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을 꿈꾸는 '비주류' 박용진
1. 한 번도 야당에 승리를 내준 적이 없는 자신의 지역구에서조차 완패했으니 충격이 컸을 텐데 그 충격이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선거 참패로 얼굴이 허얘져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였다. 자신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모두가 '죄인'이라고 했다.
"서울 지역구 의원 41명, 우리당 의원 174명이 다 똑같이 이 무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말을 못 했거나 말을 해도 하는 듯 마는 듯했거나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죄인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선거가 실시되기 보름 전인 3월 말쯤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약속 날짜를 선거 다음날인 4월 8일로 잡은 것은 결과가 뻔해 보이는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과 이 사람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패배가 확인된 이후에야 난리라도 난 듯 요란스럽게 반성과 쇄신을 말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서울 민심이 돌아설 때가 최대 위기입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1978년 10대 총선에서 당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에 앞섰어요. 그 민심을 무시하다가 그 다음 해 10.26이 났어요. 87년 민주 대항쟁도 서울에서 야당 바람이 분 1985년 12대 총선 결과를 무시한 결괍니다. 2016년 총선에서 우리가 한 석 이겼어요. 당시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박근혜에게 국정운영 기조 바꿔라 그랬는데 그 말 안 들었다가 탄핵당했어요. 선거로 민심이 먼저 나타났어요. 특히 서울 선거가 그래요. 이것을 진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매번 정색을 하고 경고음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아예 입 다물고 있었던 사람들보다야 낫긴 했지만 이 사람 말이 매번 날이 서고 선명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끝을 흐리거나 말을 우물거리기도 했다.
정치적 사안이 터지면 언론은 이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 사람은 답을 피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면 당연히 현안에 대해 자기 주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라고 했다. 문제는 그런 당연한 일을 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생각은 더 비판적인데 발언 수위를 조절합니까.
"네, 조절합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정말 난리 날지도 몰라요. 이 정도 이야기해도 충분히 의사가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누구를 상처 주거나 엄청난 당내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선거 직후 의원총회에서 다른 의원들도 그러시던데 우리가 할 말을 더 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각을 세운 적이 없다. 쓴소리를 할 때도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대놓고 항명을 한 적도 거의 없다.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것은 맞는데 선을 넘지는 않았다. 섬세하게 조율된 반대의 목소리로 들렸다.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 민주당 안에서 이 정도의 말을 끊임없이 해온 것만도 용기를 낸 것이다.
"20대 국회에서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초선 의원들 모임이 있었고 제가 간사 역할을 했어요. 이름도 짓지 않고 외부에도 모임 자체를 알리지 않았어요. 수요일 오찬을 같이하면서 의견을 모아 조용하게 당 지도부와 청와대에 전달했어요."
조국 사태가 정점으로 치닫던 2019년 10월 3일 초선 의원 대표단이 청와대를 방문해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거의 없고 초선의원들이 단체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조금박해'라고 불리는 의원들 사이에 연대의식이나 동지애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따로 결성식을 갖거나 한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조국 사태 때 딱 한 번 조직적으로 움직인 적이 있어요. 의원총회에서 저는 일단 빠지고 나머지 세 명이 우르르 나가서 발언을 했어요. 한 선배 의원이 뛰어나오더니 '스크럼 짜는데 기운 빼지 마라'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제압당하고 나서 이게 힘들구나 싶었죠"
"문자 폭탄 오고 댓글 험하게 달리는 것은 상관없는데 박용진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너희들은 이야기 안 하느냐고 할 거고, 박용진이 잘못했다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그러냐고 할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의원들과 비교가 되는 게 참 불편하죠."
3시간 반 넘는 대화 도중 이 사람 표정이 쓸쓸해 보인 것은 이 대목이 유일했다.
3. 얼마 전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 이수호 전교조 초대 위원장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수호는 신일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고 권영길은 1997년 대선을 시작으로 진보 정당 운동을 함께한 정치적 아버지 같은 존재다. 박용진이 세배를 빠트리지 않는 두 명의 어른인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세배를 못해 따로 식사를 모셨다고 했다. 이수호가 전교조 사태로 해직되었을 때 박용진이 이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권영길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날것 그대로의 진보 정치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두 사람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은 자신의 정치적 뿌리가 진보에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도 보인다. 진보가 아닌 의제까지도 굳이 진보라는 접두사를 붙여 설명하는 느낌도 없지 않은데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자부심을 <진보>라는 단어에 담고 싶은 거라고 이해했다.
