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해 가을, 기자들이 이 사람 연구실 앞으로 몰려갔고 어떤 언론사는 이 사람이 태어난 시골집까지 찾아갔다. 이 사람이 유력한 노벨화학상 후보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수상에는 일단 실패했지만 지난 가을 이후 유명 인사가 되었다.
'세계 정상에 서 있는 사람',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하고 어떤 천분을 타고나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겪었을 사연, 한 인간이 성장하고 변하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 사람에게 듣고 싶었고 정상에서 보이는 학문과 인간의 세계는 어떠한지 알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이 서 있는 곳이 정말 정상인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는 몇 가지 국가적 과제가 있었다. 빈곤 탈출, 정치 민주화, 수출 100억 불, 올림픽 금메달, 월드컵 16강 진출 같은 목표가 있었고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게 과학 분야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국가 대항전 같은 느낌도 있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일본이 지금까지 24명이나 배출한 데 비해 우리는 한 명도 없다는 해설은 그런 인식을 보여준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서울대 석좌교수라고 하는 말만 들어도 이 사람의 삶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당연히 머리 좋은 천재일 테고, 거기에 어울리는 전설 같은 일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석을 놓친 적이 없고 유학을 가서도 콧대 높은 외국인들에게 실력 면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세계 톱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테고,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거나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는 학술지가 거론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99%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왠지 이 사람은 다소 뻔한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지난 11일 오후 이 사람 서울대 연구실을 찾았다.
2. 경북 달성군 하빈면의 연주 현 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고졸 학력의 아버지는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일하던 나름 동네 유지였지만 농사를 짓는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집에서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까지는 십 리 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군내 과학경진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받은 것을 계기로 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똑똑한 아들 이런 촌구석에 두면 아까운 재주 썩힐 것이라는 부모님의 결단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대구로 유학을 갔다.
그때부터 길고 긴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머리 좋다는 서울대 물리학과와 화학과 학생들 태반이 빵점을 맞고 평균 점수가 30점이 될까 말까 한 <응용수학> 시험에서 거푸 100점을 맞았다는 '전설'을 남겼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91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로 유학을 갔다.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6년간의 유학생활 대목이다. 미국 유학 시절 매일매일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힘들었단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왔는데 3년 내내 별 성과가 없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학위를 받더라도 대학 교수 자리는 고사하고 중소기업 같은 데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막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로서 불투명한 장래, 본인의 능력에 대한 회의로 괴롭고 힘든 시절이었다. 지금 돈으로 연간 3천만 원 정도였던 장학금 지원이 3년 만에 끊겼는데, 연구 성과는 잘 나오지 않고 아내 배는 불러오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자존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을까, 그것도 매일매일 말이다. 이 사람은 시련의 원인과 내용보다는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더 말하고 싶어했다. 실패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리긴 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다양한 논문을 읽고 아이디어를 메모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자신이 쓴 아이디어 노트를 보여주며 이게 자신의 보물 상자라고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제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실패하기를 권유했다. 다만 실패를 겪었을 때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거기서 주저앉으면 너는 끝나는 거고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하면 학문적으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해줍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속으로 찔리는 사람들이 제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하버드나 칼텍, MIT 같은 유명 대학에서 지도교수의 명성에 편승해서 쉽게 학위 받고 좋은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 가운데 실패한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박사 4년 차에 처음으로 미국 화학회지에 논문을 실었고 박사학위를 받던 해에 두 번째로 같은 저널에 논문을 게재했다. 초음파 연구에 관한 두 논문이 평가를 받아 1997년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서울대 교수가 된 지 4년 만에 나노과학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 대박 논문을 쓰면서 과학자로서 꽃길을 걷는다. '젊은 과학자상'을 받으면서 시작된 국내 과학상 섭렵은 2008년 포스코청암과학상, 2012년 호암상, 2016년에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모두 받았다. 지금은 6명뿐인 서울대 석좌교수이자 박사급 연구자 29명을 포함한 127명의 연구원이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3. 이 사람의 명성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화학회지(JACS) 부편집장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한국인이 이 학술지의 편집진이 된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다. 사실 이 잡지 이름은 다소 낯설다.
부편집장 역할을 하면서 1년에 받은 급여가 수천만 원이라는 사실도 이 저널의 위상과 권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지난해 말 이 자리를 10년 만에 물러날 무렵 더 영광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글로벌 정보서비스 기업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매해 노벨상 수상 후보를 지명한다. 각 분야별로 4명에서 7명을 지명하는데 학문적 업적을 엄격히 반영한 이 예측은 정확하기로 유명하다. 여기에 후보로 거명되는 사람은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공인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으로 여기에 지명된 사람은 이 사람을 포함해 3명뿐이다.
"이건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화학상 분야는 1년에 6명 정도밖에 선정을 안 합니다. JACS 편집장 타이틀보다 이게 더 권위가 있다고 봐야지요."
이 사람의 대표적인 논문을 인용한 횟수는 3천 번이 훌쩍 넘는데 노벨상 수상자들의 논문 인용 건수가 대략 1천500번 정도다. 논문 피인용 건수로만 보면 노벨상을 받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노벨상에 근접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인 것은 맞지만, 우리 사회가 노벨상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당연히 노벨상 콤플렉스 있지요.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고 과학자들은 더더욱 그렇지요. 우리의 소원 가운데는 통일도 있지만 노벨상도 우리의 소원이지요."
