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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이슈 이재명 지사 대법원 판결

이재명, 파란만장 인생처럼 대선주자 지지율도 역전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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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어제와 오늘

시장·도지사만 한 ‘순수 지방자치맨’

성남시장 때부터 전국적 인물 부상

정치적 감각과 정책 실행력 돋보여

“착한 사람 콤플렉스 없는 지도자”

“지도자 품격과 포용력은 숙제” 평

초등 졸업 뒤 소년공 생활하다가

검정고시로 대학생 된 ‘개천의 용’

출셋길 대신 인권변호와 시민운동


한겨레

이재명 성남시장이 2017년 2월7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계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헌재는 국민을 믿고 2월 중 탄핵을 결정해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이재명 시장은 국정농단 초기부터 박근혜 대통령 하야 및 탄핵을 정치인 가운데 가장 먼저 주장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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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도지사(56·이하 호칭 생략)는 가장 독특한 대선주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정치권 ‘바깥에서’ 혜성처럼 갑자기 떠올랐던 인물은 있었지만, 정치권 ‘안에서’ 국회나 중앙정부 등 이른바 중앙무대 경험이 전혀 없이 차기 반열에 오른 경우는 처음이다. 이재명은 성남시장 8년과 경기도지사 2년 등 정치활동을 지역에서만 해온 오롯한 지역 정치인이다. 정치의 중심이라는 여의도에는 2007년 당 부대변인과 대선후보(정동영) 캠프 부실장을 할 때 잠깐 드나들었을 뿐이다. 비주류 중의 비주류가 자신의 표현대로 “꼬리를 잡아 몸통을 흔들고” 있는 셈이다.

이재명의 정치 입문은 2006년 5월 지방선거 때였다. 열린우리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공천으로 성남시장에 처음 출마했다. 나이 42살 때였다. 앞서 그는 26살인 1990년 제2의 고향인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연 뒤 16년간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정치 입문은 지역운동의 연장선이었다. 그가 앞장섰던 성남시립의료원 설립 운동이 2004년 성남시의회에서 당시 다수당이었던 한나라당(미래통합당의 전신) 시의원들에 의해 묵살되자, “이대로 주저앉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이재명은 합니다>, 2017년)며 성남시장 출마를 결심했다. 2006년 성남시장 선거와 2008년 국회의원(성남 분당갑) 선거에서 낙선한 뒤 2010년 성남시장 선거에서는 51%의 지지로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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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달 16일 오후 대법원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취지의 판결이 나온 뒤 경기도 수원시 경기도청사 앞에서 지지들이 모인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수원/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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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다잡는 이재명의 비법


226명의 기초자치단체장 중 한 명에 불과했던 이재명은 처음부터 전국적 뉴스인물이 됐다. 전임 재선 시장이었던 이대엽이 남긴 판교 신도시 사업비 5200여억원에 대한 모라토리엄(지급유예) 선언이 그것이었다. 과잉 대응 논란도 있었지만, 그는 3년 만에 4572억원의 시 부채를 모두 갚았다. 대신 이 기간 복지예산은 약 2천억원을 더 늘렸다. “이 시장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뒤 예산 재점검을 위해 전체 과장회의를 직접 주재했다. 토론을 통해 사업예산 하나하나에 대해 폐지 또는 보류, 축소, 계속 진행 등을 결정했다. 취임 첫해에만 1100억원의 돈을 아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초짜배기 시장은 인구 100만명에 가까운 시의 공직사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공무원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주도적으로 예산을 재조정하는 것은 실력과 배짱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남시 옴부즈만을 지낸 윤석인(희망제작소 부이사장)의 말이다. ‘일 잘한다’는 평을 받은 이재명은 2014년 성남시장 재선 때 이른바 ‘강남벨트’인 분당구에서도 상대 당 후보보다 8.9%포인트가 더 많은 55.1%의 지지를 받았다. 4년 전 선거에서는 5%포인트 뒤졌던 곳이다.

재선 뒤에는 ‘중앙을 흔드는’ 정책을 본격화했다. 청년들에게 지역화폐로 연간 100만원씩 지급하는 청년배당을 비롯해 무상 산후조리 지원비, 무상교복 지원 등 3대 복지사업은 소요 예산이 연간 194억원에 불과했지만, 민생 복지정책의 대표적 사례로 떠올랐다. 박근혜 정부가 유사 중복사업 정비란 명목으로 제동을 걸고 나서자, 이재명은 헌법재판소 권한쟁의 심판 청구와 광화문 단식투쟁(2016년 6월) 등 발빠른 대응으로 중앙정부와 맞짱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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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성남시장은 2016년 청년배당 등 자신의 복지정책이 박근혜 정부에 의해 방해받자 광화문광장에서 이에 항의하는 단식농성을 벌였다. 2016년 6월15일 단식 중 농성장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는 이재명 당시 시장.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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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은 기초단체장 이재명의 정치적 위상을 더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재명은 정치인 중 가장 먼저 박근혜 하야 요구에 이어 탄핵을 주장했다. 당시 민주당 당론은 중립거국내각 구성이었다. “그는 민심에 반응하는 속도나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다. 당에서는 역풍을 우려해서 박근혜 탄핵의 ㅌ자도 꺼내지 않고 있을 때 그는 대통령 탄핵을 주장했다. 결국 그 흐름이 국민 다수의 여론이지 않았나.”(이종걸 전 민주당 의원)

