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를 비롯한 청년·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9월28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박원순 성폭력 사건 대응 관련 서울시 공개 질의서 제출 기자회견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서울시가 피해자의 말에 대한 반박으로 2차 가해를 양산하는 것을 멈추고 제출한 공개질의에 대해 명백히 답하고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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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4월7일로 예정된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가 12월28일로 꼭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차기 대통령 선거를 11개월 앞두고 치러지는 이번 보궐선거는 향후 대선까지 민심의 큰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가늠자로 여겨진다. 특히 관심이 쏠리는 것은 집권 4년차에 치러지는 보궐선거에서 ‘심판론’ 바람의 방향과 강도다.
보수 야권은 앞서 치러진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내로남불’과 소득주도성장 등 정책 실패를 들어 문재인 정부 심판을 호소했지만, 민심은 싸늘하게 등 돌렸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무엇보다 이번 보궐선거의 원인이 여당 소속인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권력형 성폭력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치솟는 전셋값과 아파트값도 여권의 악재다. 야당은 코로나19 백신 문제를 고리로 정부·여당이 추어올리던 ‘케이(K)-방역’에 균열을 노리고 있다. 야당은 반전의 기회를 득점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여당은 능력과 책임을 보여주는 집권세력으로서 재신임을 받을까? <한겨레>는 4월 보궐선거를 ‘코로나19 확산’ ‘젠더’ ‘부동산 정책’ 세가지 이슈로 조망해 본다.
여도 야도 ‘젠더선거’ 준비전
더불어민주당보다 일찍 재보선 경선준비위원회(경준위)를 꾸려 선거 국면에 돌입한 국민의힘은 ‘성인지 감수성’을 앞세운 강도 높은 검증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의힘 경준위는 지난달 12일 △권력형 성범죄 등 성비위 △세금탈루 △막말·갑질 등 후보자들의 공직 적격성 전반을 엄격하게 검증할 ‘자기검증서’를 제출받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겨레>가 국민의힘 경준위로부터 입수한 자기검증서를 보면, ‘양성평등 및 성비위 관련’ 항목에 ‘본인, 배우자 또는 자녀가 성매매 등의 범죄로 조사 또는 수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본인, 배우자 또는 자녀가 이성에 대한 발언이나 행동 등과 관련해 공개적으로 항의가 제기되는 등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까’ 등의 11개 문항이 있다. 경준위원인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성범죄에 대한 후보자의 인식과 양성평등 의식 검증을 우선시한다는 취지로 관련 문항을 추가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지난 21일 4·7재보궐선거 공직선거후보자검증위원회(검증위)를 꾸렸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포함해 총 9명인 검증위 중 외부위원 5명을 여성으로 구성했다. 여성 대상 범죄인 성범죄나 가정폭력의 경우 기소유예를 포함한 처벌 전력이 있으면 무조건 부적격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을 맡고 있는 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성폭력 문제는 사실 권력과 대표성의 문제다. 여성에게 기회를 주고 여성이 권력을 쥐었을 때 어떻게 달라지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며 ‘여성 후보 추대론’도 띄웠다. 그러나 당내 일각에선 야당이 깔아놓은 ‘젠더선거판’에 끌려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반발이 나오기도 한다.
서울시장 선거 여성 후보군. 윗줄 왼쪽부터 민주당의 박영선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국민의힘 소속인 나경원 전 의원, 박춘희 전 송파구청장, 윤희숙 의원, 이혜훈 전 의원, 조은희 서초구청장, 정의당의 권수정 시의원, 열린민주당의 김진애 의원, 기본소득당의 신지혜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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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장 여성 후보로는 민주당의 박인영 부산시의장(왼쪽)과 국민의힘 이언주 전 의원 등이 있다. |
최초 여성 시장 나오나
이처럼 남성 중심적이었던 정치무대에서 여성 후보들의 출사표가 쏟아지는 건 긍정적인 현상이다. 심판론을 내세운 야권에서 그 분위기가 더 뜨겁다. 나경원 전 의원(4선), 이혜훈 전 의원(3선), 재선 구청장인 조은희 서초구청장, 박춘희 전 송파구청장, ‘나는 임차인입니다’ 5분발언으로 인지도가 올라간 초선 윤희숙 의원 등 여성 후보군이 풍부하다. 여권에선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꼽힌다. 정의당에서는 권수정 서울시의원이 출마 의사를 밝혔다.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도 27일 공식 출마를 선언했고, 신지혜 기본소득당 대표는 이미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부산에서는 재선의 이언주 전 국민의힘 의원이 출사표를 던졌고, 민주당 소속인 박인영 부산시의장도 후보로 입에 오르내린다.
