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술가들 ‘원형 보존·존재 이유·현재 위치·방향성’ 깊은 고심
원형 보존 하지 않으면 되레 새로운 창작물처럼 보이지 않아
다양한 시도, 결국 돌고 돌아 본질에…전통적인 것 오히려 더 모던
판소리 ‘마당을 나온 암탉’의 연출을 맡은 소리꾼 지기학.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등장과 동시에 주목받은 이날치 밴드는 판소리 ‘수궁가’를 네 명의 소리꾼(안이호 권송희 이나래 신유진), 두 명의 베이스(장영규 정중엽), 한명의 드럼(이철희)으로 선보이며 새로운 시대의 전통음악이자 팝음악으로 주목받고 있다. [매니지먼트 잔파 제공] |
전통이 울타리를 넘었다. 우리 ‘소리’는 영역을 넘어 대중음악과의 만남을 시도(이날치, 추자혜 차지스, 악단광칠)하고, 고집스럽게 지켜온 장르를 파괴(소리꾼 이희문)하고 있다. 생태보호구역 안에서 보호받아올 ‘운명’이라 여겨졌던 전통이 타장르와 협업하고 변형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요즘이다. 전통예술의 변형과 재해석이 중요한 트렌드를 맞은 것처럼 보이는 때다.
진부하고 어려웠던 전통이 새 시대의 장르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몇몇 음악인들이 주목받으면서다. 민요 록밴드 씽씽이 출발점이었고, 팝밴드 이날치가 ‘1일1범’ (‘범 내려온다’) 시대를 열며 화력을 지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전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시도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조선의 힙’으로 불리며 대중음악의 한복판으로 나왔다.
전통예술에 몸담는 소리꾼, 무용수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도 최근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판소리 ‘마당을 나온 암탉’(2월 3~7일·아르코예술극장)의 연출을 맡은 소리꾼 지기학은 “전통음악의 작업환경이 굉장히 급변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이뤄진 변화는 아니다. 이소영 음악평론가는 “클럽과 인디 문화, 록의 새로운 변종들이 만나면서 국악은 국악대로, 퓨전은 퓨전대로, 크로스오버는 크로스오버대로 각자의 이름으로 타장르와의 만남을 꾸준히 시도해왔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전통의 원형이 가장 잘 살아나는 것이 ‘노래’”였던 지라 밴드와 소리꾼이 중심 이 된 팀들이 주목을 받게 됐다.
전통예술의 현대적 작업이나 재해석이 새 시대의 ‘트렌드’로 받아들여지자 이 장르에 오랜 시간 몸담아온 예술가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트렌드’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작업을 해온 다양한 세대의 전통예술가에게 최근의 변화는 ‘전통’의 존재 이유와 현재의 위치, 미래의 방향성을 고심하게 했다.
월드뮤직 그룹 공명의 멤버인 임용주 음악감독은 지금은 사라져가는 전통악기 편경의 쓰임에 주목한 공연 ‘울릴 굉’(2월 26~28일·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을 준비 중이다. 임용주 역시 편경의 소리를 현대적 어법으로 다듬고 변용해 관객에게 선보일 예정. 그는 “전통음악은 그 자체로 동시대성을 갖추고 있기에 현재에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렇게 때문에 전통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현대적인 시도와 기법과 기술을 최대한 이용하고 반영해 음악작업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가와 일렉트로닉 음악의 결합을 시도한 밴드 신노이의 보컬 김보라(정가)는 “전통 성악을 하는 사람이 왜 이런 팀을 꾸려야 하고, 이런 팀과 함께 해야 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다”며 “판소리보다 덜 알려져 있는 정가나 경기민요 장르를 더 알리자거나 국악을 더 많이 알리자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정가를 하고 있지만, 음악을 하는 밴드의 구성원인 만큼 ‘하나의 음악’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는 “신노이의 음악 작업들은 최대한 전통의 원형을 고수한다기보다는 원형 이전에 어떤 소리를 발현했었고, 그 소리들이 다른 장르와 어떻게 어울릴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다”라며 “그러다 보니 새로운 형태를 갖추게 됐고, 이것이 21세기에 원하는 융합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설명했다.
전통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통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소영 평론가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바꾼다 해서 원형을 보존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창작물처럼 보이지 않는다”며 “재해석을 하면서도 전통의 원형 보존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 출연하는 소리꾼 김소진도 현대화 작업을 통해 전통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김소진은 “창작 판소리를 비롯한 많은 창작 작품들이 전통을 기반으로 현대적 과정을 거치다가도 다시 전통으로 돌아오게 되는 과정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통의 힘은 어떤 경우로도 바뀔 수 있고, 또 현대적인 것일지라도 끌어올 수 있는 힘,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지기학 연출가 역시 “그간 다양하게 시도해봤는데, 결국은 돌고 돌아 본질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라며 “다양하게 이뤄지는 작업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이 음악들이 추구해온 가치가 무엇인지에 집중할수록 부수적인 것들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전통적인 것들이 잘 드러나면 오히려 그게 더 모던해진다고 생각한다”고 돌아봤다.
장르의 파괴나 영역 확장으로도 볼 수 있는 전통예술의 ‘현대화’라는 것이 이들에게 이색적인 작업은 아니다. 이미 꾸준히 해온 작업이자, 그들 각자가 해온 음악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정가 보컬리스트로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혁신적인 작업을 하는 공연예술가 박민희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바꿨다는 수식을 특별하게 볼 이유는 없다”며 “단지 전통적인 가곡을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많은 전통 예술가들의 실험과 시도가 이어지고 있고, 점차 완성이 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라며 “시도 자체만 가지고 의미가 있다고 바라보는 시대는 지났다. 이러한 작업들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보단 어떠한 예술적 완성도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봐달라”고 했다. 전통음악에 대중음악을 결합한 밴드 고래야의 멤버 경이(퍼커션)는 “음악을 만들 때 이것이 국악인지 아닌지 고민하면서 만들지 않는다”라며 “다만 국악이라는 말을 긍정적인 의미로 이해해주는 젊은 세대가 많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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