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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만화가 신문수 “우리는 그냥 원로 아니고 ‘프로’” [한국만화가협회 공동기획-한국만화의 거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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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만화계 ‘원로 중의 원로’ 신문수 화백


“지나온 시절의 생활을 생각하면 우리가 진짜 ‘프로’다. 그런 말 많이 했지.”

만화가 신문수 화백(81)은 만화계 ‘원로 중의 원로’다. 하지만 그는 원로라는 말보다 프로라는 말을 더 많이 꺼냈다. 그의 작업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 중 과거 그렸던 결과물만이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 새로운 작품이 더해지고 있다는 점만 봐도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종이에 그린 만화뿐 아니라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으로 순식간에 뚝딱 그림 한편을 그리는 모습에서 늙지 않는 프로정신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올해부터 받기 시작한 항암치료 때문에 기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탄식했다. 12월 7일 경기 성남시에 있는 신 화백의 작업실에서 만화가로서의 그의 일생과 작품활동에 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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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신문수 화백이 경기 성남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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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랜만에 하는 것 아닌가.

“(과거 발행된 인터뷰 기사를 들추며)10년이 넘었네. 옛날에 만났던 기자들 찾아보니 다 퇴직하고 거의 현직에 없더라. 인터뷰한 지 오래됐으니 그만큼 할 말은 많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명랑만화 그리면서 친하게 지내는 박수동, 이두호, 윤승운, 이정문 그리고 나까지 5명이 ‘명랑만화 5인방’이다. 이제 현직에서 활동하는 일은 가끔 가야 있지만 그렇다고 놀지만은 않는다. 우리 다섯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같이 합작 만화를 해보자’ 하는 얘기가 나왔다. 5명이 종이 1장에다 그리는 식이다. 그려놓고 보니 각자의 그림이 굉장히 조화롭고 괜찮더라. 처음에 그렇게 그려서 쌓아뒀다가 이 그림이 어느 정도 평가를 받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사동의 한 화랑 사장이 경매에 올려보자길래 올려봤더니 냉큼 팔리는 거야. 요즘 유명 화가 그림도 잘 안 팔리는데 만화는 팔려. ‘아, 이 정도 평가가 나오는구나’ 싶어 다른 경매에도 한 번 올리니 또 냉큼 팔렸어.”

-그리는 족족 팔면 큰돈을 벌 수 있겠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5인방의 이름을 아니까 평가가 잘 돼서 자꾸 경매에 올리라고 하는데, 당장 팔려고 그리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더 높게 평가돼야지. 다들 만화 그린 지 50~60년 됐고 붓으로 생활한 사람들이니 여느 화가들보다 경력이 더 된다. 이제 만화도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정받는 길을 틔워놓자는 뜻으로 시도해본 거다.”

-많은 사람이 보게 전시를 할 생각은 없나.

“서울 삼청동에 있는 갤러리에서도, 다른 미술관에서도 연락이 와서 전시를 해보자고 한 게 작년 연말쯤이었다. 그런데 그러다 코로나19 때문에 시기가 안 좋다고 미루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다. 5인방이 아니라 개인전을 해도 전시할 작품은 넘치니까 조금 더 기회를 보려고 한다.”

-10년도 더 전인 2009년 <로봇 찌빠>가 애니메이션으로 나와 주목받았다. 옛 작품을 다시 선보일 생각은 없나.

“<로봇 찌빠>가 1979년부터 1993년까지 연재했는데 한창 연재 중일 때 실사 영화를 만들자고 연락 온 적도 있다. 애니메이션 만들자는 제의도 이전부터 많았고. 그런데 당시 영화를 만들려면 제작비를 대는 사람을 구해야 했어. 그때만 해도 만화로 만드는 실사 영화가 흥행할지 자신이 없었나봐. <로봇 찌빠>는 두 군데 계약했다가 결국 둘 다 투자자 모집이 안 됐나봐. 계약 해지되고 난 계약금만 먹었지.”

-그래도 단행본으로 복간된 과거작들은 이제 구하려 해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있던데.

