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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세월호 인양 그 후는

“다른 아픔과 연대하며 내 고통 치유” [세월호 7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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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생존자들, 용산·밀양 등

사회적 참사와 산재 현장 다니며

트라우마를 ‘외상 후 성장’으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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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7주기를 하루 앞둔 15일 광주 동구 5·18민주광장에 마련된 ‘광주시민 분향소’를 찾은 한 시민이 희생자들의 사진 앞에서 추모하고 있다. 같은 날 남구 백운광장에서는 세월호 추모 조형물 건립 기념식과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광주 | 권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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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44)는 요즘 전국 사방팔방으로 다니느라 바쁘다. “처음엔 내 새끼 죽음밖에 안 보였다”는 그는 그사이 용산참사,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제천 화재참사,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촉구 현장 등을 찾아다녔다.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겪는 아픔이 모두 자신과 연결돼 있다고 느끼게 됐고, 그들과 연대하며 치유받는 경험도 했다. 단원고 생존 학생 장애진씨(24)는 사고 후 유아교육을 전공하려던 생각을 바꿔 응급구조사가 됐다. 자신처럼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1년째 병원 응급실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침몰한 지 꼭 7년. 이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남긴 트라우마는 여전하다. 승객 476명 가운데 172명의 생존자는 생존자대로, 사망자 299명과 미수습자 5명의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참사 당일의 완벽한 복기와 진상규명은 아직 요원하다. 정부, 국회, 검찰 등에서 조사가 이어졌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잊어라’ ‘지겹다’ ‘그만하라’는 손가락질에 피해자들의 상처는 깊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날의 고통을 직시하며 ‘트라우마’를 ‘외상 후 성장’으로 바꾸려는 이들이 있다.

장애진씨와 윤경희씨는 참사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회적 지지’를 원동력으로, 이타적인 자아를 새롭게 발견하고 연대의 가치를 확산하고 있는 사례이다. 이들은 다른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과 연대하고, 제2, 제3의 세월호 피해자들을 돕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기도 했다.

6년째 연극 활동으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했다. 단원고 피해 학생의 어머니들이 주축이 된 극단 ‘노란 리본’은 다음달 29일 세월호 참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연극 <기억여행>을 무대에 올린다. 희생된 곽수인양의 어머니 김명임씨(59)는 “7년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투쟁에 함께한 고마운 분들께, 연극으로 보답하며 씩씩하게 이웃들에게 웃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성장하는 ‘세월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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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구조사 꿈 이룬 생존자 장애진씨

응급실 환자 열심히 살리고 나도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장애진씨(24)는 오른쪽 손목에 ‘노란 리본’ 모양의 타투(문신)를 새겼다. 리본에는 ‘20140416’ 여덟자리 숫자가 적혀 있다(사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장씨가 타고 있던 세월호가 침몰한 날이다. “팔찌는 색이 바래거나 끊어질 수 있고, 깜박하고 차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타투는 항상 내 몸에 남아있는 거라, 매일 보며 기억할 수 있어 하게 됐어요.”