이 사람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과학 전문 학술지들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여기에 논문 한 편 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2005년 당시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이 조작되었다고 해서 나라가 뒤집어진 듯 혼란을 겪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사실 이 학술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의학박사인 SBS 한세현 기자의 설명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이해하기 쉽다.
"제가 쓴 논문 중에 가장 평가를 잘 받은 논문 평점이 5점대인데 네이처에 실리려면 평점이 40점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8배쯤 어렵겠다 싶지만 그게 아니고 2의 8승 배 어렵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표지 논문이 된다는 것은 말 다 한 겁니다. 그거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죠….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린다면 웬만한 대학의 교수 자리를 보장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네이처 표지 논문을 포함해 3편의 논문을 이 학술지에 실었고 공저자로 사이언스 표지 논문을 장식했다. 짐작하기도 아득한 학문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는 자신에게 '기적의 해'라고 표현했다.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 자신감이 지나치지 않았고, 자기 자랑처럼 들리는 말이 적지 않았지만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다. 다만 말끔하고 유쾌하고 명석하고 열정이 넘치는 이 사람의 어느 부분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할지 다소 난감했다.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대단한 것은 알겠는데 그 성취가 눈으로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머릿속으로 그려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머리카락 두께의 5만 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노입자를 균일하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사람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로 일반인들이 어떤 혜택을 얻은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달리 말하면 세계 최고 두뇌들과의 경쟁에서 이 사람이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인데 이 사람이 그들과 싸우는 장면을 본 적도 없고, 이 사람이 참여한 경기가 어떤 경기인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사람이 지난해 쓴 네이처 표지 논문은 불과(?) 6쪽 분량이다. 이 논문을 구해서 몇 줄이라도 읽어보려고 했는데 몇 줄은커녕 단 한 줄도 읽기 어려웠다. 평생 문과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외계인의 언어였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을 취재하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4. 우리 사회는 늘 영웅에 목말라 있다. 스포츠에서 찾고, 정치에서 찾고, 연예계에서도 영웅을 찾는다. 때로는 영웅을 만들려는 집단적 시도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랬다가 벌어진 참사가 '황우석 사태'다. 지난해 이후 이 사람에게 집중되는 관심은 전성기 황우석 박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목할 만하다. 이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징후가 없지 않고 본인도 그런 기미를 모르지 않는다. 과학자는 오로지 과학으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면 안 된다는 말도 이 사람이 대중의 관심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시기사가 얼굴을 알아볼 정도면 엔터테이너 수준이라는 것인데 이미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기사들이 있다고 했다.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부담을 아직은 크게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국민 세금을 받아 연구를 하니 국민들에게 결과를 알릴 의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 취재 요청에 응한다는 것이다.
본인은 절대 천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세계 최정상급 과학자인 이 사람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구를 천재라고 할 것인가. 서울대 출신 천재 과학자라고 하면 면도날 같은 이미지에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사람은 그런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뭐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모든 것이 머릿속에 들어 있고, 필요한 것들은 언제든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어수선해 보이던 이 사람 연구실처럼 이 사람 머릿속은 온갖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때로는 미쳐야 한다고 했다. 자신도 가끔 정상이 아니라고 했다.
"과학자에게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뭐냐. Freedom, 자유로움이에요. 아무도 못 해본 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거든요. 좀 미쳐야 돼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가끔 정상이 아닐 때가 있거든요. 제 집사람도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남들이 볼 때는 오죽하겠어요."
말이 빨랐고 생각은 그보다 더 빨랐다. 질문을 하면 그 질문을 디딤돌 삼아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답이 나오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연구비 유용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면 과학이 국가의 미래에 중요하다, 이를 위해 벤처기업이 중요한데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을 나눠서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라는 식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넘쳐나니 다소 두서없는 대답을 한다고 이해했지만 어느 대목에서 이 사람 말을 끊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노벨상 유력 후보라는 카리스마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서울대 석좌교수라는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본인 표현대로 약간 어벙한 모습이 있었고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아재 형 자학 개그를 구사하면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화술은 몸에 밴 듯했다. 화학을 잘하지 않았더라면 개그맨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꼭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제가 어벙하고 실없는 소리를 잘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긴장을 덜해요. 제가 해외 학회에 나가서 무대에 오르면 저를 아는 사람들은 벌써 웃기 시작해요. 제가 영어로 말할 때는 굉장히 말이 빨라요. 게다가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해요. 청중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조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서울대 석좌교수가 이런 말 쓰면 남들이 뭐라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도 필부들이 쓸 법한 말을 편하게 썼다. 이 사람 말 가운데 일부는 순화해서 옮겨 적었다. 표정이 다양했다. 어떤 때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이었고 어떤 때는 진지한 신앙인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눈에 장난기가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재기 넘치는 눈빛이 안경 너머로 번뜩이기도 했다. 얼굴 근육을 모두 동원해 말을 하기도 했는데 만약 저런 표정으로 화를 낸다면 무섭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를 잘한 사람이니 공부가 제일 쉽고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다는 망언(?)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외우고 하는 거 재미없죠. 그런데 연구는 정말 재미있어요. 남들이 한 번도 못 해본 것을 하는 거, 남들 놀래켜 주는 거 진짜 너무너무 재밌어요."
