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외관상 성행위 동의했어도, 성적 피해 가능성 있다”…‘n번방 이후’ 두 여성 대법관의 의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아동·청소년에 대한 ‘위계 간음죄’에서 위계의 의미를 확장한 27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핵심은 아동·청소년이 설령 성관계에 동의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진정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행사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한 데 있다. 특히 민유숙·노정희 대법관은 이번 판결에서 별도의 보충의견으로 “아동·청소년을 성착취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대상은 36세 A씨가 자신이 고등학생인 것처럼 속인 뒤 ‘스토킹하는 여자를 떼어내려면 내 선배와 성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해 14세 피해자의 승낙을 받아내고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A씨에게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상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적용됐다.

대법원은 2001년 위계란 행위자가 간음의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오인·착각·부지를 일으키고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해 간음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면서, 오인·착각·부지란 ‘간음행위 자체’에 대한 것으로 제한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즉 피해자가 성관계가 이뤄진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거나 착오한 경우에만 위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피해자의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판단 능력이 떨어져 성관계의 의미를 모르는 경우, 가해자가 치료·종교의식을 빙자해 성관계 자체를 속인 경우 등에만 위계에 의한 간음죄가 인정됐다. 성인 남성이 아동·청소년에게 돈 등 대가 제공으로 꼬드겨 성관계를 맺었더라도 법원은 “아동·청소년이 사리판단력이 있는 상태에서 성관계 제의를 승낙했다”면서 무죄를 선고해왔다.

경향신문

민유숙 대법관(왼쪽)과 노정희 대법관(오른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번에 대법원은 기존 입장을 바꿔 아동·청소년이 성관계에 동의했거나, 동의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성관계로 이어지는 과정에 속임이 있었다면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민유숙·노정희 대법관의 보충의견에는 왜 위계의 의미 해석을 넓혀야 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더 상세히 담겨있다.

두 대법관은 먼저 13~15세 아동·청소년의 성을 보호하는 규정의 변화에 주목했다. 아동·청소년의 ‘궁박한 상태를 이용해’ 간음·추행한 행위를 처벌하도록 청소년성보호법이 지난해 1월 개정됐다. 올해 5월에는 간음·추행하면 ‘수단의 강제성 유무 및 정도를 묻지 않고’ 처벌하도록 형법이 개정됐다. 법은 아동·청소년 성폭력을 엄히 처벌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왔고, 만약 A씨가 현행법 적용을 받았다면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텔레그램을 통해 성착취물을 제작·배포한 n번방 사건에서 보듯, 아동·청소년 성폭력은 더 교묘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두 대법관은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아동·청소년은 성행위 및 그 상대방을 선택하는 사회규범과 성행위의 상호반응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 어렵다”고 했다. n번방 사건 이후 그루밍(신뢰관계를 형성해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을 통해 피해자가 스스로 성착취하도록 만드는 행위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위계의 의미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하는 것은 진화하는 아동·청소년 성폭력의 모습과 맞지 않고, 피해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게 두 대법관의 의견이다.

두 대법관은 “(아동·청소년은) 폭행·협박이나 위계·위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개입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성행위에 응하는 경우가 있고, 그 결과 자신을 착취하고 학대하며 해를 끼치는 성행위의 대상이 된다”며 “이들의 성적 관계맺기와 의사결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령 성행위에 동의한 듯이 보이더라도 착취적이고 학대적인 성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아동·청소년을 위한 법적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경향신문

지난 6월11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사이버 성폭력 대응센터, n번방에 분노한 사람들 등 텔레그램 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문 앞에서 ‘우리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는 피해가 남들에게 알려지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피해가 범죄인지 아닌지 분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고를 포기하는 현실도 두 대법관은 짚었다. 두 대법관은 “강제력 행사의 태양(모습)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외관상 성행위에 동의했다는 사정만으로 이들의 성적 피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며 “아동ㆍ청소년이 성매매에 나섰다가 오히려 이를 빌미로 협박 등을 당해 또 다른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를 차단할 필요도 있다”고 했다.

두 대법관은 나아가 “16세 미만자의 성행위는 형식적으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를 존중한다는 측면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보호돼야 할 성이 침해됐는지 여부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아동·청소년은 특별히 보호해야 될 존재라는 이유에서다.

‘성착취’라는 단어가 대법원 판결에 적시된 것은 외부에 공개된 판결문 기준으로 이번이 처음으로 보인다. 민·노 대법관은 법원 내 젠더법연구회 회장을 했다.

이번 판결은 사건이 발생한 지 6년, 대법원에 사건이 올라온 지 5년 만에 나왔다.

이덕인 부산과기대 교수는 2016년 대법원 형사실무연구회 연구발표회에서 A씨 사건을 분석한 적이 있다. 당시 이 교수는 성관계를 하겠다는 아동·청소년의 의사결정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의 기망도 위계라고 봐야 한다면서 법원이 위계에 대한 해석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대법원 판결 선고 후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고,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가벼운 접근과 그루밍을 통한 성폭력이 물리적인 폭력이나 협박을 가하는 것보다도 심각한 상황이 될 수 있지만, (그동안에는) 일반 범죄에서의 위계 개념을 성폭력에 적용하면 무죄가 나왔던 상황”이라며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의 경우 강간죄 적용이 안되더라도 위계에 의한 간음죄로도 충분히 형사처벌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길을 열었다고 본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