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24일 오전 도쿄 시내 총리관저를 나와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NHK 화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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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전후 최장기 연속집권’ 기록을 세웠다. 2012년 12월 재집권한 이래 24일까지 2799일 총리로 재임하면서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전 총리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다. 코로나19 대응 실패와 도쿄올림픽 연기로 궁지에 몰린데다 퇴임론이 커져간다. 그간 내세워온 치적들도 빛이 바래는 분위기다.
“축하 분위기가 없다”
최근 건강악화설이 불거진 아베 총리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24일에도 병원으로 향했다고 교도통신 등이 보도했다. 앞서 진단받은 결과를 들으러 간다지만, 건강을 둘러싼 소문을 불식시키기는커녕 ‘기록을 세웠으니 이제 됐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 같은 행보다. 총리관저 안팎에서 ‘피를 토했다’는 말이 돌고, 정치적 궁지에 몰린 아베 총리가 건강 문제를 들며 물러나려는 의도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역사적 기록 경신인데 총리관저에는 축하 분위기가 없다”고 보도했다. 25일의 자민당 임원회는 취소됐고 27일로 예정됐던 총리와 당직자들의 ‘재직기록 경신 축하모임’도 연기됐다. 자민당 관계자는 “총리에게 (기록 경신은) 단순한 통과점일 뿐, 축제 소동을 벌일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2006~2007년의 1년여 1차 집권 기간까지 따지면 아베 총리 재임 기간이 3165일에 달한다. 이미 통산 최장재직 기록은 지난해 11월에 가쓰라 다로(桂太郞) 전 총리 기록을 106년만에 갈아치웠다. 일본 언론들은 연속집권 기록마저 경신하자 일제히 아베 총리의 ‘레거시(정치적 유산)’를 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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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꼽히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격인 ‘아베노믹스’다. 양적완화, 재정지출 확대, 규제완화라는 ‘3개의 화살’로 금융위기 이후 침체된 세계경제 속에서도 일본 경제를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교적으로는 논란이 많았다. 특히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뒤 미국과의 밀월관계에 의존하면서 한국, 중국 등 주변국과는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외부의 적’에 대한 적대감을 끌어올리며 국내 우파들을 선동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한 안전보장법제를 강행하고, 특정비밀보호법과 공모죄법 같은 법률을 속속 통과시켰다.
국가 아닌 ‘아베의 성공’
하지만 8년 가까이 연속집권하면서 아베 총리가 세운 레거시는 국가적 성취라기보다는 자민당과 개인의 정치적 성공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미쿠리야 다카시(御廚貴) 도쿄대 명예교수는 아사히 인터뷰에서 “민주당 정권 시절 3년여 야당 생활 뒤 자민당이 정권을 탈환하게 한 주역이 아베씨였기 때문에 당내에서 그가 집권한 뒤 반대도 불평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분석했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지난해 10월 사망한 요시다 히로미(吉田博美) 전 참의원 자민당 간사장이다. 앞서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베 총리의 경쟁자인 이시바 시게루 전 간사장을 지원한 요시다는 “결과가 나오면 모두 승자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철통같이 고수하며 아베 총리를 뒷받침했다.
2016년 8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폐막식에 ‘슈퍼마리오’ 분장을 하고 나와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알리고 있다. 게티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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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신문은 아베 총리의 장기집권 요인을 “교묘한 인사, 참의원 중시, 승부감과 강한 운에 의지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1차 집권 때 ‘친구 내각’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1년여만에 물러난 실패를 바탕으로 아베 총리가 당내 권력을 굳히는 정치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같은 전 간사장들은 정치적으로는 아베 총리와 결이 다르지만 2차 집권 뒤 중용돼 당내 반아베 세력을 막는 역할을 했다. 당내에서 잠재적 후계자들을 경쟁시켜 서로 견제하게 만들면서 자신에 도전하는 것을 막았던 사토 에이사쿠 스타일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또 하나의 요인은 선거에 유독 강했다는 것이다. 2차 집권 뒤 아베 총리는 중의원·참의원 총 6회 선거에서 전승을 거뒀다. 스캔들이 있어도, 야당이 뭐라 해도 선거에서 이겼다. 자민당의 한 간부는 산케이에 “중의원 해산 타이밍이 절묘했고 쟁점을 만드는 방법도 훌륭했다”고 평가했다.
