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하반기부터 5조6000억 환매중단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 손실 없다”
PB, 감언이설에 개인이 10억, 20억 넣어
서류·절차 얼렁뚱땅… 93세 노인 가입시켜
지난 15일 강남구 옵티머스자산운용 사무실 앞에서 피해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사모펀드가 사기펀드로 전락했다.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펀드(DLF)부터 라임, 옵티머스까지 줄줄이 터지며 은퇴 노인·주부·직장인의 한숨이 수천억원의 손실과 함께 쌓이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최근까지 환매중단된 사모펀드는 22개, 5조6000억원에 이른다. 금융 당국은 지난해 11월, 올해 4월 두 차례에 걸쳐 부랴부랴 대책을 내놓았다. 전문투자형 사모펀드 최소 투자금을 1억원에서 3억원으로 높였다. 시장 참여자 간 견제·감시 장치도 마련했다. 이후로도 사모펀드 사태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국형 사모펀드’의 꿈을 다시 찾으려면 지금까지 대책으로는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판매 규제 강화, 진입 문턱 대폭 상향, 보상 기금 조성,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 추가 대책으로 외양간을 더 튼튼히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기 온상된 사모펀드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 손실은 없다고 했어요.”
최근 줄 이은 사모펀드 사태마다 투자자들은 이같이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에도 이들의 피 같은 돈은 하루아침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지난 1월 옵티머스 펀드에 가입한 회사원 이모(47)씨는 서울에서 20년째 아등바등 일하며 모은 2억원을 옵티머스에 투자했다가 전액을 사기당했다. 이씨는 “평소 원금 손실이 날 상품은 절대 가입하지 않는다”며 “프라이빗뱅커(PB)에게 연락이 와 안전한 상품이 있다기에 알겠다고 했는데 이 사달이 났다”고 했다. 그는 “내 선택으로 이런 상황을 초래해 가족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힘들다”며 “아내가 ‘안전하다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진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에 사는 송모(60)씨는 3억원을 넣었다 낭패를 봤다. 송씨는 “75세까지는 일해야 하니 은퇴하고 세차장을 차려 제2의 인생을 살 계획이었다”며 “망하려고 해도 망할 수 없는 안전한 투자 상품이 있다며 ‘빨리 들어가야 한다’고 재촉한 PB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평생 모은 3억원을 옵티머스 펀드에 투자한 강모(46)씨는 “이걸 투자라고 생각했다면 3억원을 다 넣지 않았을 것”이라며 “상품이 안전하다고만 강조하니 경각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라임 사태 이후 다들 경계심이 커졌는데 심지어 10억원, 20억원을 넣은 개인 투자자가 있는 이유는 PB들이 안심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디스커버리운용 펀드에 가입한 류모씨는 미국에 나가 있었음에도 아버지가 대리계약했다. 류씨는 “계약 당시 저는 미국에 있었는데, 은행 직원이 아버지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대리서명을 하도록 해서 서류를 받아갔다”며 “고객 투자성향도 억지로 적극투자형을 설정해 위험 등급이 높은 상품에 가입시켰다”고 울분을 토했다.
◆사모펀드 근본부터 변하려면
일련의 사모펀드 사태에서는 공식처럼 비슷한 증언이 쏟아졌다. 수수료에 눈먼 은행·증권사는 양심을 저버렸다. 권해선 안 될 고객에게 ‘나 못 믿냐’는 듯 공세적 마케팅을 폈다. 그 결과 고위험 사모펀드가 ‘안전한 상품’으로 둔갑해 팔려나갔다. 디스커버리 펀드는 93세, 팝펀딩 연계 펀드는 90세 노인을 가입시켰다. 각종 서류·절차는 얼렁뚱땅 무시됐다. 2015년 당국의 규제완화를 틈타 부실 운용사들이 우후죽순 자라났고, 이들의 사기·횡령이 드러났을 땐 이미 돌려줄 돈은 바닥난 상태였다.
어긋난 사모펀드 시장을 바로잡는 대안은 크게 두 방향에서 논의된다. 고객 보호를 위해 운용·판매 규제를 더 촘촘히 하자는 의견과 아예 ‘꾼들의 놀이터’로 되돌리자는 제안이 함께 나온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당국이 판매 규제를 강화했으나 불완전판매를 근절하려면 과징금을 더 높이고 금융회사가 판매 수수료보다 자문 수수료로 수익을 내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내년 3월 시행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금융회사의 불완전판매가 적발되면 거둔 이익의 50%를 과징금으로 토해내도록 했다. 이 연구위원은 과징금을 최대 200%까지 상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모펀드를 다루는 은행·증권사의 주 수익원이 선취 판매수수료인 한 ‘팔면 그만’인 관행이 사라지기 힘들다고 봤다. 이 연구위원은 “고객 수익에 비례해 자문 보수를 받는 자문수수료 중심으로 바꿔야 사후 관리가 된다”고 말했다.
