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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인권변호사 출신 시민운동가…3선 서울시장 넘어 대권 꿈꾸다 허망한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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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삶

[경향신문]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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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사시 합격…짧은 검사생활
1990년대 중반까지 인권변호 활동
참여연대 결성 후 시민운동가 변신
권력 감시·재벌개혁 등 목청 높여
2011년 보궐선거 당선 후 내리 3선
“지난 10년, 시민 꿈 회복 위한 시간”

고 박원순 서울시장(향년 65세)은 사회적 약자와 민주화운동을 대변하는 인권변호사였다. 민주화 이후엔 시민참여와 권력감시 운동을 전개한 시민운동가, 사회 저변에 깔린 의제들을 발굴하는 정책연구가이기도 했다. 인생 후반기는 이 같은 삶의 궤적에서 축적한 구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행정가로 살았다.

사상 최초 3선 서울시장이 됐지만, 풀리지 않은 의혹을 남겨두고 약 2년여 남은 임기를 마치지 못했다.

박 시장은 1955년 2월11일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일곱자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훗날 독서를 즐기고 꿈이 많은 유년시절이었다고 스스로 술회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입학한 수재는 20대에 삶의 변곡점을 맞았다.

그 첫번째는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갓 입학한 ‘새내기 박원순’에게 찾아왔다. 당시는 유신체제가 ‘긴급조치 9호’로 사회를 잔뜩 옥죄었을 때다. 박 시장은 박정희 정권의 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당시 서울대 4학년 고 김상진 열사 추도식에 참석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서울대는 그를 제적했고, 박 시장은 197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재입학했다.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2년 대구지검에 부임한 뒤 박 시장은 출세가도로 여겼던 검사가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다. 발령난 지 1년도 채 안 돼 검찰을 나와 변호사로 나섰다. 사법연수원 12기 동기인 고 조영래 변호사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월간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 대표적 인권 사건 변론을 맡았다. 1990년대 중후반 성희롱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된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변호인으로도 참여했다.

훗날 그를 규정지은 ‘시민운동가 박원순’으로서의 삶은 1994년 참여연대를 결성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참여민주사회’를 표방한 참여연대는 행정과 권력 감시에 집중했다. 국민생활최저선 확보, 공익제보자 지원, 부패정치인 낙천·낙선, 재벌개혁을 내세운 소액주주 권리 등 참여연대 활동의 중심엔 늘 박 시장이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박 시장의 관심은 ‘생활밀접형 의제’로 향했다. 2000년 ‘아름다운재단’을 창립해 ‘1% 나눔’ 운동 등 기부문화를 대중화하는 데 나섰다. 한부모 여성 지원, 독거노인 생계비 지급, 미숙아 치료 등 모금을 통해 여러 공익사업을 펼쳤다. 2002년 기증받은 물건을 재사용·재판매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사회적 기업 ‘아름다운가게’를 설립했다. 아름다운가게는 윤리소비, 공정무역, 자원순환의 대명사였다.

2006년 시민사회 활동가와 각계각층 전문가들이 모인 민간 연구조직 ‘희망제작소’는 지역과 현장 중심 연구를 지향했다. 거리의 무질서한 간판문화 개선, 높이를 낮춘 손잡이와 노인 등 교통약자 배려석을 도입하는 지하철문화 개선 등이 희망제작소의 발상이다. 이즈음부터 박 시장에게는 ‘소셜 디자이너’란 별칭이 따라붙었다.

박 시장은 유명세를 탄 이후 줄곧 정치권 영입 대상으로 꼽혔다. 그가 제도권 정치에 뛰어든 건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 이후 공석이 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다. 당선 일성은 “이제 새로운 서울을 설계하겠다”였다. 시민사회 인맥과 경험이 서울시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내리 3선을 하면서 학교 무상급식, 대학 반값등록금, 청년수당, 역세권 청년주택, 비정규직 정규직화, 태양광 등 친환경에너지, 노동이사제 등 정책을 실현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무난하게 최초 3선 서울시장 기록을 거머쥐었다. 지난 6일 민선 7기 취임 2년을 맞아선 9년 시정을 회고하면서 “지난 세월 조용한 혁명을 일으켜왔다”며 “도시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켜 드리려고 했던 시간이었다”고 자평했다.

한때 여론조사상 현 여권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등 줄곧 차기 대선주자로 꼽혔다. 첫 대선 도전 기회였던 2017년엔 중도에 경선을 포기했지만 대선을 향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평소 꼼꼼하고 ‘일벌레’ 같은 기질로 서울시 같은 지역 행정에는 능하지만, 국가적 의제를 주도하는 정치적 감각은 다소 부족한 것 아니냐는 박한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이 최근 보인 행보는 이런 세간의 인식을 불식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전 국민 고용보험의 전면적 도입을 촉구한 것이 그중 하나다. 박 시장은 민주노총·한국노총 등 조직화된 노동과 자영업자·플랫폼노동자 등 파편화된 노동이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는 기반을 닦는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8일 그가 마지막으로 공개석상에 서서 설명한 ‘서울판 그린뉴딜’은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과 관련 있다.

박 시장은 지난 9일 서울시청에 출근하지 않고 자취를 감췄다. 서울시는 이날 박 시장이 최근 제기한 강남권 개발이익 공유 주장에 관한 서울시민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도자료에서 박 시장은 “강남·강북 균형발전”을 강조했다. 그가 2018년 3선 시장 취임 직후 한 일이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 한달살이였다. 이날 성추문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고, 10일 결국 박 시장은 숨진 채 발견됐다.

허남설 기자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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