1998년 IMF 시기는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진보정당을 만들려는 모임에서 1주일에 3만 원 활동비를 받으며 살았다.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다가 두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다. 배신자, 출세주의자라는 욕을 들어가며 민주당으로 넘어온 뒤에도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앞문은 열리지 않고 뒤에서는 짱돌이 날아오는' 시절이었다. 진보보다는 정치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며 민주당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람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민주당으로 건너왔지만 당내 경선에서 탈락해 다시 4년의 원외 시절을 보냈다. 이 사람의 재주를 높이 산 우상호의 천거로 당대변인으로 활약했다. 2년 동안 무려 9명의 당대표, 비대위원장을 모시면서 주류 정치의 이면을 배운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4. 타고난 정치인이다. 어디에서든 앞줄에 서려는 사람이고 할 말 있으면 언제든 손 들고 나서는 사람이다. 욕망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등 떠밀려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자 언제나 할 말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본인은 비주류, 변방의 삶이라고 했지만 속한 조직이 비주류였을 뿐이다. 어느 조직에서도 이 사람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인의 싹수를 보였다. 동창들 단톡방에 '내가 000에 출마하면 꼭 한 표 던져 다오'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더니 친구들 반응이 너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랬다는 말을 들었다. 신일고등학교 동창인 탤런트 임원희는 박용진이 커서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력에 대한 이 사람의 욕망은 날것 그대로다. 이재명에 못지않은 야심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다른 정치인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바보 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다. 죽어도 내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 단단하다. 재선 의원인데 삼선 의원에 못지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것은 민노당 대변인으로 3년, 민주당 대변인으로 2년을 보내면서 언론 접촉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이후 원외 인사로 민주당 대변인을 맡은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 길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게 사는 데 별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늘 기분이 좋아요. 정신병리학적으로는 좀 안 좋은 거라고 하는데 상시적인 조증 같은 거죠.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금방 잊어버려요. 남들이 '야 박용진 상처받았겠다' 이러는데 정작 저 자신은 그걸 잘 기억을 못 해요. 어디에 적어 두거나 남들과 이야기를 하면 기억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고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잠시 다녔다. 1979년 경찰관이던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오면서 본적을 서울로 바꾸었다. 호남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을 때라 본적을 바꾸는 호남 출신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사람 가족도 그랬던 것이다. 9살 나이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그리 없을 거 같은데 호남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 올라왔는데 본적을 바꾸겠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나는 전라북도 사람 할래 했는데' 어머니가 서울에서는 호남 사람으로 찍히면 안 된다고…우리끼리만 고향 잊지 말자 그러시더라고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 조롱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어른들이 상처 주지 않으려고 하신 건데 너무 슬픈 거죠."
학생운동을 하는 아들과 경찰관 아버지의 갈등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입대하라는 아버지 앞에서 '저는 사회주의자예요'라고 말해 듣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구속되었을 때 푸른색 수의를 입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총선에 나가겠다고 할 때 아버지는 무슨 돈으로 선거를 나가느냐며 혹시 김정일이 돈 보냈느냐고 했다. 한국 전쟁을 겪고 평생 경찰관으로 살아온 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5.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 사람 모습은 물 만난 고기였다. 왜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는지 목표가 분명했으니 해야 될 일도 분명했다. 어떤 난관이 있을지, 그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구호나 목소리 큰 것만으로는 빵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다는 이 사람의 신념이 성과로 이어진 빛나는 시절이었다.
첫 상임위원회는 정무위원회였다. 4조 5천억 원에 달하는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삼성과의 싸움인 동시에 국회의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엘리트 관료와의 싸움이었다. 검은 돈을 뿌리뽑겠다는 금융실명제의 취지를 앞세워 금융위원회 엘리트 관료들을 제압했다. 호통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겼다는 점을 이 사람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 권력과 맞서는 다윗 같은 모습이었고 삼성이라는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짱돌을 명중시켰다. 재벌 개혁의 기수,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교육위원회로 옮겨서는 유치원 회계의 투명성 문제를 제기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교육부 관료들은 더 잘 알고 있는 문제였는데 모두 쉬쉬하던 사안이었다. 유치원 원장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집요하고 독하게 싸웠다. 국민들에게 박수를 제일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유치원 3법이 통과되던 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로 꼽았다. 의원회관 이 사람 방에 가면 당시 신문 스크랩을 액자에 넣어 진열해 두고 있다.
"대한민국 비주류 정당에서 어렵게 국회의원 돼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좋아할 제도 개선을 이루어 냈는데 얼마나 기뻐요. 그때 찍은 사진을 내가 죽거든 영정 사진으로 쓰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2018년 10월, 유치원 비리 근절 국회 토론회장은 이 사람에게 쏟아지는 야유와 욕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짱 하나만큼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인정한 이 사람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다.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어떻게 보도될까. 이 사람들이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구나. 절대 화내지 말자. 저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면 당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모습이 국민들 분노를 폭발시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카메라에 어떻게 잡힐지, 화면에 어떻게 보일지, 자신에 대한 기사가 어떻게 시작될지를 늘 고민한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천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인연이 거의 없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종종 언급했다. 두 사람의 성공 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엇보다 두 거인이 보여준 대중 정치인의 미덕을 닮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6. 이 사람은 청년들의 대변인을 자임한다. 20대 남성의 70% 이상이 민주당 지지를 포기한 보궐 선거 결과를 보면 이 사람의 주장은 여당으로서는 귀 기울일 만하다.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0대의 호응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것은 정치를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이 20대가 버린 정당이 돼버린 거예요. 20대가 역사 변화의 동력인데 20대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굳이 무리하게 통일을 앞세우지 말고 남북이 사이좋은 이웃으로 남아도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20대 청년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에게는 도발적이다.
"586들이 대학교 1,2학년 때 북을 선망하고 남쪽의 군사 정권은 타도 대상으로 생각했을 때 6.25를 겪었던 기성세대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이것들 정신 바로잡아 줘야겠다고 해서 군사 병역 훈련도 강제로 시키고 그랬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잖아요."
올해 만 쉰이 된 이 사람이 청년 같은 열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대통령하고 저쪽 위원장하고 화해하고 협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 존재 때문에 내가 손해 보라고 하는 것은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걸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청년들의 생각을 바꾼다? 누가 누구의 생각을 바꿉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자신의 바로 윗세대인 586세대에 대한 비난은 사금파리로 생살을 후벼 파듯 날카롭다.
