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오후 3시 국립5·18민주묘지 내 민주의 문 접견실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 A씨가 고(故) 박병현씨 유족에게 사죄의 큰절을 올리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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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오후 3시쯤 국립 5·18민주묘지 내 민주의 문 접견실. 짧은 스포츠머리의 중년 남성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총탄에 동생을 잃은 박종수(73)씨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의 큰절을 올렸다. 한동안 바닥에 엎드린 채 흐느껴 울던 이 남성은 “그만 일어나시라”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관계자의 부축을 받고서야 쇼파에 몸을 의지했다. 이 남성은 5·18 당시 광주에 투입돼 진압작전을 펼치던 중 박씨의 동생 병현(당시 25세)씨를 총으로 쏴 숨지게한 공수부대원 A씨였다.
“어떤 말로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드려 죄송합니다.”
쇼파에 앉아 두 손을 무릎에 올린 채 조심스레 말문을 연 A씨는 “제 사과가 또 다른 아픔을 줄 것 같아 망설였다”며 이내 오열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린 A씨는 “지난 40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유가족을 이제라도 만나 용서를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고 울먹였다. 이에 박씨는 “늦게라도 사과해 줘서 고맙다”며 “죽은 동생을 다시 만났다고 생각하겠다”고 용서했다. 박씨는 “용기있게 나서줘 참으로 다행이고 고맙다”며 “과거의 아픔을 다 잊어버리고 떳떳하게 마음편히 살아달라”고 A씨를 안아줬다.
지난 16일 오후 3시 국립5·18민주묘지 내 민주의 문 접견실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했던 공수부대원 A씨와 고(故) 박병현씨 유족이 사과와 용서의 포옹을 나누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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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A씨와 박씨의 만남은 A씨가 자신의 행위를 고백하고 유족에게 사과하겠다는 뜻을 5·18진상조사위에 밝혔고, 박씨가 이를 수용하면서 이뤄졌다. 5·18 당시 어쩔 수 없이 작전에 투입됐던 계엄군과 유족들이 그날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용서하자는 취지였다.
고인인 병현씨는 1980년 5월 23일 농사일을 도우러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가기 위해 광주 남구 노대동 소재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가다가 당시 이 지역을 순찰 중이던 7공수여단 33대대 8지역대 소속 A씨에 의해 사살됐다. A씨는 총격 당시 상황에 대해 “1개 중대 병력이 광주시 외곽 차단의 목적으로 정찰 등의 임무를 수행하던 중 화순 방향으로 걸어가던 민간인 젊은 남자 2명이 저희(공수부대원)를 보고 도망가자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며 “그러나 이들은 겁에 질려 도주했고, (나도) 무의식적으로 사격을 했다”고 진술했다. A씨는 또 “고인의 사망 현장 주변에는 총기나 위협이 될만한 물건이 없었다”며 “대원들에게 저항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겁을 먹고 도망가던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은 2001년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당시에도 A씨는 “노대동 저수지 부근에서 동료 부대원 3명과 함께 민간인 4명에 대해 조준사격을 해 그 중 한 명을 사살했다”고 고백했다. 진상조사위는 그 동안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계엄군들이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들을 증언한 경우는 많이 있었으나, 가해자가 자신이 직접 발포해 특정인을 숨지게 했다며 유족을 만나 사과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송선태 5·18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은 “이제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당시 작전에 동원된 계엄군들이 당당히 증언해주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광주=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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