한다.


할아버지 영향으로 정치 경험

김 전 위원장에게 할아버지의 영향은 지대하다. 김병로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을사의병에 참여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엔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인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이었다. 해방 공간에선 건국운동을 펼치며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기도 하고 좌우합작에 힘을 보태는 등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됐다. 1957년 퇴임 뒤엔 재야 정치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김 전 위원장이 대학을 졸업한 1963년 초엔 5.16 군사정변 이후 금지됐던 민간인의 정치활동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1962년 말부터 5·16 군부세력에 맞선 야권 창당 움직임이 시작됐고 1963년 김병로 선생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께 민정당을 창당했다.

김 전 위원장은 이 시기 할아버지의 비서를 자처했는데 이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변인들로부터 "할아버지를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주변을 맴돌던 여러 군상의 정치인들을 지켜보면서 '자잘한 권력을 탐하는 정치 낭인'들을 많다는 것을 느꼈고 이들 때문에 할아버지가 상처 입는 것을 막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여러 정치인들과 약속을 주선하고 일정을 수행하고 회의에 배석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젊은 나이에 현실 정치의 내밀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


독일 유학 뒤 박정희과 인연

1964년 김병로 선생이 78세의 나이로 별세한 뒤 김 전 위원장은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대다수가 미국 유학을 가던 시기이지만 '사회과학'을 배우란 할아버지의 당부를 따라 유럽을 택했다. 독일어를 전공했고 학비가 적게 든다는 영향을 끼쳤다. 그는 사회과학 중에서도 경제학, 그 중에서도 재정학을 공부했다. 뮌스터대학에서 8년간 공부해 경제학 박사 학위를 얻었다.

1972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한국은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선포된 상황이었다. 김 전 위원장은 1973년부터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자로서 정부 정책에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74년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가가치세 도입을 추진했는데 김 전 위원장 '시기상조'라며 적극적으로 반대의견을 냈다. 부가세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 정도의 거래 투명성과 문화가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교실 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 이야기였지만 소식이 알려져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고 '부가가치세 시찰단'으로 유럽을 방문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정책에 가감없는 직언을 한 김 전 위원장을 눈여겨봤고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을 통해 '물적, 인적 지원을 해줄테니 경재정책 전환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김 전 위원장은 혼자선 할 수 없다며 팀을 만들어 달라고 했고 그를 포함한 5명의 교수와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 경제특보가 참여하는 '금요회'가 만들어졌다.


근로자 재형저축과 의료보험

당시 그가 주목한 건 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노동자층이었다. 산업이 고도화되면서 노동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에 주목했고 향후 이들이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력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노동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금요회를 꾸리며 가장 먼저 연구에 착수한 것도 노동법 개정이었다.

그러나 금요회 활동 중에 노동청장과 경제수석이 교체되면서 상황이 여의치 않아졌다. 그 다음으로 눈을 돌린게 근로자 재산형성 저축과 의료보험이었다. 그는 재형저축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산 증식을 도와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효과를, 의료보험을 통해선 이들의 생활 안전망을 구축하는 효과를 기대했다. 이 같은 주장이 받아들여져 1976년 근로자 재형저축이, 이듬해엔 근로자 의료보험이 실시됐다.

김 전 위원장은 지난해 여당이 추진한 경제 3법에 대응해 '노동 개혁' 카드를 꺼내들어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평생 숙원이기도 하다. 그가 주장하는 노동 개혁의 골자는 기업별 노조가 아닌 산업별 노조 중심의 노사 관계 구축이다.

그는 한국의 노조 조직률이 낮은 이유가 기업별 노조 위주의 구조에 있다고 본다. 동일한 산업군이더라도 자신이 중소기업 직원이라면 노조 가입의 효용성을 잘 느끼지 못하는 반면 대기업이면 적극 가입할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결국 소수 대기업 노조만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조들 간에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생겨 단결력은 약해지고 반대로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기업 입장에선 노조를 다루기 쉬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산별 노조가 생기긴 했지만 기업별 노조의 연합체 수준이기 때문에 의미가 거의 없다고 평가한다. 비정규직 차별 문제 역시 정규직만을 대상으로 하는 기업별 노조 문화 때문에 해소가 어려운 환경이라고 주장한다.