586들은 자신들이 관심 있는 권력기관 개혁에는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지만 사회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리, 먹고사는 문제에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경험한 의제에 대해서만 586 정치인들이 매달리고 있다는 주장은 반박하기 쉽지 않다.
7. 왜 박용진을 돕기로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석훈은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는 할아버지들과 일하는 것이 이제는 지겨워서 영민한 젊은 사람과 일하고 싶었다'고 했다. 30분 남짓한 통화였지만 이 시니컬한 천재가 결코 남을 쉽사리 칭찬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용진이 지난해 이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다. 문재인, 정세균, 박원순, 김두관에게 제왕학을 가르친 사람이라고 박용진은 우석훈을 소개했다. 우석훈에게 왜 박용진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이번 대선에서 아무도 돕지 않으려고 했어요. 대선 후보를 돕는 일이란 게 시간 낭비에 의미 없는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데 박용진을 돕는 것은 후회할 거 같지 않았습니다. 저도 여기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우아한 좌파 지식인의 박용진 칭찬이 길게 이어졌다.
"박용진은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대선 후보 여러 사람을 봤는데 한국 정치인 가운데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처음입니다. 기본기가 굉장히 튼튼하기 때문에 생각이 유연하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선 후보를 돕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 아닌가요.
"처음에는 가능성 0%였어요. 그런데 이제 0%는 아니에요. 개인 경쟁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돼요. 진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조금만 도와주면 됩니다."
이 사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상필이다. 국회의원 박용진의 수석보좌관인데 12년째 고락을 함께 한다. 12년 전 박상필은 박용진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하고 아내를 설득해 사업을 때려치우고 '박용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그 당시 박용진은 강북구에서 두 차례 출마해 두 번 모두 낙선한 정치 낭인이었다.
"제가 그때 강북구에 살고 있었는데 박용진이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한마디로 전망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기고 진보 정치인이면서도 자유총연맹, 새마을지도자 협의회 사람들과도 유연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이 친구라면 제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용진의 정치 자금에 대해 물어보니 박상필은 자기 지갑 속 사정 이야기하듯 막힘없이 말했다. 박상필은 이 사람을 돕는 사람이 아니고 동업자 같은 존재다. 박용진은 자기보다 세 살 많은 박상필을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꿈을 박용진을 통해 실현하려는 사람이 박상필만은 아니다. 박상필은 네댓 명 정도의 국회의원들이 박용진과 함께 할 거라고 했다.
동지 두 명과 함께 지난해 6월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앞에서 대선 출정식을 가졌다.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에서 동학 혁명군들이 세상을 뒤엎겠다는 다짐을 한 곳이다. 마애불 앞에서 세 명의 동지가 대권 도전을 다짐하는 모습은 역사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다. 이런 모습을 낭만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박용진에게는 골방에서 천하를 논하고 혁명을 꿈꾸던 모습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마애불 앞에서 뭘 빌었습니까.
"세상을 바꾸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되게 해주세요'는 아니고요?
"세상을 바꾸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책임과 권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게 너무 많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에 어떤 점이 부족하냐고 물었더니 용기에는 고독과 고통이 따른다는 다소 초점이 어긋난 대답이 돌아왔다. 이 땅의 고통받고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운동권 학생의 서사가 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다.
다음달 초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용기는 가상하나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뭘 믿고 대선이라는 거대한 전장에 뛰어들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의 답은 호쾌했다.
"저 자신이죠. '누가 나를 지지하니 저를 도와주십시오'가 아니라 박용진을 보라고 해야죠. 박용진이 해온 걸 보라고 해야죠"
다른 사람 도움받지 않고 지금 자리에 올라왔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기득권에 포획되지 않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적 없고 손 벌리지 않았고 거짓말하지 않았고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았다는 당당함을 숨기지 않는다. 도끼질을 하면 어떤 통나무든 쩍쩍 쪼개지는 것을 경험해왔다. 자신의 도끼질에 쪼개지지 않을 통나무는 없고 대통령 후보 경선이라고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2 둘째 아들의 응원 메시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 대목에서다.
"제가 가족 단톡방에 대선 1년 앞두고 광주 방문한 기사를 올렸어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겁니다. 둘째 아들에게 봤냐고 물었더니 봤대요.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냐고 했더니 '댓글에 개나 소나 다 나오냐는 게 있다'며 막 웃어요. 너는 아빠를 개나 소에 비교하는 댓글이 웃기냐고 말했더니 아이가 정색을 하며 이야기해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면 저 사람들이 댓글을 저 따위로 달겠어요. 나는 아빠가 자랑스럽고 아빠가 해온 일을 아니까 반응 없다고 짜증내지 마세요'."
이 말 듣고 눈물 핑 돌았을 거다. 누군가의 응원과 격려가 이 사람은 고픈 것이다. 간절히 필요한 것이다.
다른 대선 후보에 대한 촌평을 부탁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쉽게 말이 나왔다.
"좋은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정치인은 못 될 거 같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발언은 하나 마나 한 말이라며 청년 문제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재명의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홀로 리더십과 정치적 결단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재명의 장점이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기도정 운영과 관련해서 이러저러한 말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재명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 사람의 말끝이 뾰족해졌다.
대선에 나서기에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이 사람도 선거라면 이골이 났고 이변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다. 몇 가지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2000년 만 스물 여덟 살 청년 박용진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창당된 지 채 석 달이 되지 않았고 박용진은 말 그대로 무명의 신인이었다. 당도 낯설고 내세울 만한 정치적 이력도 거의 없었지만 이 선거에서 박용진은 13%가 넘는 표를 얻어 3위를 기록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후보자 합동 유세에서 '피를 토하듯 연설'을 했고 이게 소문이 나 두 자릿수 득표율로 이어졌다.
