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 유학생, 밀라노 여행 중 트램에 치여 사망
유족, 진상 규명 원하나 현지공관 대응에 아쉬움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한 장면. [연합뉴스 자료사진] |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2013년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프랑스 오를리 공항에서 마약사범으로 오인당해 체포된 뒤 2년간 옥살이를 한 평범한 가정주부 장미정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에서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은 자국민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고 현지 사법당국과 마찬가지로 장 씨를 범죄자 취급하며 박대해 국민적 분노를 자극했다.
영화 개봉 뒤 외교부에는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장 씨도 언론 인터뷰에서 재외공관으로부터 영사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서운함을 표출했다.
당시 외교부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민 분노의 기저에는 재외공관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제역할을 하고 있냐는 질책이 깔려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본격적으로 확산하기 직전인 지난 2월 중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21살 나이의 한국 유학생이 트램(노면전차)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있었다.
영국 유학 중 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여행 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탈리아 현지 경찰은 이 사고를 '기관사가 예상하기 어려운 사고였다'며 유학생의 100% 과실로 판단, 법원에 수사 종결을 요청해 유족의 반발을 샀다.
유족은 지난달 '기관사가 전방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이 있다'며 재수사 요청서를 법원에 보냈다.
외교부 청사. [서울=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는 '이탈리아서 韓유학생 사망사건 수사종결에 유족 "부실수사" 탄원'(2020년 10월 7일)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 과정 전반을 다뤘다.
여기서 관할 공관인 주밀라노 총영사관이 유족 입장을 헤아려 영사 조력을 충분히 제공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사고 진상 규명 노력 여부다.
이 사고는 인적이 드문 자정 무렵에 발생한데다 사고 특성상 확실한 목격자를 찾기도 어렵다. 아울러 피해자는 세상을 떠난 상황이라 사고 경위 조사에서 기관사의 진술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유족이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물증은 기관실에 설치된 CCTV 영상이다. 트램 진행 방향의 정면을 바라보는 CCTV가 객관적인 진술을 해줄 수 있으리라 유족은 기대했다.
그런데 총영사관은 CCTV 영상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공관 측은 현지 법 규정상 제삼자가 CCTV 영상을 입수할 수 없다는 해명을 내놨다. 법으로 막아놨는데 수사기관이나 변호인에게 자료를 달라고 무리하게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현지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당사자인 유족이 동의한다는 전제 아래 유족을 통해서는 제삼자도 사고 관련 증거물 또는 기록을 입수·열람할 수 있게 돼 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운행되는 트램. [EPA=연합뉴스 자료사진] |
유족과의 소통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총영사관은 사고 피해자의 장례 절차가 마무리된 이후 유족이 진상 규명에 목말라하는 와중에도 전혀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이는 공관 측도 인정하는 바다.
사고가 발생한 배경이나 현장 상황에 따라 사고의 귀책 사유가 어느 쪽에 있는지 판단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외국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 자국민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자체 판단이 어떠하든 일단 귀를 기울이는 게 재외국민 보호의 책무를 지닌 공관의 기본적인 역할이다.
재수사 결정을 끌어내고자 고군분투하는 담당 변호사는 이에 대해 "정말 그랬냐"고 반문하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고, 유족은 "관할 지역에서 자국민이 사고로 숨졌는데도 공관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7일 이 사건과 관련해 밀라노 총영사관의 영사 조력이 적절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취지의 기사가 나가자 외교부는 곧바로 반박 자료를 냈다.
사고 신고를 접수한 담당 영사가 병원 응급실에 나가 경위를 파악하고 유족에게 이를 알리는 한편 장례 절차 관련 전반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유족이 밀라노 현지 법원에 송부한 재수사 요청서. [유족 제공. DB 저장 및 재배포 금지] |
외교부가 다섯 문단에 걸쳐 해명한 사항은 공관의 사건·사고 처리 매뉴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마저 하지 않았다면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 가족이 강하게 억울함을 호소하는데도 정해진 매뉴얼 그 이상의 진정성 있는 재외 국민 보호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밀라노 총영사관은 유족이 원하는 사고의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유족의 입장을 귀담아들으려 하지도 않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국 외교계의 원로 박수길(87) 전 유엔 대사는 2014년 출간한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외교 이야기'라는 저서에서 "해외 영사의 첫 번째 임무는 국민 보호"라면서 "요청이 따로 없어도 선임되는 국선변호인처럼 주재국의 모든 교민과 현지 여행객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고 썼다.
외교관은 주재국에서 한국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 국민의 국선변호인이라는 게 박 전 대사가 쓴 글의 요지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 개봉된 2013년으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국력은 한층 커졌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국민이 재외공관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만큼 개선된 것 같지 않다. '해외 공관에서 문전박대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식의 자괴감 섞인 관련 기사 댓글을 곱씹어봐야 할 이유다.
유족은 외교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최근 국민권익위원회에 고충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숨진 학생의 친구들도 한국과 영국 등에서 밀라노 사고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여론 조성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가 물러나 있는 사이 국민이 직접 움직이고 있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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