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사(哀事)에는 비교적 관대한 우리 문화에서 조문 여부를 놓고 여론이 크게 갈린 것은 안타깝지만 비껴가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먼저, 인간관계를 유난히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교분과 인연을 쌓은 지인의 황망한 죽음에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일은 당연한 인간적 도리로 여겨진다. 각계 인사들과 적잖은 시민이 자발적 조문에 나선 것은 판단 보다는 관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는 쪽이 맞는다고 본다.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하기에는 조문 문화를 지탱해 온 세월이 유구하고 인식의 뿌리가 깊다. 다만, 고인의 남다른 족적을 추어올리는 지나친 미화는 경계해야 한다. "죽음으로 답했다"는 평가 역시 극단적 선택을 '책임을 지는 최선의 방법'으로 치환하는 나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반면, 조문에 판단을 동원해 불가론으로 기운 쪽도 나름대로 합당한 논리가 있는 만큼 박정함만을 탓할 수 없다. 조문과 서울특별시장이 '미투' 피해자에 대한 제2차 가해에 해당한다는 지적은 피해자 중심주의 관점에서 마땅히 경청해야 한다. 5일장으로 하되 조용하게 가족장으로 치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 '미투 고소인'을 색출하겠다며 오히려 피해자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일부 과격한 움직임이 일고 있는 현실도 조문 행렬에 동의를 표할 수는 없는 요인으로 꼽힌다. 정의당의 일부 젊은 의원들이 조문 거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나선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장례위원회조차 피해 호소인을 비난하거나 압박해 가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하고 나선 점을 상기해야 한다.
이렇듯 박원순 시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우리 사회에 많은 숙제를 남겼다. 고위공직자의 성도덕, 극단적 선택의 무책임함, 흠결이 의심되는 망자에 대한 조문의 당부(當否), 상중 예의, 2차 가해의 위험성, 선정주의적 자살 보도, 정치 논객들의 무차별적 평론 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어느 것 하나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어떤 민감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영향력이 큰 정치인이나 논객들의 균형감 없는 메시지 발신은 여론을 양극화하는 촉매가 된다는 점에서 극도의 자제심이 요구된다. 미래통합당 배현진 의원이 갓 귀국한 상주에게 차제에 병역의혹 문제를 해결하라고 SNS에 다그치는 글을 올린 것은 때와 경우를 살피지 못한 부적절한 요구였다. 3년 탈상도 아닌데 하루 이틀을 좀 더 참지 못했나 싶다. 또, 제도권 언론은 물론이거니와 유튜버들도 과도하게 선을 넘는 일은 없어야겠다. 극단적 선택의 현장과 주검이 들것으로 옮겨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알권리와 무관한 황색 저널리즘일 뿐이다. 삶의 최후의 순간을 어떤 방식으로 마감했는지를 캐묻는 취재도 불필요한 호기심이다. 과도한 속보 경쟁은 해거름에 '시신 발견'이라는 설익은 오보를 낳고 말았다. 상중인데 내년 보궐선거 얘기를 하는 것은 직업정치인들의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언론의 화급한 취잿거리는 아니다. 언론만 차분해도 여론이 냄비처럼 들끓지는 않는다. 장례절차가 모두 끝나고 언론이 2차 가해를 부추길 수 있는 무분별한 취재 경쟁에 나서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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