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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이슈 'N번방의 시초' 손정우 사건

[법정B컷]"대한민국 주도로" 손정우 주저앉힌 판사의 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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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 주장 기각하다 "한국 문제 더 시급해" 반전

'대한민국서 해결' 강조…타국 피해자 외면

국가 위한 법원인가 국민 위한 법원인가…비판

CBS노컷뉴스 정다운 기자

※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편집자주]

2020.7.6. 손정우 '범죄인인도심문' 결정 법정서 판사 낭독
"한·미범죄인인도조약 외에 범죄인 인도법 제10조에서 정한 별도의 보증이 있어야만 인도가 허용된다는 범죄인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 기록과 심문에 의해 인정되는 사정을 종합해보면 범죄인이 이 사건 인도범죄를 범했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 그밖에 범죄인인도법 제7조가 규정하는 다른 절대적 인도거절사유에 해당한다고 볼만한 사정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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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 씨의 미국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범죄인 인도심사 두 번째 심문기일.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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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의 미국 송환 여부가 결정되던 지난 6일 서울고법 법정. 재판장이 결정문을 절반 이상 읽어내려 갈 때까지만 해도 취재진과 방청석의 분위기는 차분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손씨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것을 가로막을 만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을 재판부가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재판부는 손씨 측 주장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기각했습니다.

2020.7.6. 손정우 '범죄인인도심문' 결정 법정서 판사 낭독
"범죄인의 주장과 같이 범죄 전부 또는 일부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이 사건 인도범죄를 기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범죄인 인도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또 범죄인을 청구국에 인도하는 것이 비인도적이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우려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임의적 인도거절 사유가 있다는 범죄인의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중략)…

"범죄인이 웰컴투비디오 사이트를 통해 설계하고 운영한 거래구조는…아동·청소년음란물(성착취물)의 소비와 재생산을 조장하는 악순환적 연결고리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이 우리사회를 위협할 수 있는 크나큰 문제입니다. …… 관련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웰컴투비디오 사이트 회원들에 대한 철저하고 발본색원적인 수사가 필요합니다. …… 범죄인을 미국으로 인도하지 않고 대한민국이 범죄인의 신병을 확보함으로써 주도적으로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관련 수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철저히 진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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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 법정 안에서 취재진이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 손정우 씨의 미국 송환 여부를 결정을 위한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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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가 웰컴투비디오 사이트의 사회적 해악에 대해 고지할 때까지만 해도 잠잠하던 분위기는 '대한민국이 주도적으로'라는 내용 이후부터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범죄인이 미국으로 인도된다면 대한민국에서는 웰컴투비디오 국내 회원들에 대한 수사가 미완의 상태로 마무리되거나 그 진행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며 '자국 수사'를 걱정하는 말이 검찰도 아닌 재판장의 입에서 나온 겁니다.

재판부는 "미국이 범죄인을 인도받아 자국 내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성착취물) 관련 수사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에 이익이 있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경우가 더 시급하고 중대하다"며 일종의 애국심(?)까지 동원했습니다.

취재진을 비롯해 방청을 온 시민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대로 풀려나는 거냐", "그냥 저렇게 나가는 거냐", "이제 방법이 없는건가" 등의 수근거림만이 법정을 채웠습니다. 기자들은 전례도 3차례 밖에 없는 '범죄인 인도 거절' 결정에 대한 법 규정을 서둘러 찾았지만 '법원의 인도거절 결정이 있는 경우 검사는 지체 없이 구속 중인 범죄인을 석방한다'는 말만 적혀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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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우 씨의 아버지 손 모 씨가 손 씨의 범죄인 인도심사 두 번째 심문 재판을 마치고 법정을 나서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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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가 직접 말한 대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손정우가, 아무런 법적 제약을 받지 않는 신분으로 '대한민국'에 다시 석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재판부의 결정을 두고 법조계 등 일각에서는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사법주권'이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원칙은 아니다"라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또 "대법관 후보이기도 한 강영수 부장판사(재판장)가 최근 여론을 몰랐을 리 없는 상황에서도 어려운 판단을 내렸다"며 "그만큼 많이 고심했을 것"이라고 신뢰를 보내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손씨가 타국 피해자를 직접 상해나 사망에 이르게 하는 등의 '전통적인' 범죄로 이번 인도 심문대에 섰다면 재판부의 판단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재판부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범죄의 중대성에 대해 언급하긴 했지만, 실제론 이같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어떤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의 한 교수는 "최근까지만 해도 '음란물'은 그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범죄일 뿐, 피해자가 실존하는 범죄로 다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성착취물에 나오는 것은 엄연히 '사람'인데도 그저 '음란물 건수'가 꽤 많은지, 적극 유통해서 수익을 얻었는지 등 피해자를 빼고 외연만 봤다는 겁니다.

손씨의 1·2심 판결문을 보면, 수사과정에서 압수된 하드디스크에서 나온 성착취물은 17만개에 달합니다. 이 중 아동·청소년이용 성착취물만 선별해 중복·불량파일을 제외하고 검찰이 기소한 수량이 3055개 입니다. 폴더 안에 좀 저질스러운 '야동'이 3천개쯤 있는 게 아니라, 그 촬영의 대상이 된 세계 각국의 아동·청소년 피해자가 최소 수천명이라는 얘깁니다.

그럼에도 해당 1·2심 재판부 모두 성착취물 중 상당수는 손씨가 '직접 올린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형사유로 인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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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비롯해 수많은 여성의 성착취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이 호송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이한형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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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교수는 "손정우가 아니라 조주빈(강간미수·강제추행 혐의도 포함)이 인도심문대에 섰다면 재판부는 인도 결정을 내렸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손씨의 범죄가 그나마 가볍다고 생각하는 것은 디지털 성범죄의 중대성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입니다. 신체접촉 없이도, 어쩌면 강간보다 더 잔혹하게 피해자를 사회적·신체적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디지털 성범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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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당이 지난 7일 서울고등법원 동문 앞에서 손정우 미국 송환 거부 서울고법 형사 20부 재판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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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손씨의 인도거절 결정이 난 후 법정 밖에서 소회를 밝힌 손씨 아버지도 비슷한 문제점을 드러냈습니다.

2020.7.6. 손정우 아버지 발언 - '(미국)인도거절' 결정 후 법정 밖 복도
취재진 "손씨를 다시 만나게 됐는데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신지요?"

손씨 아버지 "디지털범죄가 이뤄진 것은 얘가 컴퓨터만 가지고서 자라왔다 보니까…. 앞으로는 컴퓨터 하지 못하게…이렇게 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씨의 범죄로 인한 구체적인 피해자들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하고 '컴퓨터'에 관한 일로 막연히 생각하는 겁니다.

이번 결정 후 강 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을 박탈해달라는 국민청원에 약 50만명이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법조계 일각에서 그가 '여론에 휘둘리지 않고 법적 소신을 지켰다'고 평가하듯, '국가적 이익'을 생각하는 어느 인사권자에게는 그 이름 석 자가 인상 깊게 남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법치'는 국가를 위한 것인지 모든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인지. '법치의 수호자'라 불리는 법관은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이번 '손정우 불송환 사태'가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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