“복간한 단행본들을 살 수가 없지. 옛날 작은 출판사에서 나온 판본도 있고 여러 판본이 있긴 한데…. 물론 나는 내 작품들을 다 모아놨다.”

신 화백은 메모 여러장을 꺼내 과거 연재하던 지면과 매체의 이름을 보여줬다. 1996년 한 해 동안의 연재처만 해도 27곳에 달했다. 매일 연재하는 일간 연재처에다 주간과 월간까지 더하면 마감이 가능한가 싶을 정도였다. 당시는 마감시간에 임박해 사람을 통해 원고를 보내던 시절이었지만 원본 그림은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 직접 보관했다. 그렇게 보관 중인 원고만 작업실 한켠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원고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모습으로 유명하다.

“지금 작업실을 보면 알듯이 곳곳에 작품들을 다 꺼내놨다. 왜 그랬냐면, 지금 항암치료 받고 약 먹고 있어서다. 작년 9월 ‘고바우’ 김성환 선생이 돌아가셨다. 내가 굉장히 모시고 따르고 멘토로 생각하던 분이라 충격을 받았다. 나도 검진을 받아봐야겠다 싶어 CT 사진을 찍으니 폐에 작은 반점이 보이더라. 췌장에 2㎝ 정도 되는 암이 발견됐다는 거다. 의사와 상의한 뒤 조금만 지켜보자 하고 3개월마다 계속 봤는데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지난 8월 췌장은 그대로인데 그 밑에 신장에서 암이 발견됐다. 내가 신장 2개 중 하나는 17년 전 떼어냈기 때문에 이제 남은 하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죽음을 앞두고 지난 60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을 기념관에 전시하는 게 꿈이라 이렇게 모아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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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화백이 독자들을 위해 보내 온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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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중인 환자 같지 않게 겉만 봐선 아주 건강해 보인다.

“요 몇달 동안 작품 목록을 정리하고 있다. 저녁이 되면 몸도 아프고 힘이 떨어져 일을 더 못한다. 항암치료제를 먹으니 식욕이 딱 떨어져서 밥을 못 먹는 게 힘들다. 비타민이랑 영양제, 대용식 그런 거 먹고 토스트 한쪽 구워먹는 정도다.”

-원래 동료 만화가들과 약주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던데.

“예전에 고우영·윤승운이랑 역삼동에서 같이 화실에 있을 때 재미난 일이 많았다. 윤승운은 술을 안 좋아하기도 하고 집도 멀어서 저녁에 일 끝난 뒤 술집 가자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서 뺐다. 억지로 끌고 가도 화장실 간다고 하고선 도망가고, 다음날 ‘어제 왜 도망갔냐’ 물으면 윤승운이 ‘그때 이렇게 화장실 갔다 온다고 했잖아요’라며 재연하는 척하다 도망가고….(웃음)”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만화가들만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아 부럽게 느껴진다.

“바쁘게 살아왔던 점이 후회돼서 당시 몇군데에만 한정해 더 집중했으면 더 좋은 작품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더라. 고우영은 놀기 좋아하는데다 신문 삽화 때문에 매일 마감이 있어 더 바빴거든. 셋이 만나서 아침에 조금 일하다 점심되면 점심내기 고스톱 치고, 먹고 오면 ‘식후 소화제로 한판!’ 그러면서 쳤지. 그때 고우영은 원고 가지러 오는 사람한테 ‘신사동쯤 오면 전화하라’고 해놓고 전화가 오면 그제야 삽화 여러 장을 빨리빨리 후닥닥 그리는 거야. 그거 보면서 ‘천천히 그리면 더 잘 그릴 텐데’ 생각도 했지만 막상 나도 그림을 꼼꼼하게 잘 그리려고 하면 안 되더라고.”

-명랑만화는 문하생도 없고 당시 극화체 만화처럼 ‘공장식’도 아니라 더 정신없었겠다.