"천리 길을 갈 수 있는 노잣돈을 유권자들이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서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는 제 모습을 보고 젊은 친구가 정말 악착같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신 거 같아요. 유권자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게 정말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변하고 통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2011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경선에 나갔다. 예비 경선에 전, 현직 의원을 포함해 모두 16명이 나섰다. 진보신당을 나와 민주당에 갓 들어온 박용진은 민주당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지만 9명이 진출하는 결선에 안착했다. 예선 투표 결과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6명 중 5위라는 말을 들었다. 말 그대로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총선과 당내 경선을 통해) 저는 기적을 한번 봤기 때문에 진짜로 진심을 다해서 이야기하고,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실천하면 그러면 저는 당원들이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이번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이 제가 그때 겪은 것처럼 민중의 역동성, 지지자들의 역동성, 당원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든지 분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파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상식과 합리에 기반한 토론이 가능한 정당이라고 이 사람은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 번의 기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선거 이후 쇄신 논의와 지도부 선거를 보면 과연 민주당에게 이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을지 의문이다. 없는 길을 만들어서 현재까지 온 사람이니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만들어서 가야 할 운명인 것은 틀림없다.
8. 좀처럼 이 사람의 화법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달변이었고 유머 감각도 풍부해서 몇 번이나 폭소가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할수록 바쁜 사람 붙잡고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준비된 맞춤형 답변을 듣는 느낌 때문이었다. 정책은 물론이고 개인 신상,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도 대통령 후보 검증과 토론회에 대비한 답이 이 사람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어디에서 누가 질문해도 같은 답변을 내놓을 거라는 생각이 이 사람의 말에 대한 몰입과 공감을 방해했다.
이 사람은 낡은 생각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한민국 정치에 아무런 역동성이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당신이 과연 대권에 도전할 만한 정치적 경륜과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질문이 반복된 것도 이 사람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시간 반쯤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면서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이 사람 지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사람에 대한 촌평은 '재주와 의욕은 넘치나 갈 길은 아직 먼 소장파 정치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신을 믿고 온 인생을 걸고 있는 동지들이 있고, 교도소 앞에서 꽃을 들고 자신의 출소를 기다리던 여인과 결혼을 했고, 그 여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아빠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인정하는 선배가 있고, 내 친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믿어주는 죽마고우가 있다. 자신의 오랜 이웃이었던 달동네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청년 시절의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일 텐데 몇 가지 추가 질문을 위해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이 사람 말이 조금은 더 잘 들렸다. 만나면 만날수록 공감의 폭이 커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핵심 표어로 '행복 국가'를 내세우기로 했다. 곧 출간될 책의 제목은 <박용진의 정치혁명>이다. 헌법 10조에 규정되어 있는 행복 추구권을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넘어 행복 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할 생각이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큰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대권 도전을 권유한 정계 원로 가운데 한 명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좋아지는 얼굴이라며 뭐를 해도 잘 풀릴 인상이라고 덕담을 했단다. 확실히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정말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가고 있는지는 이 사람 의지에 달렸다.
*이 인터뷰는 4월 8일 양만희 논설위원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 의원열람실에서 진행하였다.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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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구 의원 41명, 우리당 의원 174명이 다 똑같이 이 무리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제대로 말을 못 했거나 말을 해도 하는 듯 마는 듯했거나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똑같이 죄인이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선거가 실시되기 보름 전인 3월 말쯤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약속 날짜를 선거 다음날인 4월 8일로 잡은 것은 결과가 뻔해 보이는 선거 결과에 대한 분석과 이 사람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패배가 확인된 이후에야 난리라도 난 듯 요란스럽게 반성과 쇄신을 말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서울 민심이 돌아설 때가 최대 위기입니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어요. 1978년 10대 총선에서 당시 신민당이 득표율에서 공화당에 앞섰어요. 그 민심을 무시하다가 그 다음 해 10.26이 났어요. 87년 민주 대항쟁도 서울에서 야당 바람이 분 1985년 12대 총선 결과를 무시한 결괍니다. 2016년 총선에서 우리가 한 석 이겼어요. 당시 김종인 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박근혜에게 국정운영 기조 바꿔라 그랬는데 그 말 안 들었다가 탄핵당했어요. 선거로 민심이 먼저 나타났어요. 특히 서울 선거가 그래요. 이것을 진짜 위기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 매번 정색을 하고 경고음을 보냈던 것은 아니다. 아예 입 다물고 있었던 사람들보다야 낫긴 했지만 이 사람 말이 매번 날이 서고 선명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끝을 흐리거나 말을 우물거리기도 했다.
"'미안하다 아빠가 훌륭하지 못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집안이 많아지면 어렵죠. 그런 면에서 (조국 장관 문제와 관련해) 국민들 실망이 있을 거라고 봐요. 솔직하게 설명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2019년 8월 21일, 조국 사태 당시
"윤미향 당선인이 침묵 모드로만 있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불체포 특권을 작동할 사안도 아니라고 봅니다" / 2020년 5월 27일 윤미향 논란 관련"공정과 정의를 다루는 법무장관이 이런 논란에 휩싸이는 것 자체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육과 병역 문제야말로 우리 국민의 역린이고 공정과 정의 면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2020년 9월 20일 추미애 장관 아들 논란 관련
정치적 사안이 터지면 언론은 이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고 이 사람은 답을 피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면 당연히 현안에 대해 자기 주관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라고 했다. 문제는 그런 당연한 일을 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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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더 비판적인데 발언 수위를 조절합니까.