5.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라고 했다. 이 말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을 이야기했다.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혼자서는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연구를 해야 되고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지난 10년간 자신의 연구는 모두 공동연구였고 지난해 쓴 네이처 표지 논문도 총 23명 연구진이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공동연구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예요. 왜냐하면 혼자서는 절대 홈런을 못 쳐요.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진정한 감동을 주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성공적인 공동연구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면서 소탐대실하면 안 된다고 했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동료 연구자들과 제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한다. 공을 혼자 독차지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경계했다. 지금껏 수백 번이 넘는 공동연구를 하면서 갈등을 빚은 것은 딱 한 번 있었다고 했다.
30대에 국내 최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40살이 되기 전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 사람은 연구자 생활의 대부분을 갑의 위치에서 살아왔을 테고 자신은 좋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수 평가 사이트를 보면 이 사람에 대한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겸손한 척만 하지 마시고 평소에 아랫사람 존중 좀 하세요' 같은 평가도 있다.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부친은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시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친구가 많고 아버지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동네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염습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고 했다. 밝고 사교성 좋은 성품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인 듯싶었고 그 유산이 이 사람을 성공적인 학자로 만든 밑거름이다.
6. 원래 인터뷰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로 약속돼 있었다. 관료, 규제, 벤처기업 등이 화제에 오르자 그렇지 않아도 빠른 이 사람 말이 더 빨라졌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내어놓고 말하라'는 경구를 연구실 벽에 붙여 놓고 지내는 사람답게 한번 말문이 터지자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이 말만큼은 제대로 해야겠다며 인터뷰 이후 일정까지 취소하며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일부 연구자들의 연구비 유용 같은 예외적인 일탈 행위를 빌미 삼아 관료들이 연구자들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규제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돈 준 만큼 거기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죠. 감 놔라 배 놔라 그러는 거죠. 약간 실수하고 그런 거 가지고 하나하나 규제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외국 사례를 들어가며 벤처 창업에 대한 규제를 강력히 규탄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낸 외국 학자들 치고 벤처기업 서너 개 만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스무 개 벤처를 만들어 열한 개를 나스닥에 상장해 억만장자가 된 밥 랭어 교수 사례를 길게 설명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안되는 거예요. 제가 기초과학연구원(IBS) 소속이니 기초과학만 하라는 겁니다. 만약에 현택환이가 회사 만들어서 대박 났다고 하면 난리 날 겁니다. 기초과학연구원 단장으로 매년 70억, 100억씩 받아서 제 뱃속만 채웠다고 할 겁니다. 당장에 감사를 받을 겁니다. 그걸 겁내서 IBS에서도 못하게 하는 겁니다.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에요."
대기업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대기업들이 하버드나 MIT 같은 외국 유명 대학 연구진에게는 국내 연구진에 비해 후한 연구비를 주는 것을 거론하면서 일종의 사대주의라고 비판했다. 대기업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원천 기술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국내 기술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인색해요. 네이처, 사이언스에 우리 논문이 나갈 정도로 우리 원천 기술이 세계 최고거든요. 그런데 대기업들은 완성된 기술을 원해요. 우리 기업 문화가 소위 말해서 전부 턴 키 베이스에요. 외국에서 기술 가져와서 거기서 시키는 대로 공장 지어서 스위치 온 하면 되는 것에 익숙해 있어요. 원천 기술은 그냥 가져가거나 거저먹으려고 해요."
원천 기술은 모를 심는 것과 같은 거라고 했다. 모를 던져둔다고 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거름도 주고 풀도 뽑고 살충제도 뿌려줘야 되는데 대기업은 그럴 생각이 없고 중소기업은 그런 능력이 없으니 결국 자신이 벤처기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던 기초과학연구원과도 어느 정도 타협이 됐다고 하니 이 사람이 벤처기업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벤처기업에 대한 이야기는 과학자들에 대한 보상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은 과학자로서 연구비 등과 관련해서는 꽃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받은 보상이 업적의 크기에 비해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노입자 관련 기술을 한화에 이전하고 43억 원을 받은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실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했다. 대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외국에 비하면 푼돈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제가 IBS 단장되었을 때 당시 오세정 원장(현 서울대 총장)에게 그랬어요. '선생님, 저는요 어중간한 거 안 할 겁니다. 아주 기초적인 연구를 하든가 아니면 돈 되는 거 할 겁니다' 그랬어요"
한때 이 땅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과학자를 꿈꾸었고 현택환 역시 그런 꿈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현택환이 보기에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는 현실은 우려스럽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과학자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이유로 들었다. 중국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면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부성장급 예우를 받고 정초에 시진핑 주석이 제일 먼저 원로 과학자를 찾는다는 중국의 예를 들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젊은 과학자상>을 2002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받고 차도 한 잔 했는데 이보다 더 권위가 있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은 2016년 받았습니다. 그 때 상을 준 사람이 당시 홍남기 미래창조부 차관이에요. 장관도 아니고 차관에게 상을 받았어요. 과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거 아닌가요."
이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면면히 이어지는 외국 학계를 부러워했다. 노벨상이란 게 머리 좋은 사람이 죽으라고 연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이 된 것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이 표현 자체는 진부했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는 1911년, 일본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 것이 1917년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이 설립된 것이 2012년이니 우리와는 거의 10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만큼 따라붙은 것은 기적이라는 것인데 그 앞줄에 자신이 서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현택환은 교수로 정년을 맞은 이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계속 연구를 하겠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자신은 받은 것이 많으니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이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키우겠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더 많은 연구 기회를 주고 필요하면 자신의 이름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빛나는 자리를 양보한 사연을 꽤 길게 이야기했다.
