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입에 붙는 말 그냥 쓴다'vs 韓 '우리말 사랑합시다'
거주 인구가 1천300만 명이 넘는 수도 도쿄를 이끄는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지사가 코로나19 확산을 막을 대책으로 내세운 구호였다.
시쳇말로 '방콕(집에 있기)하라'는 의미인 이 순수 영어 표현을 놓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아 외출 억제 효과를 얻지 못했다는 비아냥조의 우스갯소리가 일각에서 나왔다.
하지만 영어로만 주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자체를 놓고는 비판적인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만일 서울시장이 1천만 시민들을 상대로 "스테이 홈 하세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거센 비판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년 3월 26일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크게 늘어 중대 국면을 맞고 있다며 주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 지사. [교도=연합뉴스 자료사진] |
일본은 영어를 중심으로 한 외국어에 국어의 한 축을 맡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공문서나 신문지면은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안내판에 외국어가 너무나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때문에 '가타카나'(일본 문자의 하나)로 표기되는 외국어가 많은 것이 일본어의 특징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러나 외국어는 일본어에 혼입되면서 발음은 물론이고 의미가 변질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른바 '와세이'(和製, 和는 일본을 뜻함)로 불리는 일본식(日製) 단어들이다.
승강기 내부에 부착된 코로나19 예방 안내문에 '게스토'(내방객), '데리바리'(배달), '마스쿠'(마스크)란 표기가 눈에 띈다. |
'일본의 영어를 생각하는 모임'이 올 2월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선 원어민에게 통하지 않는 가장 대표적인 와세이 영어 1위에 '리포무'(reform)가 올랐다.
대다수 일본인은 '개혁'을 뜻하는 이 단어를 건물 개·보수(renovation)나 개축(remodeling)의 의미로 잘못 쓰고 있다고 한다.
생음악을 즐길 수 있는 유흥업소라는 뜻으로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라이브 하우스'도 영어 원어민이 '살아 있는 집'으로 엉뚱하게 받아들일 대표적인 '일제 영어'의 하나로 꼽혔다.
일본 정부가 작년 7월 발표한 규제개혁 실시 계획 등을 게재한 신문지면.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이 영어 등의 외국어(외래어) 단어. |
이런 엉터리 영어가 사실상의 일본말로 바뀌어 일본 열도의 언중(言衆) 사이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배경에는 정부 기관조차 꺼리지 않고 영어를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관광장려 정책으로 등장한 '고 투 트래블'(Go To Travel, 일본어 발음은 '고 투 토라베루')은 일본 정부가 '여행을 가요'라는 의미를 담아 일본어 식으로 만들어 유행시킨 전형적인 와세이 영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영어 원어민에게는 문법적으로 뜻이 성립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교육기관인 'EF 에듀케이션 퍼스트'가 2019년 발표한 국가별 영어 능력 순위. [자료=일본 위키피디아] |
영어를 자국어로 만들어 쓰는 것에 익숙한 일본인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글로벌 교육기관인 'EF 에듀케이션 퍼스트'가 2019년 발표한 순위에 따르면, 일본인 응시자의 평균 성적은 51.51점으로 '매우 높음' '높음' '중급' '낮음' '매우 낮음' 등 5개 등급 중 하위군인 '낮음'에 해당했다.
반면에 한국인은 55.04점으로 중급 수준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주변의 일본인들에게 일본어를 밀어내는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지 물으면 대체로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많이 쓰고 입에 잘 붙는 말이면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당연히 학교에 다닐 때나 직장에서도 외국어나 외래어 사용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어와 외국어(붉은 동그라미)가 뒤섞인 실내 골프 연습장 광고 전단. '완랑쿠'(one rank), '프라이베토'(private), '라구쥬아리'(luxury), '마이렌지'(my range), '콘세프토'(concept) 등의 단어가 가타가나 문자로 표기돼 있다. |
일본인 기질을 얘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이토코토리'(いいとことり) 문화다.
좋다고 여기는 것은 그냥 받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컬처'(culture·문화)가 '가루차'(カルチャ)라는, 쉽게 연결짓기 어려운 발음의 단어로 재탄생한 것은 그런 문화적 토양이 있기 때문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다른 곳은 몰라도 기자들이 살아가는 무대에선 외래어를 함부로 쓸 경우 십중팔구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전자편지를 받게 된다.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 사용에 힘을 보태달라'는….
parks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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