"네, 조절합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정말 난리 날지도 몰라요. 이 정도 이야기해도 충분히 의사가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누구를 상처 주거나 엄청난 당내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선거 직후 의원총회에서 다른 의원들도 그러시던데 우리가 할 말을 더 했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각을 세운 적이 없다. 쓴소리를 할 때도 대통령이나 당 지도부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다. 대놓고 항명을 한 적도 거의 없다.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것은 맞는데 선을 넘지는 않았다. 섬세하게 조율된 반대의 목소리로 들렸다.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 민주당 안에서 이 정도의 말을 끊임없이 해온 것만도 용기를 낸 것이다.
20대 국회 민주당 안에서 쓴소리를 하던 조응천-금태섭-김해영과 함께 <조-금-박-해>라고 불렸다. 목소리를 높이는 게 능사는 아니고 때로는 조용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20대 국회에서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초선 의원들 모임이 있었고 제가 간사 역할을 했어요. 이름도 짓지 않고 외부에도 모임 자체를 알리지 않았어요. 수요일 오찬을 같이하면서 의견을 모아 조용하게 당 지도부와 청와대에 전달했어요."
조국 사태가 정점으로 치닫던 2019년 10월 3일 초선 의원 대표단이 청와대를 방문해 조속한 사태 해결을 촉구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들 요구가 받아들여진 적은 거의 없고 초선의원들이 단체 행동을 한 적도 없다.
-'조금박해'라고 불리는 의원들 사이에 연대의식이나 동지애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따로 결성식을 갖거나 한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조국 사태 때 딱 한 번 조직적으로 움직인 적이 있어요. 의원총회에서 저는 일단 빠지고 나머지 세 명이 우르르 나가서 발언을 했어요. 한 선배 의원이 뛰어나오더니 '스크럼 짜는데 기운 빼지 마라'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제압당하고 나서 이게 힘들구나 싶었죠"
기꺼이 미움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사람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박용진의 지난 몇 년은 SNS 수난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유치원 회계 문제, 공매도 문제 등을 내세울 때는 칭찬 문자가 쇄도하기도 했지만 칭찬보다는 비난이 훨씬 더 많았다. 비판은 왼쪽에서도 오고 오른쪽에서도 왔다. 여당 안의 문제를 지적하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내부 총질을 일삼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재벌 개혁 문제를 거론할 때는 보수 세력으로부터 좌파 빨갱이라는 소리를 무시로 들었다. 진보 세력으로부터 배신자, 출세주의자라는 말을 지금도 듣는다. 댓글 짱돌에 맞아 가슴이 시퍼렇게 멍들었을 법한데 '진영 논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패거리 정치는 가치 지향 정치를 넘어서지 못한다'며 그까짓 댓글 하나도 겁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동료 의원들 보는 게 때로는 미안하고 때로는 불편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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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폭탄 오고 댓글 험하게 달리는 것은 상관없는데 박용진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왜 너희들은 이야기 안 하느냐고 할 거고, 박용진이 잘못했다고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그러냐고 할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의원들과 비교가 되는 게 참 불편하죠."
3시간 반 넘는 대화 도중 이 사람 표정이 쓸쓸해 보인 것은 이 대목이 유일했다.
3. 얼마 전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 이수호 전교조 초대 위원장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수호는 신일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이었고 권영길은 1997년 대선을 시작으로 진보 정당 운동을 함께한 정치적 아버지 같은 존재다. 박용진이 세배를 빠트리지 않는 두 명의 어른인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세배를 못해 따로 식사를 모셨다고 했다. 이수호가 전교조 사태로 해직되었을 때 박용진이 이에 항의하는 교내 시위를 주도했고 권영길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날것 그대로의 진보 정치를 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두 사람에 대한 각별한 존경과 애정은 자신의 정치적 뿌리가 진보에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도 보인다. 진보가 아닌 의제까지도 굳이 진보라는 접두사를 붙여 설명하는 느낌도 없지 않은데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자부심을 <진보>라는 단어에 담고 싶은 거라고 이해했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2011년 민주당에 합류하기까지 20여 년을 좌파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다. 마르크스 저작을 줄줄 외우고 노동 해방의 대의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살았다. 노동 관련 사건으로 세 번 구속되었고 모두 2년 6개월의 청춘을 철창 안에서 보내야 했다.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천주교에서 베드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998년 IMF 시기는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진보정당을 만들려는 모임에서 1주일에 3만 원 활동비를 받으며 살았다. 용돈이라도 벌겠다고 새벽에 신문을 돌리다가 두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다. 배신자, 출세주의자라는 욕을 들어가며 민주당으로 넘어온 뒤에도 형편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앞문은 열리지 않고 뒤에서는 짱돌이 날아오는' 시절이었다. 진보보다는 정치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며 민주당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이 사람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민주당으로 건너왔지만 당내 경선에서 탈락해 다시 4년의 원외 시절을 보냈다. 이 사람의 재주를 높이 산 우상호의 천거로 당대변인으로 활약했다. 2년 동안 무려 9명의 당대표, 비대위원장을 모시면서 주류 정치의 이면을 배운 것이 성과라면 성과였다.