무슨 비판이 나온들 여당이 이기는 선거가 반복되면서 야당은 갈수록 약해졌다. 미쿠리야 교수는 “자민당 안에서는 ‘아베와 선거를 하면 스캔들도 날아가며 언제고 리셋이 가능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다”며 “소선거구제 속에서 양대 정당의 정권교체라는 구조는 아베 집권 동안 사어(死語)가 돼버렸다”고 말했다.
코로나19에 흔들
당내 경쟁자가 없고 야당이 약했던 덕에 일본 정치사에 남을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웠으나, 아베 총리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갈수록 초라해지고 있다. 로이터는 “총리가 목표로 했던 헌법개정 등 큰 정치유산은 남기지 못한 반면, 발밑에서 코로나19와 도쿄올림픽 연기 등 새롭게 짊어진 부정적인 유산에 대응하느라 쫓기고 있다”고 평했다.
2019년 6월 28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악수를 나누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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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요인은 역시나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한 것이다. ‘크루즈 봉쇄’와 부실 검역, 안팎의 조롱을 산 ‘아베노마스크’, 정치적 고민이 앞섰던 비상사태 선포와 해제, 때이른 여행장려 캠페인 등으로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유능한 관료제와 행정력으로 뒷받침돼온 안전신화는 무너졌고 세계에서 일본의 신뢰가 떨어졌다. 도쿄올림픽마저 연기돼 사실상 치러지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다.
아베 총리가 내세웠던 다른 치적들도 흔들렸다. 올 2분기 실질 경제성장률은 최악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한때 기치를 올렸던 아베노믹스도 결국 ‘탈디플레’에 실패했다. 자위대 무력행사의 길을 텄지만 1차 집권 때부터 외친 개헌 작업은 갈등만 키웠다. 자위대를 ‘군대’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는 결국 달성하지 못했다. ‘전후 일본외교의 총결산’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북방영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러시아가 쿠릴열도 섬들을 돌려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총리 스스로 “정권의 최대 중요과제”라 했던 ‘납치 문제’ 해결도 요원하다. 북미 정상회담을 훼방놓다가 북한과의 대화 창구를 열 기회를 놓쳤다.
지지율 추락, 사퇴론 고조
정치평론가 하라노 조지(原野城治) 전 지지통신 해설위원은 로이터에 아베 총리가 “명확한 정치적 유산을 남기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가네코 마사루(金子勝) 릿쿄대 특임교수는 23일 트위터에 아베 총리의 기록 달성을 앞두고 ‘일본 정치 오욕의 날’이라는 글을 올렸다. ‘벚꽃 스캔들’을 비롯한 부패, 관료제와 미디어의 붕괴, 코로나19로 드러난 위기관리 능력 부족 등을 지적하며 “아베 총리 재직기간이 늘어날수록 일본은 망해간다”고 했다.
지난 2월 일본 요코하마항 앞에 정박한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의 승객들이 코로나19 감염 위험 속에 선박 안에 갇힌 채 밖을 내다보고 있다. 요코하마 | 로이터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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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도 좋지 않다. ‘스캔들이 터져도 무조건 반등’한다던 지지율은 30%대다. 5월에는 20%대로까지 떨어졌다. 23일 마이니치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절반이 아베 총리가 즉시 혹은 연내 사임해야 한다고 답했다. 여론이 반전될 전망도 없다. 그간 엎드려 있던 자민당 차기 주자들 사이에서도 “아베 체제로는 중의원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연말 총리 퇴진, 내년 초 조기 총선’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하지만 전염병 속에 조기 총선을 치를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아베 총리가 도쿄올림픽 문제 등을 처리한 뒤 물러나고, 이시바 전 간사장이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이 새 총리가 돼 예정대로 내년 10월 총선을 치르는 게 자민당으로선 최선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 전에 아베 총리의 건강이 더 나빠지면 ‘과도 총리’가 잠시 집권하는 방안도 있다. 과도 총리로는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기시다 정조회장,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등이 오르내린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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