‘논란'의 국보위 활동

1979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고 김 전 위원장은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재무분과 위원으로 참여한다. 추후 이 이력이 문제가 돼 비판을 받으나 그는 "무작정 안 가겠다고 하기엔 엄혹한 시국이었다"고 회고했다.

국보위가 그를 호출한 건 부가세 폐지를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이 부가세 도입 때문에 몰락했다고 판단했고 이에 부가세 반대론자로 알려진 김 전 위원장을 부른 것이다. 그러나 김 전 위원장은 애써 도입한 부가세를 다시 폐지하면 또 다른 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입장을 냈다.

1981년 국보위 해체와 동시에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전국구(현재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는 이 시기 전두환 정부가 추진하려 했던 교육세 도입, 금융실명제 등에도 반대 의견을 냈다. 거듭된 쓴소리에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경제과학위원회로 상임위를 옮기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이에 의원직에서 사퇴하려했으나 당시 이춘구 내무부 차관의 만류로 임기를 마쳤고 12대 총선에서 다시 전국구 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 재선 의원이 된다.




경제민주화 헌법 조항

헌법 119조 2항은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부분이다. 1987년 헌법개정 당시 해당 조항에 관여한 인물이 김종인 전 위원장으로 알려져 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에 의해 전두환 정권이 막을 내리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내놓는다. 국회에 헌법특위 구성되고 민정당 개헌특위 위원이었던 김 전 위원장은 헌법특위 경제분과위원장을 맡게 된다. 당시 그는 "머지않은 미래에 경제세력이 정치세력을 앞지르게 될 것이고 자기들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이려는 욕심을 갖게 될 것이기에 그들을 제어할 헌법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해당 조항을 반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과 갈등하기도 했다.

1988년 출범한 노태우 정권에서 김 전 위원장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다. 경제수석 재임 시기 주택공급 부족과 저금리가 맞물려 부동산 가격 급등이 일어났는데 전임 경제팀에서 제시했던 주택 200만호 공급을 달성하기 위해 재벌 기업들의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을 지시하기도 했다. 부동산 폭등에 재벌들의 투기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른바 5.8 대책이었다.

매각 대상으로 삼은 토지만 5741만평에 달했다.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고 당시에도 '재산권 침해'라는 비판이 있었으나 그는 회고록에서 "헌법의 경제민주화 조항이야말로 이런 순간에 적용하라고 만든 조항"이라고 밝혔다.

이외에도 당시 재벌들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기 위해 주력 업종 3가지만을 선정해 집중하도록 하는 방침을 만들기도 했다. 1992년 경제수석에서 퇴임한 뒤 14대 총선에서 또 다시 비례대표로 당선돼 3선 국회의원이 된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경제 브레인' 역할을 하며 승승장구 했지만 암흑기가 찾아온다. 1993년 불거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다. 경제수석 시절 안영모 동화은행장으로부터 은행장 연임을 도와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 차례에 걸쳐 2억1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다.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고 의원직을 박탈당한다. 이후 사면복권으로 피선거권을 회복하지만 오랜 기간 야인에 머물렀다.

김대중 정부에서 경제부총리 겸 재경부장관 하마평에 올랐고 실제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고사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도 후보 시절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당선 후엔 함께하지 못했다. 이후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한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활약했던 그가 진보정당에 영입돼 출마한다는 것 자체가 화제였다.

당시 그를 영입한 건 조순형 대표였다. 이 때도 비례대표로 출마해 4선에 성공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은 탄핵 역풍으로 9석을 얻는데 그쳤다. 임기를 마친 뒤엔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고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장, 한국외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새누리당 비대위원 활동과 대선 승리

김 전 위원장은 17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며 사실상 정계 은퇴를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2011년, 또 다시 정치권은 그를 호출한다. '서울시 무상급식 사태'로 위기를 맞은 한나라당의 의원이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에게 비상대책위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김 전 위원장과 박 전 대통령은 17대 국회에서 첫 인연을 맺었다. 2006년 박 전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할 일이 생겨 김 전 위원장을 찾았는데 그는 "메르켈을 잘 벤치마킹하고 오라"고 조언했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이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석패한 뒤 이를 승복하고 선대위에 참여해 돕는 모습에서 신선함을 느꼈다고도 했다.

