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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정부 VS 의료계 첨예한 대립

20년 전 전철 밟은 의료계 파업…'원점 재검토'의 데자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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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의약분업 당시 의료계 파업과 판박이
정책반대→전공의파업→의료공백→원점검토
한국일보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집단휴진을 중단하고 7일 의료현장에 복귀할 가능성이 높아진 가운데 6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전공의협의회 사무실에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6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이날 투쟁 수위를 1단계(전공의 복귀, 학생 복귀, 1인 시위만 진행)로 낮추고 7일 사실상 현장에 복귀한다는 계획이다. 2020.9.6/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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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 집단휴진은 20년 전 의약분업 사태로 촉발된 의료계 첫 파업 때와 비슷한 양상을 띈다. 정부 정책 철회를 외치는 의사들의 반발, 그리고 이에 따른 현장 전공의들의 파업 가세, 의료공백이 심화되며 결국 정부가 정책의 원점 재논의를 약속하며 마무리 된 수순이 판박이처럼 닮았다.

의료계는 1999년 12월 '처방은 의사가, 조제는 약사가' 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약사법 개정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의권을 침해당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듬해 2월에는 정부 정책 철회를 외치며 사상 첫 파업에 돌입했고, 같은 해 6월부터 전공의(인턴ㆍ레지던트)들이 본격 가세하며 규모를 키웠다. 전공의들은 병동을 돌며 간단한 시술을 하는 것은 물론 수술방에서 교수를 보조하기도 하는 대형병원 핵심인력이다. 당시에도 이들이 진료현장에서 빠지면 대부분의 진료와 수술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정부도 강하게 맞섰다. 파업을 이끈 김재정 대한의사협회(의협) 전 회장을 고발했고, 파업에 동참한 의사들에 업무개시명령을 내렸다. 당시 대구시의사회 부회장은 검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 예상과 달리 의료계는 도리어 더 강하게 파업을 밀어붙였고, 마지못한 정부가 당정협의를 통해 '의약분업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부가 예정대로 7월 1일부터 의약분업 제도를 시행하고, 김 전 회장이 구속되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특히 김 전 회장의 구속은 활활 타오르던 의료계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의료계는 김 전 회장 구속 직후 90% 이상의 찬성으로 또 다시 총파업을 결의했다. 전공의들의 파업이 계속되던 와중에 전임의(펠로우)들과 개원의에 이어 교수들까지 동참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실상 국내 의료가 마비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실제 당시 대형병원 곳곳에서 환자와 병원 관계자들의 실랑이가 줄이었고, 진료를 제 때 받지 못한 환자들의 원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국일보

서울의대생들과 가천의대생들이 2000년 6월21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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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정부는 한 달 여 만에 △개정약사법 시행에 필요한 하위법령 개정은 물론 △저수가ㆍ저급여로 인한 의료기관의 적자 구조 해소 △전공의 처우 및 근무환경 개선에 더해 △의과대학 정원 10% 감축ㆍ동결 카드까지 꺼내 들었다. 사실상 의료계가 원하는 모든 걸 내어주며 백기투항 한 셈이다. 이에 더해 9월 21일 김대중 대통령이 "정부가 (의약분업에 대해) 조금 안이한 판단을 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면서 정부와 의료계 갈등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파업 9개월여만에 대화가 시작된 것이다.

수 차례 걸친 협의 끝에 의료계는 2000년 11월 정부와 합의에 이르렀고, 12월 최종 서명했다. 의약분업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전체 주사제의 15%를 차지하는 일반 주사제를 의약분업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자신들이 원하는 대부분을 관철시켰다. 의대정원도 2002년 351명을 감축한 뒤 동결됐다.

이후로 2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매년 400명씩 10년간 총 4,000명의 의대생을 더 뽑아 지방의사를 확충하고, 공공의료 등을 보강하겠다는 정부 정책에 반기를 든 의료계는 또 다시 환자의 목숨을 볼모로 한 투쟁에 나섰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과 고발조치에 도리어 파업의지를 더욱 불태운 것도 20년 전과 닮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화하겠다"는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며 파업을 강행한 점도, 국회까지 찾아가 결국 그토록 원했던 '정책 원점 재검토'를 이끌어낸 것도 마치 20년 전 데자뷔를 보는 것 같다.

의정 합의서 서명(4일) 이후에도 이틀여 동안 '정책 철회'가 아니라는 이유로 전공의 80%가 진료현장 복귀를 거부했던 점, 그리고 파업 기간이 20일 이내에 그쳤다는 사실 정도가 1년여를 끌었던 2000년 파업 때와 다른 점이다.

앞서 2000년 10월 당시 2세였던 박모군은 장중첩증으로 지방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에 실려갔지만, 해당 병원 전공의들이 모두 파업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제 때 수술 받지 못하고 2시간 정도 떨어진 타 병원으로 전원됐다. 당시 이 대형병원에 의사는 소아과 과장 A씨가 유일했다. 박군은 수술을 받긴 했지만 처치가 늦어진 탓에 난치성 간질, 우측 편마비, 언어장애 등을 앓게 됐다. 장중첩증은 적절한 시기에 수술해 꼬인 장을 풀어주면 아무 문제 없이 정상으로 회복 가능한 병이다. 이후 박군 가족들이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끝에 7억여원의 손해배상을 받았지만 박군은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심화되면서 사실상 긴급 봉합에 그친 이번 집단휴진 사건을 마치며 의정 모두 20년 전 이 사건을 돌이켜봐야 할 것이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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