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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문재인 정부가 ‘1호 국정과제’로 추진한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해 박근혜 정부는 물론 한 때 ‘보수의 씨를 말린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런 윤 전 총장이 지금은 보수 세력을 대표하는 차기 대선 후보로 부상해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정치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지만 윤 전 총장의 최근 인생 역정이 드라마처럼 급변했다는 점에서 그 요인과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윤 전 총장이 검사 시절부터 정치나 대통령을 꿈 꾼 것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검찰을 대단히 사랑한다”는 그의 말에서도 엿보이듯 윤 전 총장은 검사직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거대한 권력의 부정부패에 맞설 수 있는 것은 검사밖에 없고, 실제로도 문민 통치가 시작된 김영삼 정부 이후 최고 통치자 비리까지 단죄한 곳은 검찰이 유일했다는 점에 대한 자긍심이었다는 것이다. 검찰 안팎에서 윤 전 총장을 ‘검찰주의자’ 또는 ‘수사주의자’로 평가하는 것도 검사직의 이런 사명을 높이 평가하는 윤 전 총장의 인식에서 비롯됐다.
윤 전 총장에게 있어서는 거악을 앞에 두고 빗겨가거나 거대 비리를 봐준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용납이 안 되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미움을 받아 한직으로 좌천됐던 자신을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으로까지 발탁해준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2019년 ‘조국 사태’가 터지자 주저 없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던 것도 ‘검사는 거악에 맞서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했을 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런데 이 조국 수사가 결국에는 윤 전 총장이 대권을 꿈꾸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고 말았다. 보수 야권에서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년여 간 이어진 적폐청산 수사로 현 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에 큰 반감을 가졌지만 선거에서 연전연패하면서 반격을 가할 마땅한 진지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 실세의 비리를 정면으로 수사한 윤 전 총장이 출현하자 보수층이 검찰을 진지로 삼아 일종의 ‘반문연대’를 형성했던 것이다. 조국 수사 당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 윤 전 총장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이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2019년 여권이 조국 수사를 극력 반대하지 않고 검찰 수사를 차분히 지켜봤더라면 오히려 윤 전 총장이 차기 대선 후보로 부상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시각도 있다. 윤 전 총장은 단지 정권 실세의 중대 비리를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싶었을 뿐인데 여권이 윤 전 총장을 지속적으로 때림으로써 윤 전 총장을 문재인 정부의 ‘대등한 맞수’로 서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애초에는 윤 전 총장이 정치와 대통령에 뜻이 없었더라도 조국 수사 이후 자신과 검찰에 가해진 정권의 지속적인 압박 속에서 대중적 지지까지 형성되자 ‘시대적 소명 완수’라는 명분과 함께 대권을 향한 의지가 싹텄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 보수 진영은 윤 전 총장이 서울중앙지검장 시절 박근혜, 이명박 두 전직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는 등 적폐청산 수사를 강하게 밀어붙인 것을 맹비난했지만 지금은 그를 보수의 유력 대선 후보로 지지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적의 적은 나의 동지’라는 아랍권의 속담이 지금 우리 정치에서 현실화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한 때 ‘적폐 수사’에 앞장선 윤 전 총장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정권교체라는 보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략적 지지’를 선택하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검사로서 거악에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윤 전 총장의 소신의 바탕 위에서 정권 수사를 가로막고 임기제 총장을 내몰려는 여권의 계속된 압박, 무주공산처럼 변변한 대선 후보 하나 없이 사분오열돼 있던 보수 야권의 지리멸렬함이 모두 합쳐진 결과가 오늘날 윤 전 총장을 보수 진영의 차기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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