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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의 의무·7년 계약…폭력·갑질 키우는 실업선수 '노예계약'

머니투데이 김남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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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의 의무·7년 계약…폭력·갑질 키우는 실업선수 '노예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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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남이 기자, 정경훈 기자]
9일 경북 칠곡군 주요 도로변에 폭행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 고(故) 최숙현 선수의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 선수는 칠곡 출신으로 초·중학교 시절 수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아버지는 칠곡군레슬링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사진=뉴스1

9일 경북 칠곡군 주요 도로변에 폭행과 가혹행위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 출신 고(故) 최숙현 선수의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고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를 호소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최 선수는 칠곡 출신으로 초·중학교 시절 수영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아버지는 칠곡군레슬링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사진=뉴스1



고(故) 최숙현 선수가 몸 담았던 경주시청 직장운동부(실업팀)의 선수계약은 ‘노예 계약’과 다름이 없었다. ‘을’인 선수의 의무만 수없이 나열돼 있고, ‘갑’인 경주시체육회의 권리는 사실상 무한했다. 훈련, 경기와 상관 없는 각종 행사에도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문제는 불공정거래 경주시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실업팀 계약서에는 독소조항이 있었다. 체육회와 지도자에게 막강한 권리가 있고, 이적 시장도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찍히면 운동을 못한다’는 인식이 선수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갑'이 필요할 때 언제든 해고 가능...의문이 생겨도 '갑'이 해석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임용 계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임용 계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



9일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설치 및 운영관리 내규에 따르면 선수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임용(연봉)계약서 △입단지원서 △서약서 등을 작성해야 한다. 최 선수는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트라이애슬론팀과 2017년, 2019년(2018년 컨디션 저조로 제외) 계약을 맺었다.

경주시청에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을 위탁받은 경주체육회는 올 4월 관련 내규를 개정했다. 하지만 최 선수가 맺은 계약서와 서약서 등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선수 서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

경주시청 직장운동경기부 규정 선수 서약서 중 /출처=경주시체육회



경주시체육회장인 ‘갑’인 임용 계약서는 곳곳이 독소조항이었다. 계약의 해지 부분엔 ‘기타 갑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해도 선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와 함께 규정과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갑’이 정하는 바에 따라야한다. 계약서의 해석도 ‘갑’에 따라야 한다. 말 그대로 ‘갑’의 명령이 절대적인 셈이다. 서약서에는 ‘계약자가 각종 행사 참석 요청 시 참여한다’라는 규정까지 있다.

사단법인 두루의 최초록 변호사는 “계약해지 부분에서 ‘갑이 필요하다’고 하는 부분은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은데, 그 해석을 ‘갑’이 할 수 있도록 했다”며 “아무 때나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복종의 의무'까지 사실상 노예 계약...육상은 기본 계약 기간 7년

통영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 규정 /출처=통영시

통영시 직장운동경기부 운영 규정 /출처=통영시



문제는 이런 불공정계약이 경주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취재진이 행정안전부의 자치법규정보시스템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각 지자체 실업팀 계약에서 ‘독소조항’은 쉽게 찾을 수 있다.


트라이애슬론팀을 운영하는 통영시의 경우 운영 규정에 ‘복종의 의무’가 있다. 선수단원은 ‘소속 상사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또 정당한 사유 없이 지시 및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고용은 언제든 중지될 수 있고, 선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한국실업육상연맹 계약 규정 /출처=한국실업육상연맹

한국실업육상연맹 계약 규정 /출처=한국실업육상연맹



서울시는 우수선수로 영입된 선수가 계약기간 중 타팀으로 이적하면 지급된 영입(육성)비의 2배를 물어야 한다. 또 이적의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경기단체 및 산하기관의 규정이 아닌 계약을 우선시 해야한다.

실업팀 간의 이적을 막는 조항은 실업 연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실업육상연맹의 경우 올해부터 최초 실업팀 인단 선수의 계약 기간을 7년으로 못 박았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선수도 이적을 위해서는 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결국 국민인권위원회는 해당 조항을 바꾸라고 권고까지 했다.

이외에도 여러 자지단체에서 계약서의 해석을 ‘갑’에 따라야 한다는 조항이 발견됐다. 최 변호사는 "계약서에 없는 것을 ‘갑’이 정한대로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계약서에 없는 내용은 갑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따라야 맞다"고 강조했다.

이어 "운동선수가 생계유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이런 계약서를 받아들었을 때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운동선수도 운동 생활의 특성을 반영한 표준 계약서를 만들고 이를 선수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남이 기자 kimnami@mt.co.kr, 정경훈 기자 straight@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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