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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故고유민 선수 사망사건

‘악용’ 임의탈퇴 제도, ‘고유민법’이 필요하다 [발리볼 비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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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애 마지막 경기가 된 2월 15일 안방 경기에 출전 중인 고유민.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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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달 31일 세상을 떠난 고유민(향년 25세) 유가족과 프로배구 여자부 팀 현대건설이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다.

유가족 법률 대리를 맡은 박지훈 변호사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건설은 고 선수에게 트레이드를 시켜주겠다며 계약해지 합의서를 쓰게 한 뒤 잔여 연봉을 지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것도 모자라 고 선수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임의탈퇴 선수로 묶어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게 손발을 묶어놨다”며 “계약을 해지하면 고 선수는 자유계약선수(FA)다. FA는 임의탈퇴 처리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고 선수는 자신의 임의탈퇴 소식을 접한 뒤 가족, 지인, 동료들에게 구단에 속았다며 배신감과 절망감을 토로했다”며 “(이는) 사상 초유의 선수를 상대로 한 대기업 구단의 사기”라고 비판했다.

도대체 임의탈퇴가 무엇이기에 선수에게 이렇게 배신감과 절망감을 안겨줬던 걸까.

■ 임의탈퇴란 무엇일까

임의탈퇴는 임의(任意)와 탈퇴(脫退)를 합친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자를 봐서는 이 낱말이 뜻하는 내용을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원래 이 말은 ‘Voluntary Retirement’를 번역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자발적인 은퇴’가 바로 임의탈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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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에서 인종차별 벽을 무너뜨린 재키 로빈슨이 뉴욕(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단주에게 보낸 은퇴 편지. 자신을 ‘임의탈퇴 선수 명단(the voluntary retirement list)’에 포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야구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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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Voluntary Retirement’를 ‘닌이인타이’(任意引退·임의은퇴)로 번역했고,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은퇴(引退)가 탈퇴로 바뀌어 임의탈퇴가 됐다.

사실 우리가 흔히 아는 임의탈퇴 개념은 반대다. 구단에서 선수를 강제적으로 은퇴시키는 행위가 임의탈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껏 선수를 타의로 ‘자진 은퇴’ 시키는 광경을 여러 차례 목격한 셈이다.

임의탈퇴는 어쩌다 이렇게 정반대 뜻이 된 걸까? 혹시 영어 ‘Voluntary’와 일본어 ‘닌이’(任意) 사이에 뜻 차이가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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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 쓰요시는 만 47세에 프로야구 선수로 복귀하겠다며 지난해 11월 자신을 임의탈퇴 선수 명단에서 제외해 달라고 니혼햄 구단에 요청했다. 사진은 2006년 10월 26일 은퇴 경기 모습. 아사히(朝日)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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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어 사전 ‘고지엔(鑛辭苑)’에 따르면 닌이(任意) 역시 ‘마음먹은 대로 맡기는 것’(思いのままにまかせること), ‘그 사람의 자유의사에 맡기는 것’(その人の自由意志にまかせるこ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임의탈퇴에 ‘강제’라는 뉘앙스가 따라다니는 건 제도적 특징 때문이다.

만약 ‘이제 운동을 그만하겠습니다’하고 팀을 떠난 선수가 자기 마음대로 다른 팀에 입단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선수단 관리라는 게 무색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퇴 선수에게 ‘저는 진짜 은퇴를 합니다. (구단 동의 없이는) 다른 팀에서 뛰지 않겠습니다’고 약속을 받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그 뒤 이를 역이용해 선수를 임의탈퇴 처리한 뒤 다른 팀에서 뛰지 못하도록 하는 강제하는 팀도 생기게 됐다. 이제는 오히려 이쪽이 대세다. 그런 이유로 임의탈퇴는 사실상 징계가 됐다.

■ 임의탈퇴는 얼마나 무거운 징계일까

그래도 ‘자발적인 은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각 리그는 보통 임의탈퇴 제도를 선수 은퇴와 관련해 다룬다.

