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해리 왕자 부부가 제기한 왕실의 인종차별 문제를 엘리자베스 여왕이 ‘집안 문제’로 규정한 것은 왕실의 권위와 영향력을 스스로 떨어뜨린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세금으로 운영되며 영연방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인 여왕이 문제를 바로잡고 왕실의 자정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지난 9일(현지시간) 영연방 기념 연례행사에 참석했다. 런던|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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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언론 가디언은 10일(현지시간) 왕실의 인종차별 문제를 사적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왕실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9일 성명을 통해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 왕자비가 밝힌 왕실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우려스럽게” 보고 있다면서, “일부 기억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의 주장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여왕은 그러나 “가족이 내부적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해리 왕자 부부는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 CBS에서 방영된 인터뷰에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 왕실의 일원으로부터 아이의 피부색이 얼마나 어두울지 우려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해리 왕자 부부가 가족과 절연하고 왕실을 떠난 주된 이유가 인종차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큰 파문이 일었지만, 왕실은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가 이틀만에 여왕 명의로 “내부에서 처리하겠다”고만 발표한 것이다. 해리 왕자 부부는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들을 인터뷰 한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는 아니라고 들었다”고 말했다.
평등 문제를 다루는 씽크탱크 러니메드 트러스트의 할리마 베굼 대표는 가디언에 “우리는 왕실이 인종차별 문제에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보기를 원한다”며 “영연방과 국가 전체가 견지해온 평등에 관한 이념과 부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굼 대표는 “왕실은 이 문제를 나라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인종차별 문제를 내부적으로 다루기로 선택한 것은 어떤 공적인 책임도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베굼 대표은 “이번 문제를 문 뒤에서 처리하는 것은 기회상실”이라고 강조했다.
흑인인권을 위한 학생운동단체 공동 대표인 티렉 모리스는 “왕실이 인종차별을 명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며 “이번 결정으로 실망했고, 더는 왕실에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번 사태를 비공개로 처리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왔다. 야당인 노동당의 벨 리바이로 애디 의원은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왕실은 공적 자금을 받는 공공기관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당연히 공개적인 비판과 수용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어떤 기관에도 적용돼야 한다”며 “왜 왕실에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왕실이 해리 왕자 부부와 아들에 대한 인종차별 의혹을 내부문제로 처리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조사 결과는 비공개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왕실은 마클 왕자비가 왕실 직원들을 괴롭혔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지난 주 공개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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