반면 사모펀드 시장의 담을 높이 쌓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알아서 투자하고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 황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박창균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는 “실력과 능력, 경험 있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자기 책임하에 투자하는 곳이 사모 시장”이라며 “기본적으로 개인이 사모 시장에 들어오는 건 아니라고 본다”고 했다. 그는 “400조원이 넘는 사모펀드 투자액 중 개인투자자 투자액은 20조원뿐이라 개인을 다 들어내도 사모펀드 시장의 95%는 살아있다”며 “정부는 개인투자자가 들어오지 않으면 사모 시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역설했다.
◆금융 감독·정책 기능 재정비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어색한 동거를 하는 현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된다. 금융위의 정책, 금감원의 감독과 소비자 보호 기능을 해체·재조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10일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점 앞에서 열린 신한금융지주의 금감원 라임 분조위 결과 수용 및 라임펀드 착오에 의한 계약 취소와 100% 배상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융사 감독과 소비자보호를 같이 할 수는 없다”며 “금감원의 금융소비자보호처를 별도 기관으로 분리하고 장기적으로 금융위와 금감원을 합치는 게 맞다”고 했다. 그는 “당장 두 기관을 합칠 순 없으니 현재로서는 금융위원장이 금감원장을 겸하는 게 현실적”이라며 “그래야 갈등이 발생해도 조정이 수월해진다”고 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도 “금융사를 감독하며 소비자를 보호한다는 건 이율배반적”이라며 “금융소비자보호처가 분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투자자 보호기금 마련도 필요하다. 현재는 사모펀드 피해자가 손실 배상까지 오랜 시간 지난하게 매달려야 하는 구조다. 영국·미국은 관련 기금을 통해 사모펀드 사기·불완전판매 피해자를 구제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집단소송제 대안 거론
징벌적 손해배상제·집단소송제는 사기판이 된 사모펀드 문제를 풀 대안으로 종종 거론된다. 피해 구제가 쉽도록 길을 넓히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로 죄지을 엄두 자체를 못 내게 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은 사모펀드 불완전판매를 하면 평판이 크게 훼손되고 대규모 과징금을 부과받아 정상 영업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주요 ‘금융 다단계 사기’로는 버나드 메이도프가 세운 페어필드 센트리 헤지펀드가 거론된다. 이 회사의 ‘투자금 돌려막기’와 불완전판매는 2009년 세상에 드러났다. 미국 연방법원은 메이도프에게 벌금 1700억달러(약 204조원)를 부과하고 최대 형량인 징역 150년형을 선고했다. 모든 재산도 몰수했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판매사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적용하면 이를 피하려고 상품 판매 감독과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할 것”이라며 “징벌적 손배제는 사후 대응 수단이지만 사전예방책도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황 고려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기존 법체계에서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제대로 보상받기 힘든 것으로 드러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할 수 있다”며 “다만 사모펀드 사고는 최근 급증했다. 보상이 충분히 됐는지 판단할 경험치가 아직 쌓이지 않았기에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하기는 이르다”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는 한국의 대륙법 체계와 영미식 징벌적 손해배상은 맞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대륙법계는 절차를 통해 증명된 피해 한도 안에서 경제적 손해를 100% 배상하도록 한다. 형사 처벌과 민사 배상 간의 역할 분담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미법은 실제 손해에 더해 사회정책적 피해도 돈의 형태로 보상해야 한다고 본다.
이 교수는 “우리 법체계에서는 손해배상이 100% 되도록 기존 법부터 보완하는 게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보다 더 쉬운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사모펀드 피해 보상을 위해서는 허술한 범죄수익 환수 제도도 정상화해야 한다. 제조물 책임·증권 분야 등에 적용 중인 불완전한 집단소송제도 고칠 필요가 있다. 이 교수는 “집단소송제는 디스커버리 제도와 함께 들여와야 효과가 있다”고 강조했다.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기업이 소비자 피해와 관련한 내부 증거를 제출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송은아·이희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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