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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성폭행 피해자 정체성과 정치인 정체성, 같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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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11월 20일,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가 부산지방법원에 섰다. 준강간치상 사건의 피해자로 증인신문을 받기 위해서다. 신문에 앞서 신 대표는 자신의 트위터에 증인대기실의 책장 사진을 올리며 “어린이들이 오면 읽을 수 있도록 책이 구비되어 있다. 이 방을 거쳐갔을 수많은 소녀를 떠올린다”고 썼다. 준강간치상은 정확한 판단이 가능하지 않은 상대방의 상태를 이용해 강간하고 상해를 입힌 것을 뜻한다.

2018년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한 변호사가 그의 선거포스터를 두고 ‘개시건방지다’고 말해 논란이 일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그는 ‘거칠 것 없는 젊은 여성 정치인’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는 다르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는 정치인 정체성과 피해자 정체성이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유독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자답기를 바란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일상생활을 못 할 정도로 힘들다면 대한민국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성폭력 범죄 신고율은 20% 이하로 추산되는데 신고된 범죄만 연간 3만건을 넘는다. 신 대표를 12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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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한여넷) 대표와 여성신문 산하의 젠더폴리틱스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한여넷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이후, 정치계 성폭력이 너무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만들어졌다. 페미니즘과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정치계 성폭력에 긴밀하게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를 제출한 상태다.”

-지난 총선에서 서대문갑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힘들지 않았나.“무소속이 힘든 건 사실이다. 심정적으로 힘든 게 아니라 무소속 후보는 힘들 수밖에 없는 제도다. 지역에 사는 주민 500명 서명부터 시작해 후원도 정당이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 측면에서 힘들었다.”

-3.2% 득표를 어떻게 평가하나. “서대문갑은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이성헌 당시 미래통합당 후보가 20년 동안 번갈아가며 당선된 곳이다. 양당 중심 정치를 끝장내고 새로운 정치시대를 열자고 주장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봤다. 3.2% 득표는 아쉽다. 그래도 20~30대 득표율은 10~15% 수준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희망하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면에서는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선거였다.”

올해 3월, 신 대표는 8년간 몸담았던 녹색당을 탈당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다. 개별 정당 차원에서나 전체 정치 구도에서나 절대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위성정당 논의에 녹색당이 참여한 것과 자신에게 발생한 성폭행이다. 일각에서는 신지예가 총선을 한달 앞두고 탈당했다며 비판했지만 성폭력 사건을 굳이 앞세우진 않았다.

위성정당 논란과 성폭행 사건이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신 대표는 ‘사실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공동위원장이었음에도 위성정당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다. 동시에 그가 당에서 추진하려고 했던 ‘2020여성출마프로젝트’ 등은 사업 시작부터 예산 집행까지 번번이 막혔다. 그는 이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스트 정치인’은 소외됐고, 그래서 ‘함부로 해도 되는 존재’가 됐다고 생각한다.

검찰은 가해자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사건 직후 신 대표가 녹음해서 증거를 만들었고, 곧장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성폭행은 인정하지만 성폭행 과정에서 상해를 입힌 것은 인정 못 하겠다는 입장이다.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다. 선고는 내년 1월 22일이고, 12월 31일까지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에 ‘신지예 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성폭행 가해자를 엄벌에 처해주십시오’라는 탄원서가 공개됐다. “감사하게도 함께 조직 내 폭력에 목소리를 내주셨던 분이 탄원서를 써주셨다. 페미니즘 서울시장 후보를 내걸고 나온 사람을 성폭행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저는 공동위원장이었지만 당 내에서 정치적 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당에서 입지가 튼튼한 가해자가 ‘내가 이야기를 잘해볼 테니 만나자’고 했다. 가해자는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계획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당도 직장이다. 직장에서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도와주겠다고 한 뒤에 강간한 것이다.”

-얼마 전에 재판에 출석했다.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 “상대측 변호사가 ‘상처가 될 질문을 하겠다’며 양해를 구한 다음, 성폭행을 당했는데 어떻게 선거에 출마할 수 있냐고 물었다. 회사에 못 나가야지만 상해폭행이라는 말과 같다. 성폭행 피해자는 죽을 듯이 힘들어서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어야 피해자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도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맞으면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서 진단서를 떼고 위자료를 받고 한다. 유독 성폭력은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가해자 변호사 주장처럼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생활을 못 한다면 대한민국은 돌아가지 않는다.”

