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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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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김동화 “예나 지금이나 하고 싶은 건 만화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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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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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화 만화가가 3월 16일 경기 파주시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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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임진강 건너편 보이는 게 다 북한땅이지. 여기서 작품 구상도 하고, 잠도 자고 다 해요.”

임진강을 끼고 있는 경기 파주시의 한 한적한 마을에 김동화 만화가(70)의 화실이 있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3월 16일, 화실 뒤편 얕은 동산에 나무를 심고 그 아래 빈터에 손주들이 와서 놀 공간을 만드느라 지게차가 잔뜩 자재를 옮겨놓고 있었다. “낮엔 햇빛이 많으니 화실 안에 앉아 있기 힘들어 나가서 삽 하나 들고 흙장난하지. 저녁 되면 바깥이 안 보이니까 그림 그리고 글도 쓰고 하지.” 그는 주변 풍경만큼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말투로 <요정 핑크>와 <곤충소년>, <황토빛 이야기>, <빨간 자전거>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자신의 작품세계에 관해 말했다.

-부인 한승원 작가와 함께 부부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했는데 한 작가는 고사했다.

“한승원 작가는 자기가 연재하던 작품을 몇년째 못 그리고 있어서 이런 자리에서 얼굴 비추기가 쉽지 않나 보더라. 다른 곳은 괜찮은데 그림 그릴 때 같은 자세를 계속 유지하다 보니 팔이 테니스 엘보처럼 무리가 왔어. 머릿속에는 스토리가 넘치니까 이번에 다시 연재 재개를 준비하고 있긴 하다.”

-김 작가도 현재는 연재를 안 하고 있지 않나.

“연재는 안 하고 있지만 구상하고 계획 중인 후보작들은 몇편 있다. 그런데 요즘 웹툰 연재 간격이 나한테는 안 맞아. 일주일에 한두편씩 그려서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이어가야 하는데 나는 짧은 얘기를 좋아하거든. 미리 편집까지 깔끔하게 다 끝내놓고 연재 올리는 게 내 스타일에 맞기도 하고.”

-차기작으로 낼 작품이 어떤 내용인지 알려줄 수 없나.

“가장 유력한 작품이 두어편 정도 있다. 하나는 어른을 위한 동화 같은 내용으로 단편 이야기를 모아 써놓은 것이 있다. 또 하나는 아이들이 읽는 만화로 하늘을 나는 섬이 있어서 여러 마을로 옮겨다니며 각 마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시간이 되면 나중에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남자들이 저녁에 모여 하는 유쾌한 농담 같은 이야기를 그려보는 거다. (기존의) 나를 벗을 수 있는 만화를 다양하게 시도하고 싶은 거지.”

-그런데 꽁지머리로 묶은 머리 모양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부터 이발소에 다녀온 날은 어색한 느낌 때문에 일을 못 했다. 예술가인 양 난척하려고 머리를 기른 게 아니라 자연히 있던 그대로 어수룩한 모습이 편해서 그런 거다. 이젠 머리를 짧게 자르면 내가 아닌 것 같을 거야. 사람들이 못 알아보면 어쩌나 싶고.”

-그동안의 작품세계를 보면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변신이 몇차례 있었다.

“그 얘기를 하려면 ‘김동화’라는 필명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밝히고 싶은데 초기 여성만화는 사실 한승원이 거의 다 했다. 그때의 김동화는 일종의 패밀리 네임이었던 셈이다. 처음 여성만화를 유통하던 대본소(만화방) 시절에는 작가 이름을 하나로 해서 작품을 자주 내는 게 유리했다. 당시엔 내가 출판사를 만나거나 하는 등의 대외적인 일을 맡고 작품에선 데생과 연출 정도만 맡았다. 한승원은 글도 쓰고 마지막 펜터치까지 했다. 엄밀하게 따지면 초기 여성만화 시절 패밀리 네임으로서의 김동화는 사실상 한승원의 비중이 훨씬 더 컸다.”

-그럼 <곤충소년> 같은 소년만화부터가 개인 김동화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건가.