“우리 같은 명랑만화 그림은 문하생들이 흉내낼 수 있는 그림체가 아니지. 팔이 옆구리에서도 나오고 머리에서도 나오고 작가가 그때그때 과장하고 축소하기 때문에 기본형이 없잖아. 극화체는 선생의 틀이나 공식 같은 게 있는데. 명랑만화는 작가마다 개성이 뚜렷하지. 거기다 만화가는 직장 없이 프리랜서로, 순전히 원고료 수입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냐. 그래서 우리 5인방들이 ‘진짜 프로는 우리다’라는 자부심이 있어.”

-요즘 인기를 끄는 웹툰을 보면서 어떤 평가를 하는지?

“2000년대 초부터 대학에 만화과가 생기기 시작해서 많을 땐 80곳 넘게 생겼어. 그 전에는 문하생으로 들어가 도제식으로 지우개질부터 하며 배웠으니 만화를 대학에서 가르치는 게 가능한가 싶어 회의감도 들었지. 그런데 보니까 그게 아니야. 내가 강의도 하고 공모전 심사도 해보니 그림 실력이 기가 막힌 좋은 그림이 정말 많아. 이전까진 ‘만화는 그림만 잘 그릴 필요는 없다. 그림보다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교육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몸소 느끼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훌륭한 교수 밑에서 좋은 시설 써서 체계적으로 교육받으니까 10년 후 한국 웹툰 수준이 이렇게 높아진 것 아닌가.”

-일본에서도 한국 웹툰의 인기가 높아진다고 한다.

“2003년에 일본에서 대규모 만화가 회의가 있어 단체로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땐 일본만화와의 격차가 더 컸지. 그러니 일본 대표가 ‘한국의 만화가 지망생들이 일본에 오면 교육해 주겠다’며 건방진 말을 장황하게 하는 거야. 그 얘기 듣고 화가 나서 ‘한국 만화도 지금 체계적으로 교육 중인데 나중에 두고 보자’며 한국 대표단을 끌고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음날 일본 대표랑 임원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못 가게 붙잡고 그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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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신문수 화백이 경기 성남시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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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후배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없나.

“현역에서 그리던 시절 동료들끼리 동인회를 만들어 야구도 하고 친목회도 하고 친하게 지냈다. 후배들에게 하나 하고 싶은 말은, 만화계라는 한배에는 잘 나가는 만화가도 있지만, 기본 수입도 못 버는 작가도 많으니 어려운 동료를 배려하는 동료애 같은 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다. 만화가들의 권익을 위해 힘을 보태야 할 때는 보태고.”

-그런 점에서 원로 만화가들, 특히 명랑만화가들은 너나없이 친분이 강한 것 같다.

“윤승운은 나보다 네 살 아래고 내가 제일 나이가 많지만 다 친구로 지낸다. 요즘 몸 아프다고 하니까 안부전화 자주 하면서 ‘형님, 형님’ 그러고. 나는 나이가 많아도 컴퓨터를 일찍 배워서 포토샵도 할 줄 안다. 종이로 그린 뒤 수채화로 채색하지만, 컴퓨터로 색을 입히기도 하고, 스마트폰 그림 앱으로도 그림 그려서 안부차 보내주기도 하고.”

-젊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가 원로라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전북 남원에 춘향로와 월매길 도시재생사업을 할 때도 명랑만화가들에게 섭외가 들어와 남원에 얽힌 고전 옛날이야기를 다 벽화로도 그리고 관광지 캐릭터 그림도 그렸다. 경남 하동에서도 매년 5월 화개장터 야생차 축제 열릴 때마다 사인회한 것이 10년 넘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다 중단돼버렸네.”

-프로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한평생이다.

“사실 옛날 아날로그 만화가 요즘 독자들에게는 재미가 없다. 웹툰에 익숙해져서 보는 눈이 달라졌으니 저런 만화도 있었나 하지. 젊은 독자들은 이현세도 몰라, 조석은 알지. 그래도 한 지인한테 손자가 있다고 해서 <도깨비 감투> 책을 주니 처음엔 잘 안 보더래. 그런데 슬쩍 보니까 재미가 있어. 그러다가 본 것 또 보고, 화장실 갈 때마다 들고 가서 본다더라고. 그게 명랑만화의 매력이니까.”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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