원래 인터뷰 시간은 3시간 정도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1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6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3시간쯤 지나면 묻는 사람도 조금씩 진이 빠지는데 이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 할 말이 많아졌고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자신의 이후 일정까지 취소하면서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샘솟아서 올해 메모해둔 아이디어만 100페이지가 넘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목표가 확고해 보였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나노기술을 활용한 난치병 치료, 수소연료 연구 같은 것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7. 이 사람 전공인 나노기술은 '난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 유래된 말이다. 10억 분의 1미터 크기를 이르는 말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다루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성에 기반한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저 정도 과학자라면 많은 것을 알 거 같지만 사실은 제 분야를 조금만 벗어나도 모르는 거 투성입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자연이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어요. 제 연구도 대부분이 자연을 흉내 낼 뿐인데 그런 오묘한 것들이 수많은 우연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은 0%예요."
그래서 자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강조하는 겸손도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연구실 벽에 붙여놓은 경구 중에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다.
"왜 저런 것을 적어 놓느냐 하면 실제로 교만하기 쉽거든요. 자랑하기 쉽고요. 그래서 저는 선언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하나만 자랑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만 자랑하고 나머지는 자랑하지 않는다…. 제가 완전하지 않거든요. 오리가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지만 밑에서는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처럼 제 삶이 딱 그 모양이에요"
상식을 벗어나는 언행을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격한 단어들을 들어 비난하면서도 이 종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8. 골프를 시작한 지 1년 반쯤 됐다고 했다. 필드에 나간 것이 10여 차례가 되고 연습장도 자주 간다고 했다. 친구 부인이 이 사람이 골프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서 '택환 씨, 노벨상 물 건너갔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골프를 한다는 것을 연구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게 필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5시간에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때 이런 말이 오갔다.
-아침에는 연구실에 몇 시에 나오십니까"
"요즘에는 코로나 때문에 다소 불규칙한데 코로나 전에는 아침 9시에 나와서 밤 10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특별한 약속 없으면 샌드위치로 연구실에서 해결합니다."
-하루에 연구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교수나 IBS 연구단장으로 처리해야 하는 행정적인 업무 빼고 순수하게 연구에만 하루에 7시간 이상 할애합니다."
매일 7시간 이상 연구를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퍼즐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의 서울대 연구실 벽면에 붙어있는 경구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정신적 휴식과 육체적 휴식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들을 앞서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이 사람은 꾸준한 성실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너무 밋밋한 답변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매일 7시간씩 끊임없이 읽고 쓰는 것에 몰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사람이 말하는 '꾸준한 성실'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됐다. 몇십 년을 이렇게 살아온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현택환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테니스가 됐든 골프가 됐든 운동이 휴식이다. 세계 최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그 휴식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날, 학생들에게 BTS의 'Not today' 동영상을 틀어줬다. 자신이 이번에 수상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사람 이야기를 길게 듣고 보니 'Not today, but someday'(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이라는 게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던 듯 싶다.
*이 인터뷰는 지난 3월 11일 현택환 교수 서울대 연구실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현택환 교수와의 인터뷰, 2편 영상 보러가기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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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상에 서 있는 사람',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하고 어떤 천분을 타고나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정상에 이르기까지 겪었을 사연, 한 인간이 성장하고 변하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이 사람에게 듣고 싶었고 정상에서 보이는 학문과 인간의 세계는 어떠한지 알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이 서 있는 곳이 정말 정상인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는 몇 가지 국가적 과제가 있었다. 빈곤 탈출, 정치 민주화, 수출 100억 불, 올림픽 금메달, 월드컵 16강 진출 같은 목표가 있었고 유일하게 이루지 못한 게 과학 분야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상이지만 국가 대항전 같은 느낌도 있다.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일본이 지금까지 24명이나 배출한 데 비해 우리는 한 명도 없다는 해설은 그런 인식을 보여준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서울대 석좌교수라고 하는 말만 들어도 이 사람의 삶은 어느 정도 짐작이 된다. 당연히 머리 좋은 천재일 테고, 거기에 어울리는 전설 같은 일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수석을 놓친 적이 없고 유학을 가서도 콧대 높은 외국인들에게 실력 면에서 조금도 꿀리지 않았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세계 톱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나올 테고,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이름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거나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는 학술지가 거론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99%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왠지 이 사람은 다소 뻔한 이런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을 것 같은 예감을 가지고 지난 11일 오후 이 사람 서울대 연구실을 찾았다.
2. 경북 달성군 하빈면의 연주 현 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고졸 학력의 아버지는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일하던 나름 동네 유지였지만 농사를 짓는 집안 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집에서 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까지는 십 리 길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군내 과학경진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받은 것을 계기로 과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똑똑한 아들 이런 촌구석에 두면 아까운 재주 썩힐 것이라는 부모님의 결단에 따라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대구로 유학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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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길고 긴 유학생활이 시작됐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 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대학교 2학년 때 그 머리 좋다는 서울대 물리학과와 화학과 학생들 태반이 빵점을 맞고 평균 점수가 30점이 될까 말까 한 <응용수학> 시험에서 거푸 100점을 맞았다는 '전설'을 남겼다. 서울대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91년 미국 일리노이주립대로 유학을 갔다.