비대위원직을 수락한 김 전 위원장은 첫 회의에서 한나라당이 위기 극복을 위해 "브랜드를 완전히 바꾸는 결단까지 내려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김 전 위원장은 이에 맞춰 당의 정강정책 수정에 나선다. 그는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단어를 모조리 빼버리고 '경제민주화' 개념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한다. 즉각 당내 반발에 부딪혔다.

박 전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비대위원을 사퇴하겠다고 배수진을 쳤고 결국 이를 관철시켰다. 쇄신에 성공한 새누리당은 19대 총선에서 승리한다.

총선 이후 김 전 위원장은 독일 여행길에 올랐으나 박 전 대통령은 그를 다시 찾는다. 총선에서 경제민주화라는 슬로건이 유효하게 작용했다며 자신의 대선 도전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김 전 위원장은 캠프에 합류해 경제민주화의 구체적 공약으로 순환출자 해소, 다중대표소송제, 집중투표제 도입 등을 제시했다. 일부 공약이 또 다시 박 전 대통령 참모들의 반대에 관철되지 않으면서 삐그덕거리는 모양새가 연출되기도 했으나 박 전 대통령은 당선에 성공한다.


민주당 비대위 대표
2016년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총선을 3개월 앞두고 분당으로 위기를 맞이한 더불어민주당이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은 사흘 연속 김 전 위원장의 자택을 찾았다. 말그대로 '삼고초려'였다.

김 전 위원장은 회고록에서 당시 새누리당이 집권 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야권 분열에 어부지리로 '보수정당 영구 집권론'을 펼치는 상황을 지켜만 볼 수 없어 민주당 비대위 대표직을 수락했다고 밝혔다.

이때 내세운 구호 역시 경제였다. 여전히 양극화 문제가 화두라는 판단에 '포용적 성장'을 필두로 재차 경제민주화를 강조했다. '친노 컷오프' '셀프 공천' 등의 논란도 겪었지만 123석을 얻으며 민주당에게 승리를 안겨줬고 동시에 비례대표 2번으로 5선 고지에 오른다. 그러나 이후 문 대통령과 갈등 끝에 2017년 3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4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일주일 만에 포기한다.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2020년 21대 총선에선 다시 보수진영의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판단"이라며 선거를 20일 앞두고 미래통합당의 총괄 선대위원장직을 수락한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정권 안정을 바라는 민심이 대세를 이뤘고 출마자들의 막말 논란 등이 겹치며 참패한다. 황교안 대표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김 전 위원장은 이듬해 4·7 재보궐선거까지 당을 이끌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된다.

이후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태, 추미애-윤석열 갈등, LH 투기 의혹 파문 등 연이은 악재가 터지면서 여당은 위기를 맞이했고 결국 야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위원장은 서울시장 야권 단일화를 오세훈 후보로 관철시키며 '제1야당'의 위상을 높이는 성과를 만들었다.


다시 킹메이커 나서나

김 전 위원장은 도움을 준 정당마다 선거 승리를 이끌어내면서 ‘정당 소생술사', ‘정당 부활 전문가'란 평가를 받았다.

선거 직후 자연인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향후 행보에 정치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대선을 앞두고 또 다시 '킹메이커' 역할에 나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직을 내려놓은 뒤에도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연일 메시지를 내놓고 있다.

국민의힘을 향해 선거 승리 이후 밥그릇 싸움에 빠졌다며 '아사리판'이라고 날을 세웠다. 대선 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선 "만나보고 대통령 후보감이라고 판단되면 도울 수 있다"고 기대를 드러냈다. 또한 윤 전 총장이 국민의힘에 합류할 일은 없을 것이라며 '금태섭 신당'에 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이후엔 금태섭 전 의원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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