4. 타고난 정치인이다. 어디에서든 앞줄에 서려는 사람이고 할 말 있으면 언제든 손 들고 나서는 사람이다. 욕망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등 떠밀려 무대에 오른 적이 없다.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자 언제나 할 말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이다. 본인은 비주류, 변방의 삶이라고 했지만 속한 조직이 비주류였을 뿐이다. 어느 조직에서도 이 사람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정치인의 싹수를 보였다. 동창들 단톡방에 '내가 000에 출마하면 꼭 한 표 던져 다오'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더니 친구들 반응이 너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랬다는 말을 들었다. 신일고등학교 동창인 탤런트 임원희는 박용진이 커서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력에 대한 이 사람의 욕망은 날것 그대로다. 이재명에 못지않은 야심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다른 정치인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바보 정치는 안 하겠다고 했다. 죽어도 내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 단단하다. 재선 의원인데 삼선 의원에 못지않은 인지도를 자랑하는 것은 민노당 대변인으로 3년, 민주당 대변인으로 2년을 보내면서 언론 접촉이 많았기 때문이다. 김대중 이후 원외 인사로 민주당 대변인을 맡은 것은 자신이 처음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 길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게 사는 데 별 도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늘 기분이 좋아요. 정신병리학적으로는 좀 안 좋은 거라고 하는데 상시적인 조증 같은 거죠.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금방 잊어버려요. 남들이 '야 박용진 상처받았겠다' 이러는데 정작 저 자신은 그걸 잘 기억을 못 해요. 어디에 적어 두거나 남들과 이야기를 하면 기억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고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잠시 다녔다. 1979년 경찰관이던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 오면서 본적을 서울로 바꾸었다. 호남 출신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을 때라 본적을 바꾸는 호남 출신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사람 가족도 그랬던 것이다. 9살 나이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그리 없을 거 같은데 호남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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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왔는데 본적을 바꾸겠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나는 전라북도 사람 할래 했는데' 어머니가 서울에서는 호남 사람으로 찍히면 안 된다고…우리끼리만 고향 잊지 말자 그러시더라고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차별, 조롱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어른들이 상처 주지 않으려고 하신 건데 너무 슬픈 거죠."
학생운동을 하는 아들과 경찰관 아버지의 갈등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입대하라는 아버지 앞에서 '저는 사회주의자예요'라고 말해 듣는 사람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구속되었을 때 푸른색 수의를 입은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그때서야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총선에 나가겠다고 할 때 아버지는 무슨 돈으로 선거를 나가느냐며 혹시 김정일이 돈 보냈느냐고 했다. 한국 전쟁을 겪고 평생 경찰관으로 살아온 분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5.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 사람 모습은 물 만난 고기였다. 왜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는지 목표가 분명했으니 해야 될 일도 분명했다. 어떤 난관이 있을지, 그 난관을 어떻게 돌파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구호나 목소리 큰 것만으로는 빵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다는 이 사람의 신념이 성과로 이어진 빛나는 시절이었다.
첫 상임위원회는 정무위원회였다. 4조 5천억 원에 달하는 이건희 회장의 차명계좌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삼성과의 싸움인 동시에 국회의원 알기를 우습게 아는 엘리트 관료와의 싸움이었다. 검은 돈을 뿌리뽑겠다는 금융실명제의 취지를 앞세워 금융위원회 엘리트 관료들을 제압했다. 호통이 아니라 실력으로 이겼다는 점을 이 사람은 말하고 싶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대 권력과 맞서는 다윗 같은 모습이었고 삼성이라는 골리앗의 이마에 정확하게 짱돌을 명중시켰다. 재벌 개혁의 기수, 삼성 저격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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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로 옮겨서는 유치원 회계의 투명성 문제를 제기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교육부 관료들은 더 잘 알고 있는 문제였는데 모두 쉬쉬하던 사안이었다. 유치원 원장들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지만 집요하고 독하게 싸웠다. 국민들에게 박수를 제일 많이 받던 시절이었다. 유치원 3법이 통과되던 날을 자기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로 꼽았다. 의원회관 이 사람 방에 가면 당시 신문 스크랩을 액자에 넣어 진열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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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비주류 정당에서 어렵게 국회의원 돼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좋아할 제도 개선을 이루어 냈는데 얼마나 기뻐요. 그때 찍은 사진을 내가 죽거든 영정 사진으로 쓰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2018년 10월, 유치원 비리 근절 국회 토론회장은 이 사람에게 쏟아지는 야유와 욕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짱 하나만큼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인정한 이 사람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했다. 그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어떻게 보도될까. 이 사람들이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구나. 절대 화내지 말자. 저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면 당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모습이 국민들 분노를 폭발시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카메라에 어떻게 잡힐지, 화면에 어떻게 보일지, 자신에 대한 기사가 어떻게 시작될지를 늘 고민한다. 대중 정치인으로서 천품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인연이 거의 없는 김대중과 노무현을 종종 언급했다. 두 사람의 성공 방정식을 자신에게 적용하려는 것처럼 보였는데 무엇보다 두 거인이 보여준 대중 정치인의 미덕을 닮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6. 이 사람은 청년들의 대변인을 자임한다. 20대 남성의 70% 이상이 민주당 지지를 포기한 보궐 선거 결과를 보면 이 사람의 주장은 여당으로서는 귀 기울일 만하다.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0대의 호응을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것은 정치를 포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민주당이 20대가 버린 정당이 돼버린 거예요. 20대가 역사 변화의 동력인데 20대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거예요."
굳이 무리하게 통일을 앞세우지 말고 남북이 사이좋은 이웃으로 남아도 되지 않느냐는 주장은 20대 청년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에게는 도발적이다.