연구 성과는 잘 나오지 않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힘들었던 유학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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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6년간의 유학생활 대목이다. 미국 유학 시절 매일매일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힘들었단다. 국비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을 왔는데 3년 내내 별 성과가 없었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을까, 학위를 받더라도 대학 교수 자리는 고사하고 중소기업 같은 데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시절이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막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로서 불투명한 장래, 본인의 능력에 대한 회의로 괴롭고 힘든 시절이었다. 지금 돈으로 연간 3천만 원 정도였던 장학금 지원이 3년 만에 끊겼는데, 연구 성과는 잘 나오지 않고 아내 배는 불러오고 미래는 불투명하고 자존심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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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들었으면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싶었을까, 그것도 매일매일 말이다. 이 사람은 시련의 원인과 내용보다는 그 시련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더 말하고 싶어했다. 실패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리긴 했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대학 도서관에서 다양한 논문을 읽고 아이디어를 메모하면서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자신이 쓴 아이디어 노트를 보여주며 이게 자신의 보물 상자라고 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제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실패하기를 권유했다. 다만 실패를 겪었을 때 거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거기서 주저앉으면 너는 끝나는 거고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하면 학문적으로는 물론이고 인간적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제자들에게 말해줍니다. 이런 이야기 하면 속으로 찔리는 사람들이 제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하버드나 칼텍, MIT 같은 유명 대학에서 지도교수의 명성에 편승해서 쉽게 학위 받고 좋은 대학 교수가 된 사람들 가운데 실패한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박사 4년 차에 처음으로 미국 화학회지에 논문을 실었고 박사학위를 받던 해에 두 번째로 같은 저널에 논문을 게재했다. 초음파 연구에 관한 두 논문이 평가를 받아 1997년 모교인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서울대 교수가 된 지 4년 만에 나노과학 분야에서 한 획을 긋는 대박 논문을 쓰면서 과학자로서 꽃길을 걷는다. '젊은 과학자상'을 받으면서 시작된 국내 과학상 섭렵은 2008년 포스코청암과학상, 2012년 호암상, 2016년에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모두 받았다. 지금은 6명뿐인 서울대 석좌교수이자 박사급 연구자 29명을 포함한 127명의 연구원이 있는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을 맡고 있다.
3. 이 사람의 명성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높다.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 화학회지(JACS) 부편집장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한국인이 이 학술지의 편집진이 된 것은 이 사람이 처음이다. 사실 이 잡지 이름은 다소 낯설다.
"제가 해외에 나가 누구를 처음 만나면 'I am a JACS editor'라고 말하면 그걸로 끝나요. 제가 누군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서울대 교수다, IBS 단장이다 뭐 이런 거 다 필요가 없어요."
부편집장 역할을 하면서 1년에 받은 급여가 수천만 원이라는 사실도 이 저널의 위상과 권위를 짐작하게 해준다. 지난해 말 이 자리를 10년 만에 물러날 무렵 더 영광스런 타이틀을 얻었다. 글로벌 정보서비스 기업인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매해 노벨상 수상 후보를 지명한다. 각 분야별로 4명에서 7명을 지명하는데 학문적 업적을 엄격히 반영한 이 예측은 정확하기로 유명하다. 여기에 후보로 거명되는 사람은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공인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으로 여기에 지명된 사람은 이 사람을 포함해 3명뿐이다.
"이건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화학상 분야는 1년에 6명 정도밖에 선정을 안 합니다. JACS 편집장 타이틀보다 이게 더 권위가 있다고 봐야지요."
이 사람의 대표적인 논문을 인용한 횟수는 3천 번이 훌쩍 넘는데 노벨상 수상자들의 논문 인용 건수가 대략 1천500번 정도다. 논문 피인용 건수로만 보면 노벨상을 받고도 남는다는 뜻이다. 이 사람이 노벨상에 근접해 있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인 것은 맞지만, 우리 사회가 노벨상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일종의 노벨상 콤플렉스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노벨상 콤플렉스 있지요. 모든 한국인들이 그렇고 과학자들은 더더욱 그렇지요. 우리의 소원 가운데는 통일도 있지만 노벨상도 우리의 소원이지요."
이 사람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사이언스>, <네이처> 같은 과학 전문 학술지들이다. 세계 최고 권위의 학술지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여기에 논문 한 편 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다. 2005년 당시 서울대 황우석 교수가 <사이언스>에 실은 논문이 조작되었다고 해서 나라가 뒤집어진 듯 혼란을 겪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지만 사실 이 학술지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수의학박사인 SBS 한세현 기자의 설명이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이해하기 쉽다.
"제가 쓴 논문 중에 가장 평가를 잘 받은 논문 평점이 5점대인데 네이처에 실리려면 평점이 40점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8배쯤 어렵겠다 싶지만 그게 아니고 2의 8승 배 어렵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표지 논문이 된다는 것은 말 다 한 겁니다. 그거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죠….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이 실린다면 웬만한 대학의 교수 자리를 보장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네이처 표지 논문을 포함해 3편의 논문을 이 학술지에 실었고 공저자로 사이언스 표지 논문을 장식했다. 짐작하기도 아득한 학문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지난해는 자신에게 '기적의 해'라고 표현했다.
세계적 석학들의 이름을 동네 친구 이름 부르듯 편하게 불렀다. 내 전공 분야에서는 내가 주인공이라는 자신감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니 남의 공적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나노입자 분야에서 노벨상이 나온다면 이론 분야에서 선행 연구를 한 사람들이 먼저 상을 받아야 하고 그 뒤에 기회가 있다면 자신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학계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맥락에서 자신의 성과가 평가받을 만한 것인지 수치를 들어가며 설명하는데 과장도 없고 겸손도 없다. 이런 객관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 다음과 같은 말이 허풍이나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 것이다.