-알리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공개하지 않을 이유는 또 없다. 정치계는 어떤 영역보다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져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왜 정치가 바뀌어야 하는가? 왜 성평등이 더 나은 정치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싶었다.”

-‘내가 유권자들에게 정치인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을 했다는 기사를 봤다. “한국사회는 피해자가 약한 존재로 남기를 바란다. 해결하고 바꾸는 사람으로서의 정치인 이미지와는 잘 매치가 안 된다. 이런 사회적인 통념 때문에 많은 여성 정치인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정치인은 사실상 임시직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뭐라도 잘못했다가는 내 커리어가 다 무너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다. 이제는 다르게 생각한다. 성폭력 생존자는 강한 존재이며,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무언가를 바꿀 의지를 지닌 이들이다.”

-정치계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고발하고 해결하려면 어떤 조력 혹은 시스템이 필요할까. “최소한 30%가 돼야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더 많은 여성이 기초의원, 국회의원에 당선돼야 한다. 이번 보궐선거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20·30 여성들이 정치적으로 훈련될 필요가 있다. 유권자를 넘어서 정치의 판을 바꾸는 사람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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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은 중2 때 시작됐다. 두발 자유화 운동을 위한 ‘한국청소년모임’이라는 온라인 카페를 만들었다. 제도권 고등학교 대신 대안학교 ‘하자작업장센터’를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이야기꾼의 책공연’이라는 사회적 기업에서 연극인으로 일하며 전국을 다녔다. 입시학원에 다니거나 자기소개를 써본 적은 없다.

이력만 보면 ‘대안적인’ 삶을 살아온 것 같지만 그는 “대안적 삶이라기보다는 과로와 저임금의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대학에 갈까 고민했지만 입시 준비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첫 직장은 사회적기업이라는 타이틀이 있었지만 보통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달 90만원 정도를 벌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대학에도 가보고 싶고 그런 문화에 들어가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며 “그래도 제가 갔던 길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녹색당 가입은 우연이었다. 서울시청 앞 광장을 지나다가 녹색당 부스를 보고 후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입당했다. 이후 추첨제로 당 대의원이 됐고, 2016년 총선에서는 녹색당 비례대표로 출마, 2018년에는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다. 서울시장 선거 사상 최연소(당시 28세) 후보였다.

작은 정당의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한계를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가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

-어떻게 결국 정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나. “서울 마포구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쪽방촌 프로젝트를 했다. 쪽방촌 어르신들과 어울려 사는 프로젝트였다. 내 친구, 마을 사람들과 재미있게 사는 게 행복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망원동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그 사람들이 모두 ‘적법하게’ 쫓겨났다. 구제시스템이 없었다. 개인이 행복하게 살고 싶어도 법이 그렇게 놔두지 않더라. 나와 내 주변이 행복하려면 제도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정치인으로 성장하려면 정당에 속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정당이 있는 게 좋다. 하지만 현존하는 정당이 새로운 미래를 열 정당인가? 물음표다. 민주화 세대는 기득정당, 소수정당, 보수정당 진보정당 할 것 없이 포진해 있다. 민주화 세대가 주도권을 쥔 정당에서 결과는 정해져 있고 민주적으로 연출된 판만 있다. 어떤 정치인으로 성장할 것이냐를 생각했을 때, 기존에 있는 정당을 선택하는 것보단 우리 세대에 맞는 정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당장 다음 보궐선거도 준비하고 있나. “공동전선을 만들어야 하고, 그를 위한 ‘영끌’이 필요하다. 원팀을 만들어서 이길 수 있는 제4지대를 만들어보고 싶다. 어떤 정당과 단체, 개인이 함께할 수 있는가? 일단 위성정당 사태와 같은 편법·위법은 안 된다. 그리고 박원순·오거돈 사건을 규명하고 해결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번 재보선에서 ‘영끌’하지 않으면 결국 민주당 서울시장이 나올 것이다. 민주당 서울시장이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까. 이번 보궐선거가 왜 열리는지 기억해야 한다.”

-정치를 계속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시간을 초월하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정치는 인류가 마라톤을 뛰고 있는 것과 같다. 다음 세대가 조금 더 낫게 살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서 지금의 우리가 있다. 내가 죽더라도 나와 같은 열망을 가진 사람이 뒤를 이어서 뛰어주는 게 정치라고 생각한다.”

글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사진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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