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세기 대항해시대 모험가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것 중 하나는 성능이 개선된 화승총이었다. 유럽 팽창에 동원된 신무기는 유럽 내부의 정치 판도도 바꿔놓았다.
화약 사용은 무기 자체의 비용만 높인 게 아니다. 높아지는 사망률로 인해 인건비가 늘어났고 화약으로 맥없이 무너져버린 성벽 복구 비용이 커지는 등 전쟁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이제는 무술이 뛰어난 군주보다 돈 많은 군주가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졌다.
전쟁은 군주들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했고 전쟁 비용 조달은 군주들의 존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됐다. 작은 자치도시의 군주들은 몰락했다. 대규모 군대 운영과 커진 나라 살림을 위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국가조직 체계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이 싣고 와야 이익이 남는 해상무역상의 분쟁 역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결집돼 나타난 결과물이 ‘근대적 개념의 국가 형성’이다.
화약 사용은 무기 자체의 비용만 높인 게 아니다. 높아지는 사망률로 인해 인건비가 늘어났고 화약으로 맥없이 무너져버린 성벽 복구 비용이 커지는 등 전쟁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다. 이제는 무술이 뛰어난 군주보다 돈 많은 군주가 전쟁에서 이길 확률이 높아졌다.
전쟁은 군주들 사이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가속화했고 전쟁 비용 조달은 군주들의 존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가 됐다. 작은 자치도시의 군주들은 몰락했다. 대규모 군대 운영과 커진 나라 살림을 위한 세금을 거둬들이기 위해 국가조직 체계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이 싣고 와야 이익이 남는 해상무역상의 분쟁 역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결집돼 나타난 결과물이 ‘근대적 개념의 국가 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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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➊ 안토니 반 다이크, ‘사냥터의 찰스 1세’, 163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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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➋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 1701년. |
근대국가는 화학 무기 대중화의 산물
이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문제였다. 당시 자신이 주인임을 당당히 선포하고 나선 존재가 바로 왕이었다. ‘왕권신수설’은 강력한 왕의 존재를 설명하는 첫 번째 방법이었다. 왕은 신에게서 지배권을 받았으므로 인간이 만든 법에 대해 초월적인 존재이며, 신민(臣民)은 왕에게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보고 있는 두 명의 왕(그림 ➊, ➋)은 모두 왕권신수설을 주창했다. 둘 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은 엉덩이에 살짝 걸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그림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듯 두 왕의 운명도 서로 달랐다.
첫 번째 그림은 1635년 반 다이크가 그린 영국의 찰스 1세(1600~1649년)의 모습이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자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을 겸함으로써 강력한 군주로 등극하게 됐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통은 달랐다. 잉글랜드에서는 1215년 존 왕이 ‘대헌장’을 통해 “왕은 앞으로 귀족들과의 사전 협의를 반드시 지키겠노라”라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400여년 동안 대체적으로 지켜졌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출신 왕들은 이런 잉글랜드의 전통을 무시하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다. 그중에서도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대표적인 왕이었다.
이 그림(그림 ➊)은 통치자 초상화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냈다. 흔히 통치자 초상화에서 보이는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왕관, 왕홀, 망토 같은 화려한 의장 따위는 없다. 유일하게 눈길을 끄는 것은 찰스 1세의 시선이다. 다소간 침울하고 나른한 듯한 그의 시선은 누구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할 것 같은 고상한 제왕적 시선이다. 하지만 고상과 우울이란 귀족적 이미지가 결합돼 그려진 그는 영국 역사에 손꼽히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왕이었다.
그는 무능했다. 신이 그에게 권력을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은 주시지 않은 모양이다. 1628년, 에스파냐 등 주변 나라와 소득 없는 전쟁을 계속하다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증세가 필요해졌다. 이때 소집된 의회에서 하원의원들을 중심으로 강제 과세 제한과 국민의 각종 자유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청원이 이뤄진다. 권리청원은 영국에서 주권이 국왕에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로 옮겨오는 첫걸음이 된다. 찰스 1세는 이를 묵살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이후 의회는 11년간 열리지 않았다. 이 그림은 불씨를 겨우 잠재우고 있던 기간 중에 그려진 그림이다. 왕은 건재하며, 그가 영국의 궁극적인 통치자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
불과 몇 년 뒤인 1640년대에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반란은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다. 찰스 1세는 체포돼 재판을 받고 ‘국민의 적’으로 처형당한다. 군림하려는 태도와 국민이 원치 않는 전쟁을 강행한 때문에 그는 몰락했다. 그의 아들인 제임스 2세 때인 1688년에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해서 목숨만은 건졌다. 이 일로 영국의 왕은 의회에 권한을 크게 양보하게 된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온다는 것을 영국 왕들이 겸허히 받아들이며 무혈혁명이 이뤄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이때 정립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왕권신수설을 몸소 체현했던 왕은 따로 있었다.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년)다. 그는 재기를 꿈꾸며 프랑스로 망명 온 제임스 2세를 원조해준 장본인이다. 루이 14세는 태양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았고, 태양의 신 아폴로에 자신을 비교했다. 마리 드 메디치의 손자이자 루이 13세의 아들인 그는 1643년 5살에 왕위에 올라서 1715년 죽기까지 무려 72년간의 최장 재위기간을 자랑한다.
찰스 1세와 비슷한 포즈지만 루이 14세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이 그림(그림 ➋)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제왕적 당당함이다. 1701년 당시 63세, 즉위한 지 58년 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의 모습으로, 통치자 초상화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붉은색 하이힐을 신은 왕은 훨씬 키가 크고 당당해 보인다. 왕좌와 테이블, 망토까지 부르봉 왕가의 문장인 황금백합이 새겨진 푸른 벨벳 천이 감싸고 있다. 옆의 거대한 기둥은 그의 힘과 영광과 지속적인 왕권과 안정성을 상징한다. 반면 얼굴은 전혀 미화되지 않았다. 입은 비웃는 듯 단호히 다물고 있고, 눈빛은 냉정하다. 이처럼 긴 코를 가진 사람은 참을성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미와 추, 선과 악 등 모든 상식적인 카테고리를 넘어선 절대적인 통치자의 모습이다.
태양왕에 걸맞은 규모로 건설된 베르사유 궁전은 도시 하나의 크기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고, 귀족 중심의 화려한 로코코 문화가 자라나는 온상지가 됐다. 그는 라신, 코르네유, 몰리에르, 페로, 르브룅 등 작가와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본인이 스스로 무용수로 발레 무대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태양왕이 관장하는 베르사유 궁전은 모든 유럽 제후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까다로운 귀족적 취향을 반영하는 여러 가지 유행을 만들어냈고,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옷을 입고 다녔지만, 그들은 씻지 않았다. 악취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릴 수밖에 없는 추한 사치였다. 궁정의 사치는 밑 빠진 독처럼 엄청난 돈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일은 전쟁이다. 루이 14세는 40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했다. 별 소득 없는 크고 작은 전쟁의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왕궁의 화려함 뒤에 가려져서 쓰레기와 잡초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들, 비특권 계급들이 국가 운영 전체의 비용을 대고 있었다. 성직자와 귀족은 면세 특권으로 의무 없이 혜택만 누렸다. 만성화되는 재정적자는 마침내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한다.
영국 찰스 1세의 포즈를 따라한 루이 14세는, 자신의 후손인 루이 16세가 찰스 1세의 길을 따라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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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04호(13.04.24~04.30 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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