“여성만화를 그리긴 했지만 난 남자니까 여자가 될 수는 없더라. 여성이 쓰는 단어를 쓰기도 어렵고, 아무리 가는 선을 써서 그려도 여성처럼 그리긴 힘들었다. 내가 어릴 때 두 살이나 일찍 학교에 가다 보니 같은 학년에서 몸도 제일 작고 가방 들어다 줘야 할 정도로 채이는 시절을 보냈다. 그때 ‘내가 막 장수풍뎅이처럼 힘이 좋으면 저 애들 집어던질 텐데’ 하는 마음을 가졌던 걸 떠올리면서 그걸 만화로 그리면 재미있겠다 싶어 <곤충소년>을 기획했다.”

-그런데 소년만화가로의 변신도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달려라 썬더보이>까지만 해도 내가 자동차를 엄청 좋아해 당시 작업실 있던 오피스텔 복도에서 RC카 조종도 하고 놀 정도였으니 즐겁게 그렸다. 그런데 안 해도 될 만화, 그때 유행하던 강시를 만화화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엔 그냥 출판사 사장에게 강시 만화 나오면 재미있겠다고만 했는데 사장이 나보고 ‘말 꺼냈으니 직접 해보라’고 하더라고. 가만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어 시작했다만 하다 보니 순전히 어린이 독자들 인기 끌려고 사탕발림으로 만화 그리는 데 회의를 느꼈지. 이렇게 치사하게 할 바에야 제주도에서 카페나 차리자 하는 생각에 진짜 위치 알아보고 다녔을 정도로 슬럼프에 빠졌다.”

-그다음이 토속적인 만화로의 변신이었는데 계기가 있었나.

“제주도에 있다 서울 오니 영화관에서 <서편제>를 개봉하더라. 그때 난 사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란 말을 전혀 실감 못 하던 사람이었다. 그냥 영화에 예쁜 그림 몇컷 있을 테니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에 보러갔는데 마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나흘 동안 단성사에서 계속 영화를 보고 또 봤다. 우리 것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그 아름다움을 위해 저토록 절절한 어려움이 있었구나 느낀 거다.”

-이전까지의 화풍과 닮은 점은 분명히 찾을 수는 있다고 해도 그때부터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반눈이’라고 하지? 눈이 얼굴의 반이나 되는 그런 만화 그리다가 우리 그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6개월 동안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봤는데 안 되더라. 그런데 어느 날 펜으로 대충 마구 선을 긋다가 보니까 긴 선이 눈으로 보이더라고. 여태까지는 눈을 동그랗게 그리려고만 하다 보니 몸도 인형처럼 가느다란 몸만 나온 거였다. 눈이 동그라니까 턱은 뾰족, 목은 길쭉, 몸도 길어졌는데 눈은 작고 길게, 턱은 둥그렇게 굴리니까 그제야 한국 여자의 몸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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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화 만화가가 작품 속 캐릭터를 스케치한 그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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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건 당시 작품들이 주로 성인만화잡지에 실렸고 의외로 인기도 끌었다는 점이다.

“그 무렵이 막 성인만화잡지가 많이 창간할 때였다. 청탁이 들어오길래 ‘내 만화는 야한 그림 아닌데 이런 거 그려도 될까’ 물었다. 성인 남성 위한 만화라고 하면 누구든 액션이나 벗는 만화만 생각했으니 <황토빛 이야기>는 인기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기투표에서 줄곧 1등했다. 어쩌면 거기서 이후 작품활동을 위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할 수 있지.”

-여성만화로 시작한 점도 작용했겠지만 특히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많다.

“내가 가장 원하는 만큼의 이야기를 넣어 충실하게 그린 작품으로 <기생 이야기>가 있다. 난 기생을 좋아해. 그런데 과거 1960년대 외국인 대상의 소위 ‘기생관광’ 때문에 기생이 너무나도 잘못 알려져 그 인식을 좀 깨려고 했다. 역대 한국의 기생은 시와 그림, 노래와 춤을 위해 철저하게 수업을 받은 출중한 예술인이었다. 여성이 많이 나오는 건 작가가 작품 만들 때 관심 있는 부분을 쓰기 때문이지. 여성에게서만 보이는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고, 쉽게 말해 지구의 반이 여자, 좋은 것 생각하면 떠오르는 엄마도 여자, 그러니 여자 이야기를 안 할 수 있나.”