"제 연구팀에 오려는 학생들에게 1시간 정도 우리 연구팀이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설명을 합니다. '우리 연구팀은 세계적인 수준이 아니다. 우리가 세계 최고다'라고 말을 합니다. 지난해 경우 나노 분야만이 아니고 과학, 의학, 공학기술 모든 분야를 통틀어 우리 팀이 세계에서 넘버원일 거예요. 그 어떤 팀도 우리 연구팀을 따라올 수 없다고 자신합니다."
자신감이 넘치는데 그 자신감이 지나치지 않았고, 자기 자랑처럼 들리는 말이 적지 않았지만 듣기에 거북하지 않았다. 다만 말끔하고 유쾌하고 명석하고 열정이 넘치는 이 사람의 어느 부분에 대해 경의를 표해야 할지 다소 난감했다. 이 사람의 학문적 성취가 대단한 것은 알겠는데 그 성취가 눈으로 보이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머릿속으로 그려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머리카락 두께의 5만 분의 1에 불과한 작은 나노입자를 균일하게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사람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로 일반인들이 어떤 혜택을 얻은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달리 말하면 세계 최고 두뇌들과의 경쟁에서 이 사람이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는 것인데 이 사람이 그들과 싸우는 장면을 본 적도 없고, 이 사람이 참여한 경기가 어떤 경기인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 사람이 지난해 쓴 네이처 표지 논문은 불과(?) 6쪽 분량이다. 이 논문을 구해서 몇 줄이라도 읽어보려고 했는데 몇 줄은커녕 단 한 줄도 읽기 어려웠다. 평생 문과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그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외계인의 언어였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을 취재하면서 다시 한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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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리 사회는 늘 영웅에 목말라 있다. 스포츠에서 찾고, 정치에서 찾고, 연예계에서도 영웅을 찾는다. 때로는 영웅을 만들려는 집단적 시도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랬다가 벌어진 참사가 '황우석 사태'다. 지난해 이후 이 사람에게 집중되는 관심은 전성기 황우석 박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주목할 만하다. 이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려는 징후가 없지 않고 본인도 그런 기미를 모르지 않는다. 과학자는 오로지 과학으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말이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면 안 된다는 말도 이 사람이 대중의 관심을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시기사가 얼굴을 알아볼 정도면 엔터테이너 수준이라는 것인데 이미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는 기사들이 있다고 했다.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부담을 아직은 크게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국민 세금을 받아 연구를 하니 국민들에게 결과를 알릴 의무는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언론 취재 요청에 응한다는 것이다.
성공으로 가는 길은 화려한 지뢰밭이다. 연구비 유용 같은 돈 문제, 표절 같은 연구윤리 문제 그리고 성추문 같은 것들을 경계한다고 했다. 이 사람 머릿속에는 이순신 장군에 버금가는 국민적 영웅에서 한순간 사기꾼으로 전락한 황우석 박사가 있는 모양이다.
본인은 절대 천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세계 최정상급 과학자인 이 사람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구를 천재라고 할 것인가. 서울대 출신 천재 과학자라고 하면 면도날 같은 이미지에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이 사람은 그런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뭐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모든 것이 머릿속에 들어 있고, 필요한 것들은 언제든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소 어수선해 보이던 이 사람 연구실처럼 이 사람 머릿속은 온갖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때로는 미쳐야 한다고 했다. 자신도 가끔 정상이 아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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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가장 큰 성공 요인은 뭐냐. Freedom, 자유로움이에요. 아무도 못 해본 일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안 되거든요. 좀 미쳐야 돼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가끔 정상이 아닐 때가 있거든요. 제 집사람도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남들이 볼 때는 오죽하겠어요."
말이 빨랐고 생각은 그보다 더 빨랐다. 질문을 하면 그 질문을 디딤돌 삼아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답이 나오기 일쑤였다. 예를 들면 연구비 유용 문제에 대한 질문을 하면 과학이 국가의 미래에 중요하다, 이를 위해 벤처기업이 중요한데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을 나눠서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라는 식이다. 머릿속에 생각이 넘쳐나니 다소 두서없는 대답을 한다고 이해했지만 어느 대목에서 이 사람 말을 끊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노벨상 유력 후보라는 카리스마로 무장하지도 않았고 서울대 석좌교수라는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본인 표현대로 약간 어벙한 모습이 있었고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아재 형 자학 개그를 구사하면서 상대방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화술은 몸에 밴 듯했다. 화학을 잘하지 않았더라면 개그맨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꼭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제가 어벙하고 실없는 소리를 잘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긴장을 덜해요. 제가 해외 학회에 나가서 무대에 오르면 저를 아는 사람들은 벌써 웃기 시작해요. 제가 영어로 말할 때는 굉장히 말이 빨라요. 게다가 실없는 소리를 많이 해요. 청중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조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서울대 석좌교수가 이런 말 쓰면 남들이 뭐라고 할지 모른다고 하면서도 필부들이 쓸 법한 말을 편하게 썼다. 이 사람 말 가운데 일부는 순화해서 옮겨 적었다. 표정이 다양했다. 어떤 때는 평범한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이었고 어떤 때는 진지한 신앙인의 얼굴을 보여주기도 했다. 눈에 장난기가 느껴질 때가 있는가 하면 재기 넘치는 눈빛이 안경 너머로 번뜩이기도 했다. 얼굴 근육을 모두 동원해 말을 하기도 했는데 만약 저런 표정으로 화를 낸다면 무섭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를 잘한 사람이니 공부가 제일 쉽고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다는 망언(?)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게 재미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외우고 하는 거 재미없죠. 그런데 연구는 정말 재미있어요. 남들이 한 번도 못 해본 것을 하는 거, 남들 놀래켜 주는 거 진짜 너무너무 재밌어요."