"586들이 대학교 1,2학년 때 북을 선망하고 남쪽의 군사 정권은 타도 대상으로 생각했을 때 6.25를 겪었던 기성세대는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이것들 정신 바로잡아 줘야겠다고 해서 군사 병역 훈련도 강제로 시키고 그랬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세대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안 바뀌잖아요."
올해 만 쉰이 된 이 사람이 청년 같은 열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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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통령하고 저쪽 위원장하고 화해하고 협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다 이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들 존재 때문에 내가 손해 보라고 하는 것은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걸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청년들의 생각을 바꾼다? 누가 누구의 생각을 바꿉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자신의 바로 윗세대인 586세대에 대한 비난은 사금파리로 생살을 후벼 파듯 날카롭다.
"586세대들은 전두환의 졸업 정원제 덕에 대학을 어렵지 않게 들어가고 잠깐 반정부 투쟁을 통해 짜릿한 승리를 맛보고, 엄청난 호황기에 직장도 거의 맘대로 골라갔고 중산층에도 손쉽게 들어갔어요. 이제 자식들에게 교육 기회를 열어 주기 위해 경쟁적으로 앞장서고 학교가 엉망이라며 대안학교에 제일 많이 자식들 보내는 것도 이 세대 아닙니까." <2019년 9월 한겨레 인터뷰>
586들은 자신들이 관심 있는 권력기관 개혁에는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지만 사회경제적 약자인 노동자의 권리, 먹고사는 문제에는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들이 경험한 의제에 대해서만 586 정치인들이 매달리고 있다는 주장은 반박하기 쉽지 않다.
7. 왜 박용진을 돕기로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석훈은 '자기 말을 잘 못 알아듣는 할아버지들과 일하는 것이 이제는 지겨워서 영민한 젊은 사람과 일하고 싶었다'고 했다. 30분 남짓한 통화였지만 이 시니컬한 천재가 결코 남을 쉽사리 칭찬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박용진이 지난해 이후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다. 문재인, 정세균, 박원순, 김두관에게 제왕학을 가르친 사람이라고 박용진은 우석훈을 소개했다. 우석훈에게 왜 박용진을 선택했는지 물었다.
"이번 대선에서 아무도 돕지 않으려고 했어요. 대선 후보를 돕는 일이란 게 시간 낭비에 의미 없는 일인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런데 박용진을 돕는 것은 후회할 거 같지 않았습니다. 저도 여기에서 배우는 게 많아요."
우아한 좌파 지식인의 박용진 칭찬이 길게 이어졌다.
"박용진은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대선 후보 여러 사람을 봤는데 한국 정치인 가운데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처음입니다. 기본기가 굉장히 튼튼하기 때문에 생각이 유연하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선 후보를 돕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 아닌가요.
"처음에는 가능성 0%였어요. 그런데 이제 0%는 아니에요. 개인 경쟁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돼요. 진화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조금만 도와주면 됩니다."
이 사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상필이다. 국회의원 박용진의 수석보좌관인데 12년째 고락을 함께 한다. 12년 전 박상필은 박용진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하고 아내를 설득해 사업을 때려치우고 '박용진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그 당시 박용진은 강북구에서 두 차례 출마해 두 번 모두 낙선한 정치 낭인이었다.
"제가 그때 강북구에 살고 있었는데 박용진이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한마디로 전망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말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기고 진보 정치인이면서도 자유총연맹, 새마을지도자 협의회 사람들과도 유연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보고 이 친구라면 제 인생을 걸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용진의 정치 자금에 대해 물어보니 박상필은 자기 지갑 속 사정 이야기하듯 막힘없이 말했다. 박상필은 이 사람을 돕는 사람이 아니고 동업자 같은 존재다. 박용진은 자기보다 세 살 많은 박상필을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꿈을 박용진을 통해 실현하려는 사람이 박상필만은 아니다. 박상필은 네댓 명 정도의 국회의원들이 박용진과 함께 할 거라고 했다.
동지 두 명과 함께 지난해 6월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앞에서 대선 출정식을 가졌다. 송기숙의 장편소설 '녹두장군'에서 동학 혁명군들이 세상을 뒤엎겠다는 다짐을 한 곳이다. 마애불 앞에서 세 명의 동지가 대권 도전을 다짐하는 모습은 역사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다. 이런 모습을 낭만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박용진에게는 골방에서 천하를 논하고 혁명을 꿈꾸던 모습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마애불 앞에서 뭘 빌었습니까.
"세상을 바꾸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대통령 되게 해주세요'는 아니고요?
"세상을 바꾸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책임과 권한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게 너무 많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에 어떤 점이 부족하냐고 물었더니 용기에는 고독과 고통이 따른다는 다소 초점이 어긋난 대답이 돌아왔다. 이 땅의 고통받고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는 운동권 학생의 서사가 이 사람에게는 여전히 남아있다.
다음달 초 대권 도전을 공식 선언할 예정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용기는 가상하나 무모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뭘 믿고 대선이라는 거대한 전장에 뛰어들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의 답은 호쾌했다.
"저 자신이죠. '누가 나를 지지하니 저를 도와주십시오'가 아니라 박용진을 보라고 해야죠. 박용진이 해온 걸 보라고 해야죠"
2000년 16대 총선 출마 당시의 선거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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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도움받지 않고 지금 자리에 올라왔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기득권에 포획되지 않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적 없고 손 벌리지 않았고 거짓말하지 않았고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았다는 당당함을 숨기지 않는다. 도끼질을 하면 어떤 통나무든 쩍쩍 쪼개지는 것을 경험해왔다. 자신의 도끼질에 쪼개지지 않을 통나무는 없고 대통령 후보 경선이라고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2 둘째 아들의 응원 메시지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 대목에서다.