장씨의 좌우명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고 살자’다. 그날 이전에는 ‘앞으로, 천천히, 똑바로 나아가자’는 가훈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이제 제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걸 알잖아요. 하고 싶은 걸 다 안 하고 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아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인천발 제주행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인근 해상에서 전복됐다.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도 타고 있었다. 250명이 사망하고 장씨를 비롯해 75명이 살아남았다. 그날 이후 생존 학생들의 일상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과학과 교수가 2016년 7월 발표한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를 보면, 생존 학생들은 악몽과 가위눌림으로 수면장애, 불안장애, 폐쇄공포 등 복합적인 신경정신과적 증상을 겪어야 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외상’이 고통만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생존 학생들은 진로, 가치관, 신념의 변화도 경험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던 경험 때문에 현재를 충실하게 살게 됐고,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공익 실현이나 사회 봉사에 기여하는 직업을 희망했다. 참사 이후부터 생존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단원고에 상주한 ‘스쿨닥터’ 김은지 마음토닥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은 “생존 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졸업했다. 심각한 자살을 시도하거나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으며, 간호학과·사회복지학과 등 누군가를 돕는 일을 배우는 학과에 간 학생들도 많다”고 말했다. 정신건강사회복지사 한정민씨도 생존 학생 7명을 면담해 작성한 ‘세월호 참사 단원고 생존자의 외상 후 성장’ 논문에서 학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자’라는 주홍글씨를 이겨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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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생존 학생 장애진씨. 지금은 응급 구조사.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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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씨는 응급구조사가 됐다. 원래 유아교육과에 진학하려다가 참사 후 재난 사고 발생 시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진로를 바꿨다. 대학에서 3년 동안 응급처치와 전문심장소생술을 배운 장씨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한 지 1년이 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환자들을 많이 마주하는 그에게 이로 인한 트라우마는 없는지 물었다. “세월호를 겪은 저 같은 사람이 아니어도 누구나 생명이 위급한 사람, 죽은 사람을 처음 보면 그럴 것 같아요. 처음이니까. 생각보다 무뎌지는 것도 있어요. 다만 보호자를 볼 때 마음이 좀 그래요.”

지난 7년간 장씨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세월호 유족과 생존자들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사람들’이었다. 진도 팽목항까지 찾아온 자원봉사자들, 10여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한 생존자와 희생자들의 부모들, 휴학하고 세월호의 진상을 알리는 활동에 함께한 대학생들까지.

김은지 원장도 외상 후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사회적 지지’를 꼽았다. 정부의 정책적 지지, 주변인과 시민의 지지가 생존 학생들이 다시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됐다. 김 원장은 “참사 초반 온 국민이 도와줬던 것과 선한 마음 등이 아이들에게 보호 요인이자 자원이 됐다”면서 “어려움이 물이고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그릇이라면, 학생들은 주변의 지지를 받으며 그릇이 커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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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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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세월호 생존자” 숨지 않는 김주희씨

국민들 위로와 지원 큰 힘 당당하게 사는 밑거름 돼

또 다른 생존 학생 김주희씨(24)도 각지에서 전해진 도움의 손길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참사 직후 서거차도와 진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고, 학생들이 입원한 고려대 안산병원에는 전국에서 구호물품이 전달됐다. 2014년 6월25일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간 뒤에도 컵, 인형, 필통 등의 선물을 보내왔다. 김씨는 그중에서도 광주에서 학부모들이 만들어 보낸 ‘토끼 인형’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생존 학생 75명이 받은 저마다 다른 인형에는 그 자녀들이 직접 쓴 편지가 끼워져 있었다. “국민들에게 고마운 게 많아요. 그때 온 선물과 편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집에 보관해뒀어요. 이제야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됐는데, 익명으로 보내주신 것도 있고 시간이 지나 이름이 없어진 것도 있어서 아쉬워요.”

사회적 지지는 생존 학생들의 대학 생활에도 힘이 됐다. 이들이 대학에 갈 때 일각에서는 ‘단원고 특별전형’이 특혜라며 비난해 학생들이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다. 김씨는 자신이 세월호 생존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어떤 전형으로 들어왔느냐’고 물으면 “단원고 특별전형”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생존 학생과 유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김씨에게서 빌려간 뒤 울면서 돌려주는 대학 동기도 있었다. 2018년 4월16일 대학에서 4주기를 추모하는 ‘세월호 부스’를 캠퍼스에 열었을 때 친구들이 공강 시간마다 찾아와 도와줬다. 그날 김씨가 나눠준 배지와 팔찌보다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선물을 받아 양손이 무거운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특별전형을 만들어 합격시켜준 학교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했고, 1학년 때부터 학생회 활동에 참여해 4학년 때는 학과 첫 여성 학생회장에 선출됐다.