-그래서 문하생으로 있던 한승원 작가와 결혼까지 한 건가.

“그때 신인 만화가는 정말 어려웠다. 그러니 동지애도 생기고 서로 도와주니 장단점도 잘 알게 되고…. 지금도 대화를 많이 하는데 70%는 만화 얘기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고 바른 지적과 조언을 해준다. 지금처럼 어른 독자들을 향한 만화를 그리도록 방향을 찾은 것도 한 작가 덕분이다. 물론 그런 쪽은 좋은데, 서로 같은 업종에 있으니 일 때문에 지쳤을 때도 ‘당신은 모르는 일로 지쳤으니 어디 가서 좀 쉬어야겠다’ 이런 얘기를 못 한다는 게 단점이랄까?(웃음)”

-동료 작가 중에는 김수정 작가와 친하다고 알려져 있다.

“신인 시절 어려울 때 같이 시작했고, 나이도 동갑이라 함께한 시간이 많았다. 한 번은 <아기공룡 둘리> 연재 전 동물만화가 없을 때 둘리 캐릭터를 나한테 보여줬는데 내가 ‘악어가 주인공이구나?’ 그랬어. 둘리 1편만 해도 주둥이가 훨씬 길쭉했으니 오해한 거지. <오달자의 봄>에 나오는 여고생 보여줬을 때도 내가 ‘할머니가 주인공이야?’ 그런 에피소드가 있다.”

-1960년대 말 문하생으로 시작해 1974년 데뷔했다. 만화를 시작한 계기가 궁금하다.

“만화라고 하면 바로 ‘사회악’이라고 할 정도로 무지한 시대였다. 그런데 실제 그때 만화는 극히 건전했다. 내 작품에서도 가장 심한 욕이 ‘녀석’일 정도였다. 여하튼 그런 시대에 살았는데도 나는 만화가 너무 좋았다. 하고 싶은 게 만화뿐이었다.”

-만화 그리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나.

“한 작품 끝내고 새로운 작품에서 새로운 얘기를 할 때마다 매번 후회하고 힘에 부친다. 해본 건 쉬워. 그런데 재미가 없어. 요정 이야기하려면 다른 여성만화와 달리 새로워야지. 기생 그릴 때도 치마저고리 그리면서 어려워 후회를 많이 했다. 그래도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지금도 만화가 제일 좋다. 초등학교 2학년쯤이던가, 옆방에 세 들어 살던 대학생 얼굴을 보니 선 다섯개로 보이더라. 얼른 가서 스케치북에 그렸지. 보통의 회화가 색의 그림이라면 만화는 선의 그림에 가깝잖아.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그림에 재미가 났던 것 같아.”

-<빨간 자전거>로 노년층도 찾는 만화를 그린 점은 이전까지 어느 작가도 성공하지 못한 시도였다.

“프랑스에 갔다가 놀란 일이 있다. 서점 전층을 다 만화로만 채운 큰 서점에 갔는데 나이가 80 정도 된 몸이 굽은 노부부가 장바구니에 사고 싶은 만화를 고르는 모습을 봤다. ‘여기는 나이 80이 돼서도 만화를 사러오는구나’부터 해서 ‘저 사람들이 집에 가면 흔들의자에 앉아 만화를 보려나’ 이런 생각을 끝도 없이 했다. 우리는 60만 넘어도 만화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일간신문에 만화를 내면 나이 많은 사람들도 보겠다 싶어서 미리 49꼭지까지 다 그려놓고 신문사에 연락해 실어달라고 했지.”

-만화가로서 이루겠다고 생각한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다고 보나.

“전부터 유독 만화책은 종이도 구리고 인쇄상태도 안 좋아 더 천대받는다고 느꼈지. 그래서 만화가협회 회장할 때도 만화의 고급화·다변화·세계화 이런 목표 내걸었다. 내 꿈이기도 했는데 결국 내 만화는 지금까지 세계 9개국에서 출간됐거든. 내가 고집부린 건 무조건 하드커버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고급화와 세계화는 이뤘다.(웃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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