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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건희 별세] 21년간 혹독한 경영수업… 일류 반도체 기업 일군 '구루(gu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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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간 경쟁 거쳐 회장 취임…‘신경영’ 통해 글로벌 기업 일궈
모두 만류하는 반도체 사업 진출 위해 사재 출연…美·日 기업 제쳐

1987년 12월 1일 아버지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은 21년 동안 아버지로부터 혹독한 경영 수업을 받았다. 형제 간 경쟁을 거쳐 1978년 삼성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그는 회장실 바로 옆 방에 대기하면서 아버지를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매일 용인에 있는 아버지 숙소로 가서 취침을 확인한 후 귀가했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변모시켰다. 취임 당시 10조원이었던 매출액은 2018년 387조원으로, 이익은 2000억원에서 72조원으로 늘었다. 올해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달러로, 글로벌 5위를 차지했고 스마트폰, TV, 메모리반도체 등 20개 품목에서 ‘세계 최고’ 상품을 기록하는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했다.

삼성의 규모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이 선진 경영 시스템을 도입하고 도전과 활력이 넘치는 기업 문화를 만들어 경영 체질을 강화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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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삼성 반도체 30년을 맞아 기념서명을 하는 이건희 회장. /조선일보DB



이 회장은 경영 방침은 1993년 삼성 ‘신경영’을 통해 구체화됐다. 당시 이 회장의 활발한 대외 활동이 글로벌 삼성을 만든 밑거름이 됐다.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미국 LA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 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면서 3개월 동안 A4용지 8500쪽 분량의 말을 쏟아냈다. 신경영 철학의 핵심은 최고의 품질과 최상의 경쟁력을 갖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 인류사회에 공헌하는 세계 초일류기업이 되자는 것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인재 육성과 함께 기술 경쟁력을 핵심으로 여겼다. 그 중 반도체 산업이 한국인의 문화적 특성에 부합하며, 한국과 세계경제의 미래에 필수적인 산업이라 판단하고 1974년 불모지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반도체사업에 착수했다.

1970년대 초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다고 하자, 당장 "미국, 일본과 같은 선발주자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투자 과잉에다 기술자가 없습니다"라는 반응이 나왔다. 사업성이 없다는 판단이 대부분이었고 측근들은 이건희 회장을 만류했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사재(私財) 출연을 결심하며 반도체 사업을 고집했고, 당시 회장이었던 부친 고 이병철 회장을 설득해 반도체 사업에 도전장을 냈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삼성 반도체의 ‘불패 신화’로 이어졌다.



◆ 모두가 만류할 때 사재까지 털어 반도체 사업 진출

삼성이 반도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74년 12월이다. 당시 삼성은 경영난에 시달리던 국내 최초 반도체 원판 가공회사 한국반도체를 인수했지만, 인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룹 중추인 비서실은 사업성이 없다고 판단했고, 이병철 회장 역시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인수를 밀어붙인 건 당시 중앙일보 이사였던 이건희 회장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반도체를 주식회사, 원자력과 함께 인류 3대 발명품으로 꼽으며 관심을 보였다. 더 진출을 미루면 미국과 일본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길현 전 신라호텔 사장은 ‘삼성 60년사’에서 "당시 이건희 이사는 이미 반도체를 깊숙이 공부하고 있었다. 마쓰시타, 도시바, NEC 등 일본 전자회사 기술자들을 자주 만났고, 단독 세계여행을 통해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며 자료를 모았다"라고 회고했다.

이건희 회장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보았다. 1981년 컬러TV용 색신호 직접회로(IC)를 개발하면서 초고밀도 직접회로(VLSI) 기술 개발의 토대를 마련했다. 자신감을 얻은 삼성은 1983년 삼성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다. 이른바 ‘도쿄선언’이라고 불리는 반도체 사업 첫 걸음을 뗀 것이다.

◆ "2등은 의미 없다"…빠르고 과감한 투자

이건희 회장은 "투자시기가 6개월만 늦어도 몇천억원의 이익을 날려 버리는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며 "선두기업만이 이득을 챙기는 업종 특성상 2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선두 기업과의 기술 격차를 얼마나 빨리 줄이느냐가 관건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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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삼성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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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연구개발과(R&D)와 생산을 모으는 ‘복합화’가 핵심이라고 보고 1983년 기흥 복합화 단지를 준공했다. 그는 직접 정부를 찾아가 기흥 사업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삼성은 6개월 만에 기흥 공장을 완공했고, 일본이 6년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미국과 일본 반도체 전문가들을 충격에 빠뜨린 속도였다. 다음해에는 256K D램, 1986년 1M D램, 1988년 4M D램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당시엔 크게 늘어난 용량을 칩에 어떻게 담는지가 기술력의 핵심이었다. 방법은 위로 쌓아올리는 ‘스택’, 아래로 파고 내려가는 ‘트렌치’ 두 가지가 있었다. 대부분 기업은 트렌치 방식을 채택해 표준으로 삼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생각이 달랐다.

"단순하게 생각합시다. 지하로 파는 것보다 쌓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이건희 회장의 생각이 반도체 시장을 바꾸었다. 트렌치 방식을 선택한 기업은 갈수록 복잡해지는 기술을 감당하지 못했고, 생산성이 저하되는 실패를 맛봤다. 반면 삼성은 1989년 16M D램을 잇달아 개발한 데 이어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M D램을 개발해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삼성은 64M D램의 성공에 이어 1993년에는 8인치 웨이퍼 시대를 열었다. 일본 회사보다 6개월을 앞서나간 기술이었고, 일본이 삼성을 뒤 쫓기 시작했다. 8인치 웨이퍼는 6인치보다 생산성은 높았지만, 공정이 복잡하고 수율을 확보하기도 어려웠다. 그만큼 기술적인 한계와 위험요소가 컸지만, 이 회장은 과감하게 웨이퍼에 투자했다.

"고심 끝에 8인치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1조원 이상의 손실이 예상되는 만큼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 1위로 발돋움하려면 그때가 적기라고 생각했고, 월반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술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리라고 판단했다" 이건희 회장은 에세이에서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잘나가던’ D램에서 사업을 다각화해야겠다는 결정도 이런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2000년 초 D램 의존도를 줄이고 낸드플래시 시장을 확대하기로 한 것. 이 회장은 독자적으로 낸드플래시 시장 개척에 나섰고, 1년 뒤인 세계 최고 집적도를 가진 1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면서 낸드플래시 세계 1위에 올랐다.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2011년 경기도 화성공장에 11조원을 쏟아 부었다. 1위 자리를 굳히기 위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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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 참석한 이건희(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이 권오현 DS사업총괄사장으로부터 반도체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일보DB



◆ "불량은 암(癌)"…최고 품질을 향한 노력

물론 삼성의 사업이 늘 성장가도만 달렸던 것은 아니다. 무선전화기 사업부에서 품질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완제품을 생산하면서 제품 불량률이 11.8%까지 올라가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불량은 암(癌)"이라고 했던 지적에도 문제가 지속되자 이건희 회장은 ‘제품 화형식’이라는 충격 요법을 썼다.

1995년 1월 이건희 회장은 품질사고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하면서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는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 수거된 제품을 소각함으로써 임직원들의 불량의식도 함께 불태울 것을 제안했다. 15만대, 150여억원 어치의 제품이 수거돼 화형식을 통해 전량 폐기 처분됐다.

자기가 만든 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며 임직원들은 눈물을 훔쳐야 했지만 이를 계기로 ‘불량은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 가슴 속에 자리를 잡았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 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그룹 전체에 확산됐다.

연선옥 기자(actor@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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