예를 들어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약은 어떤 선수가 임의탈퇴선수로 신분이 바뀌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1. 선수가 참가활동기간 또는 보류기간 중 선수계약의 해지를 소속구단에 신청하고 구단이 이를 승낙함으로써 선수계약이 해지 된 경우

2. 선수가 선수계약의 존속 또는 갱신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인정되어 구단이 선수계약을 해지한 경우

3. 제59조 제2항 제1호에 의하여 보류기간이 종료한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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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현대건설 선수가 공을 든 채 서브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배구연맹(KOV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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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국배구연맹(KOVO) 규정은 그렇지 않다. KOVO 규약은 임의탈퇴 선수와 은퇴 선수를 따로따로 구분한다.

제52조 (임의탈퇴 선수)① 임의 탈퇴선수는 선수가 계약 및 제반 규정을 위반 또는 이행하지 않아 계약의 유지를 희망하지 않는다고 인정될 경우에 구단이 복귀조건부로 임의탈퇴선수로 지정할 것을 요청하여 총재가 이를 공시한 선수를 말한다.

② 임의탈퇴 선수는 공시일로부터 선수로서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며, 복귀할 때까지의 연봉은 지급하지 않는다.

제53조 (은퇴 선수)은퇴 선수는 선수 본인이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하는 선수를 말하며, 계약이 만료되지 않은 선수가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계약해지를 원하는 경우 구단이 연맹에 은퇴동의서를 제출한 후 은퇴선수로 접수한다. 단, 은퇴선수로 접수 시 연맹은 자유신분선수로 전환하여 공시하며,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선수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요컨대 임의탈퇴 제도를 징계용으로 못 박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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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26일 임의탈퇴 선수 공시 이후 1년 4개월 가까이 지난 이달 8월 14일 복귀 절차를 밟게 된 프로야구 SK 강승호.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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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프로야구와 비교하면 프로배구 쪽이 훨씬 빨리 복귀할 수 있다. KBO 규약 제66조에 따라 프로야구에서는 임의탈퇴 공시 이후 최소 1년이 지나야 복귀가 가능하지만 KOVO 선수등록규정 제15조②에 따라 프로배구에서는 1개월만 지나면 다시 코트로 돌아올 수 있다.

현대건설 요청에 따라 KOVO에서 고유민을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한 건 5월 1일이었다. 따라서 6월 1일이 지나면 고유민은 현대건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현대건설은 “6월 15일 고인과 미팅을 하며 향후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고인은 배구가 아닌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사가 확고해 배구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주장한다. 임의탈퇴를 해지할 의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임의탈퇴 해지 후 한국전력으로 팀을 옮겼던 전 삼성화재 정준혁 사례에서 보듯 임의탈퇴 선수 지정이 반드시 ‘트레이드를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일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 계약을 해지하면 임의탈퇴가 불가능할까

고유민이 팀을 떠난 건 2월 29일이었다. 이때 고유민이 팀에 아무 감정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터다. 유가족에게 심심한 위로 말씀을 전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팀을 떠난 행위가 계약 위반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리고 KOVO 규정에 따라 구단은 계약을 위반한 선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지정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건설에서 처음부터 고유민을 임의탈퇴 선수로 지정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를 필요가 없었다. 구단은 임의탈퇴 선수에게 연봉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현대건설은 3월 30일 자로 고유민과 계약 해지 합의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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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민 유가족이 공개한 계약해지 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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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계약을 해지한 선수를 임의탈퇴 선수로 지정하는 건 문제일까. 일단 KOVO는 ‘그렇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KOVO 규정 어디에도 구단이 계약을 해지한 선수에 대해 어떤 조처(措處)를 ‘의무적으로’ 취해야 하는지 나와 있지 않다. 사실 KOVO 규정에는 ‘계약해지’라는 표현도 위에서 확인한 규약 제53조에 딱 한 번 등장할 뿐이다. 이 조항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제53조 (은퇴 선수)은퇴 선수는 선수 본인이 은퇴 선수는 선수 본인이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하는 선수를 말하며, 계약이 만료되지 않은 선수가 선수생활을 종료하고자 계약해지를 원하는 경우 구단이 연맹에 은퇴동의서를 제출한 후 은퇴선수로 접수한다. 단, 은퇴선수로 접수 시 연맹은 자유신분선수로 전환하여 공시하며,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선수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
그러면 일단 고유민이 유가족 주장처럼 FA 신분이 되는 게 아니라 자유신분선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FA와 자유신분선수 모두 모든 구단과 자유롭게 선수계약을 체결할 수는 있지만, 개념 자체는 엄연히 다르다.
또 현대건설에서 KOVO에 ‘은퇴동의서’를 제출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고유민이 이 조항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도 불분명한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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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 여제’ 김연경. 이번 시즌을 앞두고 복귀하기 전까지는 김연경도 KOVO에서는 임의탈퇴 선수였다. 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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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형 리그인 유럽 축구 등에서는 계약이 끝난 선수는 원소속 구단 동의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팀을 옮길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보스만 판결). 그러나 프로배구는 선수에 대한 구단 보류권(保留權·독점교섭권)을 인정하는 폐쇄형 리그다.