5. 연구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라고 했다. 이 말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을 이야기했다. 과학자는 연구실에서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혼자서는 의미 있는 연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연구를 해야 되고 공동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논리였다. 지난 10년간 자신의 연구는 모두 공동연구였고 지난해 쓴 네이처 표지 논문도 총 23명 연구진이 노력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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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연구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예요. 왜냐하면 혼자서는 절대 홈런을 못 쳐요.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과학기술 분야는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야 진정한 감동을 주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어요."
성공적인 공동연구를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면서 소탐대실하면 안 된다고 했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동료 연구자들과 제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한다. 공을 혼자 독차지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경계했다. 지금껏 수백 번이 넘는 공동연구를 하면서 갈등을 빚은 것은 딱 한 번 있었다고 했다.
30대에 국내 최고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40살이 되기 전에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의 반열에 올랐으니 이 사람은 연구자 생활의 대부분을 갑의 위치에서 살아왔을 테고 자신은 좋은 인간관계라고 생각해도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교수 평가 사이트를 보면 이 사람에 대한 호평이 대부분이지만, '겸손한 척만 하지 마시고 평소에 아랫사람 존중 좀 하세요' 같은 평가도 있다.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를 꼽았다. 부친은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시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친구가 많고 아버지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세상을 떠난 동네 사람들의 시신을 거두어 주는 염습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동네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고 했다. 밝고 사교성 좋은 성품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장 큰 유산인 듯싶었고 그 유산이 이 사람을 성공적인 학자로 만든 밑거름이다.
6. 원래 인터뷰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로 약속돼 있었다. 관료, 규제, 벤처기업 등이 화제에 오르자 그렇지 않아도 빠른 이 사람 말이 더 빨라졌다. '속에 있는 생각들을 내어놓고 말하라'는 경구를 연구실 벽에 붙여 놓고 지내는 사람답게 한번 말문이 터지자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이 말만큼은 제대로 해야겠다며 인터뷰 이후 일정까지 취소하며 격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일부 연구자들의 연구비 유용 같은 예외적인 일탈 행위를 빌미 삼아 관료들이 연구자들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규제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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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준 만큼 거기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죠. 감 놔라 배 놔라 그러는 거죠. 약간 실수하고 그런 거 가지고 하나하나 규제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외국 사례를 들어가며 벤처 창업에 대한 규제를 강력히 규탄했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학문적 성과를 낸 외국 학자들 치고 벤처기업 서너 개 만들지 않은 사람이 없고, 스무 개 벤처를 만들어 열한 개를 나스닥에 상장해 억만장자가 된 밥 랭어 교수 사례를 길게 설명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안되는 거예요. 제가 기초과학연구원(IBS) 소속이니 기초과학만 하라는 겁니다. 만약에 현택환이가 회사 만들어서 대박 났다고 하면 난리 날 겁니다. 기초과학연구원 단장으로 매년 70억, 100억씩 받아서 제 뱃속만 채웠다고 할 겁니다. 당장에 감사를 받을 겁니다. 그걸 겁내서 IBS에서도 못하게 하는 겁니다.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에요."
대기업에 대한 불만도 적지 않았다. 대기업들이 하버드나 MIT 같은 외국 유명 대학 연구진에게는 국내 연구진에 비해 후한 연구비를 주는 것을 거론하면서 일종의 사대주의라고 비판했다. 대기업 비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국내 연구진이 개발한 원천 기술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기업들은 국내 기술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인색해요. 네이처, 사이언스에 우리 논문이 나갈 정도로 우리 원천 기술이 세계 최고거든요. 그런데 대기업들은 완성된 기술을 원해요. 우리 기업 문화가 소위 말해서 전부 턴 키 베이스에요. 외국에서 기술 가져와서 거기서 시키는 대로 공장 지어서 스위치 온 하면 되는 것에 익숙해 있어요. 원천 기술은 그냥 가져가거나 거저먹으려고 해요."
원천 기술은 모를 심는 것과 같은 거라고 했다. 모를 던져둔다고 벼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거름도 주고 풀도 뽑고 살충제도 뿌려줘야 되는데 대기업은 그럴 생각이 없고 중소기업은 그런 능력이 없으니 결국 자신이 벤처기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완강히 반대하던 기초과학연구원과도 어느 정도 타협이 됐다고 하니 이 사람이 벤처기업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 날이 멀지 않은 듯하다.
벤처기업에 대한 이야기는 과학자들에 대한 보상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은 과학자로서 연구비 등과 관련해서는 꽃길을 걸어온 사람이라고 했지만 자신이 받은 보상이 업적의 크기에 비해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나노입자 관련 기술을 한화에 이전하고 43억 원을 받은 것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실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3분의 1 정도였다고 했다. 대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외국에 비하면 푼돈이라는 평가도 있었다.
