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핀란드 대통령 통해 푸틴에 이송 요청…사실상 EU의 압박
독, 인도주의 수호 이미지·러시아 견제…크렘린, 나발니 독 체류 장기화시 이득
독·러, 여러 현안 갈등 속 천연가스관 사업으로 협력
지난 22일 베를린 샤리테병원에 도착한 나발니 [AFP=연합뉴스] |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은 왜 독극물 중독 의심 증상을 보인 러시아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데려왔을까. 러시아는 왜 독일 의료진의 '독극물 중독 진단' 가능성이 있는데도 이송을 허락했을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대표적인 정적인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의심 사건은 벨라루스 시위 사태를 놓고 러시아의 개입 여부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일어났다.
독일과 러시아 간에 냉랭한 기운이 강해진 시점이기도 했다. 독일은 연방의회 해킹사건과 지난해 베를린에서 발생한 조지아인 살인 사건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해왔다.
독일은 나발니가 러시아 국내선 항공기에서 갑자기 의식불명에 빠진 당일부터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발니는 지난 20일 오전 쓰러져 시베리아의 옴스크 구급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일 오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프랑스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나발니 측의 요청 시 데려와 치료를 해주겠다면서 사건 경위가 투명하게 규명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인 독일과 프랑스 정상의 이런 요청은 사실상 EU의 압박인 셈이다.
그리고 마치 입을 맞춘 듯 독일의 시민단체 '시네마평화재단'은 당일 심야 시간에 나발니를 데려오기 위한 의료용 항공기를 뉘른베르크 공항에서 출발시켰다.
나발니의 가족은 메르켈 총리가 내건 조건에 화답하듯 푸틴 대통령에게 나발니의 이송을 요청했다.
특히 핀란드 Yle 방송을 인용한 독일 언론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이 과정에서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을 중재자로 내세웠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나발니의 독일 이송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발니 입원 중인 샤리테 병원 앞 지키는 독일 경찰 [EPA=연합뉴스] |
이에 니니스퇴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협조를 구했고, 푸틴 대통령은 이송에 정치적인 장애물이 없다고 응답했다.
옴스크 구급병원은 나발니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며 이송을 거부했지만, 항공기에 타고 온 독일 의료진이 나발니를 살펴본 후 이송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자 허용했다.
나발니 측은 옴스크 구급병원이 독일 의료진의 소견 전에 이송을 거부한 것에 대해 체내에 남은 독극물 흔적이 사라질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독일과 러시아는 동서독 분단기인 냉전시대에도 특수한 관계였다. 옛 동독은 옛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이 때문에 옛 서독의 평화·교류 및 통일정책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설득해야 할 대상이 소련이었다.
독일 통일 이후 소련군이 철수한 데 이어 소련이 해체됐지만, 이후에도 사실상 러시아는 독일의 주적이었다. 소련군의 철군에도 미군이 계속 독일에 주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체제적으로도 독일은 푸틴 체제의 러시아를 전체주의 국가로 보고 있다.
더구나 러시아가 크림반도 병합 등의 팽창정책을 밀고 나가자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의 불안감은 커졌고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로 이어졌다. 독일이 제재에 앞장선 것은 물론이다.
여기에 독일은 러시아가 가짜뉴스를 양산해 독일 극우세력을 지원한다는 의심을 키워온 데다, 연방의회 해킹 및 조지아인 살인 사건으로 양국 간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미국이 국제적으로 자유세계에서 제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독일은 나발니의 이송으로 자유세계와 인도주의의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은 26일 오피니언에서 이번 사건을 푸틴 대통령의 정적들을 상대로 그동안 발생해온 독극물 공격 사건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보며 "세계가 그런 공격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독일 샤리테 병원에 도착한 나발니 부인(왼쪽) [EPA=연합뉴스] |
독일 언론에서는 러시아를 상대로 명확한 행동을 통해 러시아와 관련된 문제에서 견제를 강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러시아의 입장에서도 나발니의 이송을 허락한 것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분석이 있다.
일간 디벨트는 25일 기사에서 러시아가 서구 세계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피해자가 됐다며 반응할 수 있기 때문에 잃을 게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탓인지 나발니의 독극물 중독 가능성을 시사한 독일 측 발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박을 놓고 디벨트는 "프로그램된 갈등"이라고 평가했다.
더구나 나발니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독일에 계속 머무를 경우 러시아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크렘린에는 이로울 수 있다는 관측이 독일 언론에서 나온다.
나발니 사건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커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독일과 러시아는 갈등을 빚어오면서도 중동 분쟁과 경제적인 문제에서 협력 관계를 보여오기도 했다.
특히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저 천연가스관 건설 사업인 '노르트 스트림2'를 놓고 미국이 경제제재 등을 엄포하는 상황에서 양국은 공동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냉전시대에도 서독은 동맹국인 미국 편을 들어 소련에 대응하는 전선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스크바와 다각도의 외교를 통해 동독과의 평화·교류 정책인 신동방정책을 이어갔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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