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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 (일)

이슈 박원순 서울시장 사망

인권변호사에서 최장수 서울시장까지…박원순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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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들 대변했던 인권변호사

참여연대 설립 주도…시민운동 대부

2011년부터 3선…최장수 시장 기록

‘토건’보다 시민생활 변화 정책 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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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의 박원순 변호사.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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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64) 서울시장은 한국 시민운동의 산증인이었다.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출발해 참여연대·아름다운재단·희망제작소 등을 세웠다. 참여연대의 낙천·낙선 운동과 소액주주 운동은 진보진영에 신선한 충격을 준 박원순표 시민운동의 성과였다. 당시 사회운동세력은 자본주의 타도 같은 거대 담론에 매몰돼 있던 때였다.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실질적으로 개선되길 바랐던 그는 지난 20여년 동안 ‘혁신가’ 또는 자신이 말한 ‘소셜디자이너’의 한 상징이었다. 2011년에는 극적인 단일화를 통해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역사상 첫 3선 서울시장에 오르며 여권 주요 대선주자로 입지를 굳히기도 했던 인간 박원순의 삶을 되짚었다.

약자 변론하던 인권변호사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박 시장은 서울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법대 1학년에 재학할 때인 1975년 유신 반대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대학에서 제적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80년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1982년 검사로 임용됐다가 1년 만에 나와 당시 대표적 인권변호사인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본격적인 약자 변론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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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98년 2월23일 서울 종로구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연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승소 축하연’에서 당시 피해자 변호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맨 왼쪽)가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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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은 독재 시절 권인숙씨 성고문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서울대 신 교수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하고 민감한 사건들의 변론을 적극적으로 맡았다. 특히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은 한국에서 성희롱으로 최초의 법적 공방이 벌어진 것으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박 시장은 1998년 서울고법에서 “가해자 신아무개 교수가 피해 조교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끌어내며 여성 인권을 향상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1986년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역문연)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때 종로구 재동에 있던 자신의 집과 장서 등을 역문연에 모두 기증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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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박원순 서울시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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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등 시민운동 산증인

이후 박 시장은 시민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일하며 사법개혁 운동과 소액주주 운동 등을 이끌었다. 특히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총선시민연대 상임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정부패 혐의를 받는 정치인들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펼치며 정치권과 유권자 운동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참여연대가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정착된 뒤인 2000년 박 시장은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어 시민들의 기부와 참여를 시민운동의 영역으로 확장시켰고, 2006년엔 다시 희망제작소를 설립해 상임이사로 활동했다. 박 시장의 시민운동 활동은 자신과 시민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막판 단일화로 시장 당선

2011년 10월, 박 시장이 정치권에 뛰어들며 시장에 당선된 과정은 감동적이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주민투표 뒤 사퇴해 시장직이 공석이 되자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 함께 야권의 서울시장 후보로 급부상했다. 초반 지지율이 5%에 불과했던 박 시장은 안 전 원장의 극적인 양보를 받아냈다. 이후 경선에서 박영선 민주당 후보를 꺾고 본선에서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에게 53.4%의 득표율로 승리하면서 여야 양당체제를 넘어선 파란을 일으켰다. 시민운동가 출신 시장의 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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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창립총회가 열린 1994년 9월10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 서초별관에서 초대 사무총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가 연설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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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4일 지방선거에서는 정몽준 당시 새누리당 후보의 거센 도전을 막아내며 재선에 성공했다. 자유한국당 김문수 후보와 바른미래당 안철수 후보의 도전을 받은 2018년 6·4 지방선거에선 52.79%로 나머지 두 후보를 여유 있게 제치고 3선 고지에 올라 역대 최다선 서울시장이 됐다.

박 시장은 이명박, 오세훈 전임 시장과 달리 토건 중심의 성과보단 시민 생활을 바꾸는 시정 운영에 집중하며 차별화를 꾀했다. 지난 5월 박 시장은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지우고 새로 쓰는 재개발·재건축 대신, 고쳐서 다시 쓰는 도시재생 사업이 있다”며 “도시재생은 도심 공동화, 시설 노후화, 상권 침체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주민, 역사, 생태는 물론 마을공동체의 가치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메르스 때…대선주자 1위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당시 박근혜 정부와 달리 투명한 정보 공개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시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박 시장은 대선주자 1위에 오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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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변호사(왼쪽)가 2011년 9월6일 서울 광화문 아띠 수피아홀에서 자신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양보하며 불출마를 선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을 끌어안고 있다. 이정우 <한겨레21> 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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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장은 마지막 서울시장 임기 반환점을 돈 지난 6일 ‘민선 7기 2주년’ 기자간담회를 열어 소회를 밝힌 바 있다. 박 시장은 “그동안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던 많은 시민들의 삶과 꿈을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직접 발표한 서울시 정책은 ‘그린뉴딜’이었다. 그는 지난 8일 건물, 수송, 폐기물 분야의 온실가스를 줄이고 2050년까지 서울의 모든 차량을 친환경 전기·수소차로 바꿔 서울을 2050년까지 ‘탄소배출 제로’ 도시로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그의 서울시장 임기는 2022년 6월30일까지였지만, 만료 700여일을 앞둔 3180일 만에 멈추게 됐다.

영광과 상처 뒤로한 채…

‘디테일에서 강하다’는 평가처럼 그는 시정의 꼼꼼한 부분까지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가 시장이 되고 난 뒤 시청 안팎에선 시장의 열의 때문에 공무원들이 격무에 시달린다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 퍼져나오기도 했다. 무상급식, 도시재생,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그동안 박 시장이 내세운 정책들은 정부가 역점추진사업으로 이어받는 등 혁신성이 남다르다는 인정을 받았다.

시청을 시민청으로 바꾸는 등 소탈하고 탈권위적인 리더십으로 유독 ‘소통’과 ‘협치’를 중시했던 그는,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200만명의 팔로어를 가진 ‘파워 셀럽’으로 시민들과 가까운 시장이기도 했다. 시장이 되고 난 뒤 한 무연고자 빈소에 밤늦게 조문 가서 “이 세상 떠나는 길이 외로울 듯해서 들렀다”고 밝히기도 했던 박 시장은, 자신이 쌓은 영광과 상처를 뒤로한 채 홀로 세상을 등졌다.

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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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당선 인사 모습. 왼쪽부터 2011년 초선, 2014년 재선, 2018년 3선 당시.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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