결국 현대건설이 임의탈퇴 공시를 요청한 시점에, ‘비공개’ 계약 해지에도 불구하고, 고유민에 대한 보류권을 유지한 상태라는 유권해석이 가능하다면, 현대건설에서 고유민을 임의탈퇴 처리하는 게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노파심에 강조하자면 현대건설 아무 잘못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법적 판단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가족도 이를 모르지 않기에 법률 대리인을 선임했을 거다.

■ 선수계약서와 KOVO 규정이 다를 땐 어떻게 할까

유가족은 이날 계약해지서와 함께 지난해 6월 체결한 선수계약서도 공개했다.

이 계약서에는 고유민이 임의탈퇴 또는 은퇴 선수가 된 이후 다시 선수 생활을 계속하고자 할 때는 현대건설로만 복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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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민 유가족이 공개한 선수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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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확인한 것처럼 KOVO 규정상 임의탈퇴 선수와 은퇴 선수는 범주가 다르다.

그런데 계약서에 “은퇴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추후 ‘선수’가 선수생활을 계속 하고자 한다면 은퇴 당시 구단으로의 복귀만 가능”하다고 적시했으니 이는 KOVO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럴 때 대처법은 이 계약서 제12조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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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민 유가족이 공개한 선수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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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계약서 내용보다 KOVO 규정이 우선이다.

따라서 현대건설에서 “배구가 아닌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사가 확고해 배구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이 없음을 확인했다”면 KOVO에 임의탈퇴 선수 공시를 요청할 게 아니라 은퇴동의서를 제출하면서 은퇴선수로 접수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도돌이표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KOVO 규정 어디에도 선수와 계약을 해지했을 때 구단에서 어떤 조처를 ‘의무적으로’ 취해야 하는지 정의한 내용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 기회에 규정을 손질한다면 앞으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는 걸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일본 V.league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일본 쪽 제도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본 프로배구는 ‘V리그 기구규약’ 제61조를 통해 구단이 계약 해제(解除) 상황에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하는지 규정하고 있다.

제61조 [이적](1)참가팀은 제53조에서 정하는 선수계약을 해제한 선수에 대해 ‘이적 절차에 관한 규정’에 따라 다음 구분을 명시한 후 신속히 V리그 기구에 신고해야 한다.(參加チ¤ムは、 第 53 條に定める選手契約を解除した選手について、「移籍手續きに關する規程」に則り、 次の區分を明示のうえで速やかにVリ¤グ機構に¤け出なければならない.)

①이적희망선수(移籍希望選手)

②임의탈퇴선수(任意引退選手)

③퇴단선수(退¤選手)
일본 V리그 기구 ‘이적 절차에 관한 규정’ 제2조(8)에 따르면 이적 희망 선수는 새 팀을 구하기만 하면 바로 공식전 출장이 가능하다. 이 경우는 원소속 구단에서 보류권을 포기한 것이기 때문에 계약 해제 후 다른 팀에서 뛴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렇다면 임의탈퇴선수 또는 퇴단선수가 다른 팀에서 뛰고 싶어 할 때는 어떻게 할까.

이 규정 제5조에는 이럴 때는 ‘제삼자 기관(第三者機關)’을 통해 이적을 추진해야 한다고 나와 있다. 리그와 관계가 없는 세 명 이상이 참가하는 중재 창구를 만들어 선수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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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V리그 기구 인터넷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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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VO에도 이런 매뉴얼이 있다면 은퇴를 핑계로 팀을 떠났다가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복귀하는 선수 때문에 구단이 감당해야 하는 손해도 줄어들고, 구단 역시 은퇴식을 열어준 선수에게 징계(임의탈퇴)를 내려야 하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안타까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선수와 구단 모두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바란다.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황규인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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