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성도(1827~1870,고 강주진 소장본) 중 조사대상지.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서울=뉴스1) 윤슬빈 기자 = 옛 문헌 속에서만 존재하던 상주읍성의 성벽이 처음으로 확인됐다.
상주읍성은 문헌 기록에 따르면 1385년(고려 우왕 11년)에 축조돼 일제의 읍성 훼철령(1910년)에 따라 헐리게 되는 1912년까지 약 520년 이상 유지됐다.
고려말 왜구 침임에 대한 대비책으로서 만들어진 읍성은 조선 초기에 경상감영(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 경상도를 관할하던 감영)을 둠으로써 당시 경상도의 행정·문화·군사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주읍성은 지표조사와 연구를 통해 성벽의 위치에 대해 추정만 있었고, 그 실체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29일 한국문화재재단은 문화재청의 허가 아래 발굴 조사하고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 35-5번지 유적에서 상주읍성의 성벽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는 문화재청 문화재보호기금(복권기금)을 활용해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진행 중인 '매장문화재 소규모 발굴조사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하고 있다. 발굴현장 공개는 30일 오후 2시에 현장에서 개최한다.
2019년엔 조사대상지의 북서쪽 40m 지점인 인봉동 73-7번지 유적에서 상주읍성의 해자가 처음으로 조사된 성과가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성벽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조사대상지 위치 및 상주읍성 추정 성벽.과 해자범위.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조사대상지가 일제강점기(1913년)에 제작된 지적도에 성도(城道)로 표시된 부분에 해당함을 현재 지적도와의 비교를 통해 확인했고, 바로 이 자리가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임을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밝혔다.
한국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성벽은 체성부(성곽의 부속 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저부(성벽의 몸체 부분 아래의 기초시설)만 확인됐다. 이는 1912년 일제의 읍성 훼철 당시 지상의 육안으로 보이는 성벽이 철거되고, 성벽 기저부 위쪽이 임시 도로로 사용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당시 지적도 상에 성도(城道)로 표기한 연유로 볼 수 있겠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성벽 위에 건물들이 건축되면서 기저부도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기저부의 규모는 길이가 760cm 정도로 조사대상지의 북쪽과 남쪽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장되고 있다. 너비는 성벽 외벽 쪽인 동쪽 지대석에서 내벽 쪽인 서쪽으로 470cm 정도만 확인됐고, 나머지는 유실됐다.
높이는 40cm 정도만 확인됐으나 성벽 기저부를 견고하게 축조한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대석은 가운데 부분이 유실되고 5매만 확인됐으며, 이 역시 조사 경계 밖으로 계속 연결되는 양상이다.
이와 별도로 성벽 동쪽의 일제강점기 건물지 지반 보강을 위하여 훼철된 성벽의 큰 성 돌이 다수 사용됐음이 확인됐다. 축조시기는 성벽 기저부의 다짐층과 보강층에서 조선 시대 전기 백자종지편이 출토돼 조선 시대 전기로 판단된다.
seulbin@news1.kr
[© 뉴스1코리아(news1.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