"제가 가족 단톡방에 대선 1년 앞두고 광주 방문한 기사를 올렸어요.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겁니다. 둘째 아들에게 봤냐고 물었더니 봤대요. 그런데 왜 아무 말이 없냐고 했더니 '댓글에 개나 소나 다 나오냐는 게 있다'며 막 웃어요. 너는 아빠를 개나 소에 비교하는 댓글이 웃기냐고 말했더니 아이가 정색을 하며 이야기해요.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면 저 사람들이 댓글을 저 따위로 달겠어요. 나는 아빠가 자랑스럽고 아빠가 해온 일을 아니까 반응 없다고 짜증내지 마세요'."
이 말 듣고 눈물 핑 돌았을 거다. 누군가의 응원과 격려가 이 사람은 고픈 것이다. 간절히 필요한 것이다.
다른 대선 후보에 대한 촌평을 부탁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해서는 쉽게 말이 나왔다.
"좋은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정치인은 못 될 거 같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된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발언은 하나 마나 한 말이라며 청년 문제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소리라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에 대해서는 답이 나오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재명의 장점이 단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홀로 리더십과 정치적 결단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재명의 장점이 이 시기 대한민국에서 과연 적절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기도정 운영과 관련해서 이러저러한 말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재명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이 사람의 말끝이 뾰족해졌다.
대선에 나서기에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이 사람도 선거라면 이골이 났고 이변을 만들어본 경험도 있다. 몇 가지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2000년 만 스물 여덟 살 청년 박용진은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창당된 지 채 석 달이 되지 않았고 박용진은 말 그대로 무명의 신인이었다. 당도 낯설고 내세울 만한 정치적 이력도 거의 없었지만 이 선거에서 박용진은 13%가 넘는 표를 얻어 3위를 기록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후보자 합동 유세에서 '피를 토하듯 연설'을 했고 이게 소문이 나 두 자릿수 득표율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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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길을 갈 수 있는 노잣돈을 유권자들이 주셨다고 생각했어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서 동네를 구석구석 누비는 제 모습을 보고 젊은 친구가 정말 악착같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신 거 같아요. 유권자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게 정말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변하고 통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2011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경선에 나갔다. 예비 경선에 전, 현직 의원을 포함해 모두 16명이 나섰다. 진보신당을 나와 민주당에 갓 들어온 박용진은 민주당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었지만 9명이 진출하는 결선에 안착했다. 예선 투표 결과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6명 중 5위라는 말을 들었다. 말 그대로 이변을 연출한 것이다.
"(총선과 당내 경선을 통해) 저는 기적을 한번 봤기 때문에 진짜로 진심을 다해서 이야기하고,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실천하면 그러면 저는 당원들이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당의 이번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이 제가 그때 겪은 것처럼 민중의 역동성, 지지자들의 역동성, 당원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얼마든지 분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대파란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상식과 합리에 기반한 토론이 가능한 정당이라고 이 사람은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또 한 번의 기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당의 선거 이후 쇄신 논의와 지도부 선거를 보면 과연 민주당에게 이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을지 의문이다. 없는 길을 만들어서 현재까지 온 사람이니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만들어서 가야 할 운명인 것은 틀림없다.
8. 좀처럼 이 사람의 화법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이 말을 잘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달변이었고 유머 감각도 풍부해서 몇 번이나 폭소가 터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할수록 바쁜 사람 붙잡고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준비된 맞춤형 답변을 듣는 느낌 때문이었다. 정책은 물론이고 개인 신상,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도 대통령 후보 검증과 토론회에 대비한 답이 이 사람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어디에서 누가 질문해도 같은 답변을 내놓을 거라는 생각이 이 사람의 말에 대한 몰입과 공감을 방해했다.
이 사람은 낡은 생각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대한민국 정치에 아무런 역동성이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당신이 과연 대권에 도전할 만한 정치적 경륜과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질문이 반복된 것도 이 사람 이야기에 공감하고 몰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3시간 반쯤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지면서 당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이 사람 지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이 사람에 대한 촌평은 '재주와 의욕은 넘치나 갈 길은 아직 먼 소장파 정치인'에 머물렀을 것이다. 자신을 믿고 온 인생을 걸고 있는 동지들이 있고, 교도소 앞에서 꽃을 들고 자신의 출소를 기다리던 여인과 결혼을 했고, 그 여인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아빠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인정하는 선배가 있고, 내 친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믿어주는 죽마고우가 있다. 자신의 오랜 이웃이었던 달동네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청년 시절의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일 텐데 몇 가지 추가 질문을 위해 전화 통화를 할 때는 이 사람 말이 조금은 더 잘 들렸다. 만나면 만날수록 공감의 폭이 커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선 후보 경선에서 핵심 표어로 '행복 국가'를 내세우기로 했다. 곧 출간될 책의 제목은 <박용진의 정치혁명>이다. 헌법 10조에 규정되어 있는 행복 추구권을 바탕으로 복지국가를 넘어 행복 국가로 가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할 생각이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큰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대권 도전을 권유한 정계 원로 가운데 한 명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좋아지는 얼굴이라며 뭐를 해도 잘 풀릴 인상이라고 덕담을 했단다. 확실히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다. 정말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지나가고 있는지는 이 사람 의지에 달렸다.
*이 인터뷰는 4월 8일 양만희 논설위원과 함께 국회 의원회관 의원열람실에서 진행하였다.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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