김씨는 참사 7주기를 맞은 올해 진상규명 활동에 진력하기로 마음먹었다.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기한인 내년 6월까지라도 최선을 다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근엔 언론 인터뷰도 하고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직면하다 보니 이게 더 잘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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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준군 어머니 강지은씨가 9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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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잃고 ‘물 공포증’ 시달렸던 강지은씨

연대의 손길이 없었다면 다시 일어서지 못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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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3반 김시연양 어머니 윤경희씨.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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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어” 딸 사망신고도 못한 윤경희씨

‘이제 그만하라’ 말들 해도 ‘안전한 세상’ 계속 외칠 것

아직 ‘외상 후 성장’을 말하기에 이르다는 시선도 존재한다. 유족의 절반은 자녀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고 김시연양의 어머니 윤경희씨(44)도 마찬가지다. “(가족관계등록부) 내 이름 아래 있는 딸 이름 옆에 ‘사망’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 자체가 싫어요. 아직 받아들일 수 없어요. 지우고 싶지 않아요.” 그들이 겪는 고통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고 지상준군의 어머니 강지은씨(53)는 바다에서 아들이 사망한 뒤 물이 무서워 세수나 샤워도 하기 힘들어 했었다. 강씨는 “여전히 비가 오거나 안개가 자욱하게 끼는 날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잠도 못 자고, 신체적인 증상도 같이 온다. 숨도 못 쉬고 머리도 아프고”라고 말했다.

참사 직후에 비해 사회적 지지가 줄고,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새로 얻은 육체적 고통도 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사무실에는 잠 못 자는 사람, 머리가 아픈데 진통제가 듣지 않는 사람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소화가 안 되거나 가슴이 꽉 조이는 통증에 약을 나눠 먹기도 한다. 윤씨는 지난해 가벼운 부딪힘에도 근육이 파열돼 깁스를 7번이나 했다. 강씨는 “가족들에게 호르몬 계열 암도 되게 많다. 근골격계 질환도 많아졌는데 트라우마로 인한 것일 수 있다고 하더라. 몇 년 됐다. 다들 점점 심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과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윤씨는 “2014년에는 내 새끼 죽음이 제일 아팠다. 누구랑 만나야 된다고 하면 ‘왜? 그게 세월호와 무슨 상관이야’ 이런 생각을 솔직히 했다. 그런데 저희가 진짜 힘들 때 팽목항, 국회로 찾아왔던 분들이 다 강정마을에서 오시고 그런 분들이더라. 이제 용산, 밀양, 강정, 광주가 다 공감되고, 만나면 따뜻해지고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태안 해병대 캠프, 제천 화재참사, KAL858기 폭파사건, 스텔라데이지호, 이한빛 PD, 용균이, 태규, 제주도의 민호, 대전의 동준이….” 윤씨는 여러 참사와 피해자 이름들을 쭉 읊었다.

7년이 지났지만 변치 않는 바람이 있다. ‘모두가 안전한 세상’이다. 강씨는 말했다. “아픔을 당했을 때 누군가 연대해주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죠. ‘5월 어머니회’(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어머니들)에서 우리를 먼저 안아주면서 ‘살아남으라, 끝까지 버티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태안화력발전소 산재 사고로 사망한) 김용균의 엄마한테 그랬어요. ‘너무 움츠러들지 말고 당당하게 드시고 싶은 것 드시면서 지내시라’고. 우리는 몇 년 동안 웃기만 해도 손가락질당하면서 지냈잖아요.”

‘이제 그만하라’는 일각의 반응에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윤씨가 말했다. “이제 사람들의 반응에 상처받지 않아요. 이제는 이렇게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면 우리 때문에 이 세상이 변할 것이고 우리에게 고마워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요.”

오경민·김은성·최민지 기자 사진 우철훈 선임기자·김기남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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