그렇지만 단순히 여성 대 남성으로 각을 세우는 성대결 국면으로 선거가 흘러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성대결 구도로 전임 남성 시장들과의 차별화를 부각하다가 여성 후보들은 불쏘시개로만 쓰이고 사그라들 수도 있다. 전직 두 시장의 사건의 배경이 단체장에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고 이를 사유화하는 것이 묵인되는 구조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차기 시장은 이 권력 구조 문제를 뜯어고칠 의지를 검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수현 젠더정치연구소 대표는 “그동안 재보선이 치러지게 된 원인을 보면, 꼭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남성 정치인의 과오로 인한 선거가 많았다. 이는 여성 정치인이 그동안 정치에 개입되는 정도가 낮아서라는 이유도 있다. 여성이 권력을 잡는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성별’ 자체보다, 성범죄 혐의로 끝난 시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비전’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권 대표는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지금 양당에서 단순히 인기 있는 여성 정치인을 밀어주는 방식으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후보자의 성인지 감수성과 무엇보다 지금 젊은 여성들이 갖는 불안을 어떻게 해소시켜줄 것인지를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수현 대표는 “성평등 관점이 들어간 구체적인 문제 해결책이나 대안 없이 유명 정치인만 앞세운다면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또한 (두 전직 시장의 성범죄) 상황으로 인해 여성 후보가 이점을 얻었다고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책과 대안 없이 ‘성별’만 앞세운 선거는 ‘풍요 속 빈곤’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양성 평등을 위한 공천 혁신은 한국 정당사에 오래된 숙제다. 성평등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성평등 공천이 전제돼야 한다는 자명한 문제의식 아래 각 정당은 선거 때마다 여성 정치인에 대한 가산점과 공천 할당을 약속해 왔다. 마침내 2005년 공직선거법에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의회 선거에 100분의 30 이상을 여성으로 추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넣은 것은 이런 공감대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성과는 미미하다. 매 선거마다 정당들은 여성 후보자를 30% 이상 공천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의석수 확보가 절체절명의 과제인 정당들은 본선 경쟁력이라는 미명 아래 ‘권고 조항’에 그치는 공직선거법 조항을 휴짓조각 취급했다. 실제 지난 4·15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은 모두 지역구 여성 후보자를 30% 이상 공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비율은 민주당 12%·통합당 10% 수준에 그쳤다. 4년 전 20대 총선 때도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여성 후보 비율은 7%, 민주당은 11%에 그쳤다.
여성들이 각 정당의 공천 문턱을 넘지 못하면서 ‘여성 정치’의 진전도 더디기만 하다. 1948년 제헌국회에선 여성의원이 단 1명도 없었고, 2대 국회에서 2명이 배출됐다. 줄곧 한 자릿수에 머물던 여성 의원 비율은 2004년 17대 국회 들어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제 덕분에 13%로 늘었다. 이어 18대 국회 13.7%, 19대 국회 15.7%, 20대 국회 17%, 21대 국회 19%로 최근 들어 4년마다 2%포인트 남짓씩 늘어나는 추세다.
문제는 이런 ‘거북이 걸음’만 기다리기엔 여성 정치의 실현이 시급하는 것이다. 내년 4월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된 원인에서 보듯, 정치·행정 권력의 영역에서 성인지적 관점이 전제된 운영 원리와 자기 성찰은 매우 척박한 수준에 머문다. 지난 2월 미국외교협회(CFR)가 발표한 ‘여성 파워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적 평등성 점수는 100점 만점에 17점으로 대상국 193개 가운데 124위에 머물렀다. 갈 길이 너무나 멀다는 뜻이다.
더욱이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같은 행태가 반복될 조짐이 보인다. 당초 이번 보궐선거를 ‘젠더 선거’로 규정하고 공천 과정에 여성 후보 가산점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던 국민의힘에서는 여성 가산점을 예비 경선에만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국민의힘 한 경선준비위원은 “여성 가산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과 지금 우리 여성 후보들이 가산점을 받을 만한 사회적 약자는 아니지 않느냐는 이견이 팽팽히 갈리는 상황”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 당원 투표로 보궐선거 후보 공천 금지 규정을 폐지한 민주당에서도 여성 후보 가산점을 규정한 당헌 규정에 대한 ‘역차별론’이 불거지고 있다. 민주당 서울시장보궐선거기획단장을 맡고 있는 김민석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8일 <시비에스>(CBS) 라디오에서 “어지간한 남성 후보들보다 더 세고 더 유명한 여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이상하다”고 말한 바 있다.
오연서 노현웅 정환봉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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