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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IT과학칼럼] 불가진천 증빙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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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충북 진천에서 충주 방향으로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달리면서도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세 시간 전에 전원 풍경을 보며 가던 때와는 달리 억지로 끌려가는 느낌은 참담한 자괴감이었다.




두어 해 전의 기억이다. 몇몇 회사와 대학이 모여 정부 지원 연구개발사업으로 친환경 제품 개발을 진행하던 중 현장 점검을 위해 회의를 하게 됐다. 실험을 진행하는 박사과정의 두 학생과 함께 충주에 있는 산업체를 찾아갔다.

청주, 진천을 거쳐 외딴 충주의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에 도착했다. 현장 생산 과정을 보며 열띤 토론까지 진행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공장 문을 나섰다.

다음 일정에 맞춰 바삐 이동하는 승용차 뒷자리에서 곧 있을 회의 준비 자료를 검토하던 중 차는 작은 마을의 가게 앞에 섰다. “교수님, 물 좀 사겠습니다.” “응? 그래….” 출장갈 때면 언젠가부터 출장 증빙을 위해 출장지에서 생수 한 병을 사고 그 영수증을 출장 증빙으로 내는 것이 관례가 된 생경한 장면이 이제 몸이 익을 때도 됐건만 못마땅한 마음을 억누르고 눈은 서류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학생들은 마트에 들러 물을 세 병 사 들고 급히 차에 올라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다음 회의에 맞춰 가기에 시간이 빠듯한 터였다.

물 한 병당 영수증 하나씩 챙겨든 학생이 갑자기 머뭇거리는 낌새다. “OO씨, 저 ….” 실험실 연구비 회계 업무를 도와주는 직원과 통화하며 진천, 충주에 대해 몇 마디 나누는 듯했다. 그리고는 “교수님, 죄송하지만 아까 거기를 다시 갔다와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일정 때문에 마음은 급했지만 짐짓 태연한 척하며 “어, 그래? 왜?” 그러는 사이 차는 오던 길로 되돌아 시원한 자동차전용도로로 들어섰다. “사실은 영수증에 주소가 진천이고 우리 출장지는 충주라서 충주 주소로 된 영수증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돌아갈 것까지는 없다. 설명이 필요하면 내가 책임지고 소명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서 학교로 돌아가자.” “… 이미 고속화도로로 들어와서 돌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냥 가겠습니다. 사소한 일로 교수님 나중에 고생하실 줄 모르니 잠깐만 참아주십시오. 제가 빨리 운전하겠습니다.” “어허…! 알았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늦더라도 무리해서 운전하지는 말자.”

차는 오늘 현장 점검회의를 했던 농공단지 앞을 지나 한참을 더 달렸다. 고속화국도변에 식당들은 있는데 생수를 살 만한 가게는 없었다.

몇 ㎞를 더 가서 자그마한 가게가 보였다. 다시 생수 3병을 사서 차로 돌아온 학생이 불만 반 만족 반의 표정으로 한숨을 쉰다. “허참! 별일로 고생한다. 수고했다.” 뒤돌아 달리고 돌아온 시간만 해도 족히 20분은 될 것 같았다.

스티븐 코비는 ‘원칙 중심의 리더십’에서 조직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가도록 잘 정렬되려면 지도자의 권한분산과 이를 위한 신뢰관계가 중요하며, 이 기저에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 그리고 각 구성원 간의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믿음이 무너지면 모두를 괴롭혀서 부작용을 막으려 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믿음을 잃었는가? 잘못된 관행이나 희귀한 일탈을 막는 것은 별도로 하고 선량한 과학기술자를 믿고 연구에 전념하도록 밀어주는 성숙한 조직과 문화적인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작은 퇴행적 규제부터 없애야 한다.

배충식 KAIST 공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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