"제가 IBS 단장되었을 때 당시 오세정 원장(현 서울대 총장)에게 그랬어요. '선생님, 저는요 어중간한 거 안 할 겁니다. 아주 기초적인 연구를 하든가 아니면 돈 되는 거 할 겁니다' 그랬어요"
한때 이 땅의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과학자를 꿈꾸었고 현택환 역시 그런 꿈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현택환이 보기에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 몰리는 현실은 우려스럽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과학자를 존중하지 않는 문화를 이유로 들었다. 중국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면 사회적으로는 물론 경제적으로도 부성장급 예우를 받고 정초에 시진핑 주석이 제일 먼저 원로 과학자를 찾는다는 중국의 예를 들었다. 그 다음에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홍남기 당시 미래창조부 차관(왼쪽)에게 받은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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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과학자상>을 2002년 청와대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받고 차도 한 잔 했는데 이보다 더 권위가 있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은 2016년 받았습니다. 그 때 상을 준 사람이 당시 홍남기 미래창조부 차관이에요. 장관도 아니고 차관에게 상을 받았어요. 과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거 아닌가요."
유학 시절 기록한 아이디어 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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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스승과 제자로 면면히 이어지는 외국 학계를 부러워했다. 노벨상이란 게 머리 좋은 사람이 죽으라고 연구하면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정도 수준이 된 것은 '제2의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이 표현 자체는 진부했지만 진실을 담고 있다.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는 1911년, 일본의 대표적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가 설립된 것이 1917년이다. 기초과학연구원이 설립된 것이 2012년이니 우리와는 거의 100년의 차이가 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만큼 따라붙은 것은 기적이라는 것인데 그 앞줄에 자신이 서 있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현택환은 교수로 정년을 맞은 이후에도 은퇴하지 않고 계속 연구를 하겠다는 말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자신은 받은 것이 많으니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을 이 사회에 돌려주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키우겠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더 많은 연구 기회를 주고 필요하면 자신의 이름도 빌려주겠다고 했다. 제자들에게 빛나는 자리를 양보한 사연을 꽤 길게 이야기했다.
원래 인터뷰 시간은 3시간 정도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1시에 시작된 인터뷰는 6시가 다 돼서야 끝났다. 3시간쯤 지나면 묻는 사람도 조금씩 진이 빠지는데 이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더 할 말이 많아졌고 목소리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자신의 이후 일정까지 취소하면서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끊임없이 아이디어가 샘솟아서 올해 메모해둔 아이디어만 100페이지가 넘는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할지 목표가 확고해 보였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나노기술을 활용한 난치병 치료, 수소연료 연구 같은 것이 우선순위에 있었다.
7. 이 사람 전공인 나노기술은 '난쟁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 유래된 말이다. 10억 분의 1미터 크기를 이르는 말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다루는 사람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었다.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성에 기반한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인데 이성을 초월하는 신앙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저 정도 과학자라면 많은 것을 알 거 같지만 사실은 제 분야를 조금만 벗어나도 모르는 거 투성입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내가 모르는 게 많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자연이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어요. 제 연구도 대부분이 자연을 흉내 낼 뿐인데 그런 오묘한 것들이 수많은 우연에서 생겨났을 가능성은 0%예요."
그래서 자신은 전지전능한 창조주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강조하는 겸손도 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연구실 벽에 붙여놓은 경구 중에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다.
"왜 저런 것을 적어 놓느냐 하면 실제로 교만하기 쉽거든요. 자랑하기 쉽고요. 그래서 저는 선언했어요. 사람들 앞에서 하나만 자랑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만 자랑하고 나머지는 자랑하지 않는다…. 제가 완전하지 않거든요. 오리가 물 위에서는 우아하게 떠 있지만 밑에서는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처럼 제 삶이 딱 그 모양이에요"
상식을 벗어나는 언행을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격한 단어들을 들어 비난하면서도 이 종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한 공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8. 골프를 시작한 지 1년 반쯤 됐다고 했다. 필드에 나간 것이 10여 차례가 되고 연습장도 자주 간다고 했다. 친구 부인이 이 사람이 골프를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서 '택환 씨, 노벨상 물 건너갔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골프를 한다는 것을 연구에 전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게 필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5시간에 가까운 인터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을 때 이런 말이 오갔다.
-아침에는 연구실에 몇 시에 나오십니까"
"요즘에는 코로나 때문에 다소 불규칙한데 코로나 전에는 아침 9시에 나와서 밤 10시에 퇴근했습니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십니까?"
"특별한 약속 없으면 샌드위치로 연구실에서 해결합니다."
-하루에 연구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교수나 IBS 연구단장으로 처리해야 하는 행정적인 업무 빼고 순수하게 연구에만 하루에 7시간 이상 할애합니다."
매일 7시간 이상 연구를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퍼즐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의 서울대 연구실 벽면에 붙어있는 경구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정신적 휴식과 육체적 휴식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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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쉬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쉬지 않는 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전 세계의 수많은 천재들을 앞서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이 사람은 꾸준한 성실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너무 밋밋한 답변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매일 7시간씩 끊임없이 읽고 쓰는 것에 몰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이 사람이 말하는 '꾸준한 성실'이라는 표현이 이해가 됐다. 몇십 년을 이렇게 살아온 것이고 그 결과가 오늘의 현택환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테니스가 됐든 골프가 됐든 운동이 휴식이다. 세계 최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그 휴식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던 날, 학생들에게 BTS의 'Not today' 동영상을 틀어줬다. 자신이 이번에 수상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 사람 이야기를 길게 듣고 보니 'Not today, but someday'(오늘은 아니지만 언젠가는)이라는 게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이었던 듯 싶다.
*이 인터뷰는 지난 3월 11일 현택환 교수 서울대 연구실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현택환 교수와의 인터뷰, 2편 영상 보러가기
윤춘호(논설위원) 기자(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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