2018년 경기도지사 선거 과정에서 과거 형수에 대한 욕설 사건과 형 강제입원 의혹 등 도덕성 문제가 불거졌고 당선 이후에도 수사 및 재판에 오래 시달렸지만, 이재명은 빠른 대응과 감각적 이슈 제기로 경기도를 뉴스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경기도 계곡 정비를 순조롭게 마친 것, 올해 초 코로나19 사태 초기 신흥종교 집단인 신천지 교인 명단을 확보해 대처한 것, 재난기본소득을 도민 전체에게 지역화폐로 지급한 것, 부동산 가격 폭등 사태를 맞아 경기도형 기본주택(중산층용 장기임대) 정책을 제시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를 풀려면 악역도 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좋은 평가 받으려고 그런 일은 보통 안 한다. 그런데 이 지사는 손해나 역풍이 있을지라도 해야 할 일은 정면으로 시원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이른바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없다.”(제윤경 전 민주당 의원, 2017년 이재명 대선후보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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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는 내 사회의식의 뿌리”


이재명은 정치인의 큰 자산인 성공 스토리도 탄탄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소년공이 검정고시로 대학에 가고 인권변호사가 되는 과정은 각본 없는 드라마다. 이재명은 1964년 경북 안동군 예안면의 청량산 깊숙이 자리잡은 산촌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화전을 일궈 근근이 입에 풀칠을 했을 정도로 집이 가난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1976년)하자마자, 어머니는 3년 전 도시로 떠난 아버지를 찾아 자식들을 데리고 성남시 상대원동으로 이주했다. 고지대의 방 한 칸짜리 셋방이었지만, 이재명에게는 “물을 길으러 가지 않아도 되는 수돗물도, 나무를 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연탄아궁이도 다 좋았다. 공중화장실도 신기했다.”(<이재명의 굽은 팔>, 2017년) 아버지는 상대원시장 쓰레기 잡역부, 어머니는 시장 유료화장실 수금원으로 일했으며, 나이가 너무 어린 이재명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인근 공장에서 종일 노동을 했다. 그때 입은 산재사고는 손가락(고무 공장)과 왼쪽 굽은 팔(대양실업)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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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글러브를 만들던 성남 대양실업에 다니던 소년공 이재명의 모습. 이 지사는 이 공장에서 왼쪽 팔뚝에 평생 장애를 남기는 산재를 당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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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경기도 성남의 여러 공장에서 일했던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소년공 시절에 왼쪽 팔이 굽고, 손가락에 고무가 박히는 산재를 당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경기도청 상황실에서 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 지사가 고무 가루가 박혀서 손톱 색깔이 변해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여주고 있다. 수원/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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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지고 공장에서 많이 맞기도 했던 이재명의 꿈은 “첫째, 남에게 쥐어터지지 않는 것. 둘째, 배불리 먹는 것. 셋째, 자유롭게 다니는 것”(<이재명은 합니다>)이었다. 위세를 부리는 고졸 출신의 공장 대리처럼 공장 간부가 되기 위해 1978년부터 야간에는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해서 뭐 하느냐”며 반대한 아버지는 새벽 2~3시까지 켜져 있는 이재명의 전등불을 아주 어두운 것으로 바꿔놓기도 했다. 다친 팔로 인한 고통과 아버지의 몰이해에 어린 이재명은 두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다. 잡초처럼 살아남았던 이재명의 인생 전환은 대학 입학이었다. 1982년 중앙대 법대에 매달 생활비를 받는 장학생이 된 그는 장학생 자격이 박탈될까 봐 학생운동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초 민주화운동 분위기를 고스란히 흡수했다. “(공장 생활 때) 티브이로 ‘광주사태’를 보면서 사람들은 전라도 새끼들은 죽어야 한다고 하며 폭도, 빨갱이라고 했다. 나도 그걸 거들며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더 욕을 잘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할 지경이었다. … (입학 뒤) 나는 이미 광주학살 사진집을 보았고, 이윽고 비디오도 본 뒤였다. 나는 광주를 욕해온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 광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한낱 개가 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광주는 나의 구원이었고, 나의 스승이었고, 내 사회의식의 뿌리였다.”(<이재명의 굽은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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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입학식(1982년) 날 어머니와 함께 찍은 기념사진. 가난 때문에 중고등학교를 못 다닌 이재명 지사는 대학교도 교복을 입고 다니는 줄 알고 교복을 마련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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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치 바라는 민심”


고시반 출신의 이재명이 사법연수원(1987~88년)에서 진보적 공부모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노동법학회가 된 이 모임에는 문병호(전 의원), 정성호(민주당 의원), 최원식(전 의원), 문무일(전 검찰총장) 등이 함께했다. 검사 지망을 놓고 막판 고심하던 이재명은 당시 인권변호사 노무현이 특강에서 “변호사는 굶지는 않더라”라고 한 말에 용기를 얻었다. 사무실 임대료 절반을 또다른 인권변호사 조영래에게 빌렸다. “이 지사는 그때 290명 연수생 가운데 가장 가난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출셋길을 갔을 텐데 그는 각 연고지로 가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하자고 한 멤버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이재명이 훌륭한 점이다.”(정성호)

이재명이 앞으로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지도자로서의 품격과 포용력을 보여줘야 한다. 형수에 대한 욕설 사건 등도 때가 되면 또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당내 의원들의 지지 확보와, 2017년 경선 과정에서 시작된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 쪽의 거부감 해소도 과제다. 정치컨설턴트 김능구는 “이 지사에 대한 지지는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바닥 민심에서 나온다. 정책으로 내 삶을 바꿔달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인이기에 인성 논란 등 약점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지지율이 올라갈 것”이라고 봤다. 전직 의원인 정치 전략통 이철희는 “기동성과 감각, 정책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는다. 이재명 지사는 어른스러운 포용력을 갖추는 게 숙제”라며 “다만 정치판은 지지율이 깡패이기 때문에 지지율이 올라가면 당내 세력은 저절로 늘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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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이 2017년 초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해 ‘박근혜 구속하라’는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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