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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피해’ 놀라지만 말고, 평범한 일상 살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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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인터뷰

성폭력 피해자 돕는 생존자, 김영서

국내 첫 친족성폭력 피해 수기

8년만에 본명으로 개정판 펴내

불법 성착취 영상 피해자 상담

“나부터 본명으로 당당한 삶

수치심 겪는 그들에게 힘 되길”

추미애 장관 200부 특별주문도

“가해자 겉으론 평범 유지한 채

피해자 노예 삼아 착취하는 범죄

친족성폭력과 디지털성폭력 비슷”


한겨레

김영서 상담사는 지난달 30일 서울 강서구 한 스터디카페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며 성폭력 생존자의 ‘일상 회복’을 강조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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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김영서. 친족성폭력 피해 수기를 국내 처음으로 출간한 작가. 생존자. 12살 때부터 성폭력을 저지른 목사인 친부의 집에서 20살에 겨우 2만원을 들고 탈출한 피해 생존자. 울고 울다가 원래 없던 쌍꺼풀이 깊게 새겨진 사람. 치유자. 한국성폭력상담소를 거쳐 최근까지 서울시 디지털성범죄 피해 지원 서비스(‘찾아가는 지지동반자’ www.onseoulsafe.kr ▶바로가기) 상담사로 생존자 곁에 선 동행자.

본명 김영서. 2012년 친족성폭력을 거침없는 언어로 기록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이매진)를 펴낸 그가 지난 3월 ‘지은이 김영서’를 새긴 개정판을 내놨다. 초판에는 ‘은수연’이라는 가명을 썼었다. 피해 기간 9년, 기록하는 데 10년, 초판 발행 뒤 8년이 흐른 지금, 40대 중반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얼굴도 드러냈다. 웃고 우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

한겨레

김영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나, 이제 정말 문을 열고 나간다.”(246쪽)

김영서 작가를 만났다. 지난 6월30일, 그가 평소 공부하고 글 쓰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서울 강서구의 한 스터디카페를 찾았다. 오랫동안 정성껏 약을 먹이고 얼룩을 닦아온 가죽처럼, 탄탄한 빛을 머금은 얼굴과 만났다. 요즘 저녁 8~9시쯤엔 뭘 하느냐고 물으니,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주짓수를 배운다고 했다. 정해진 일과에서 대충 놓여나, 드디어 마음대로 뭔갈 해볼 수도 있는 시간. 그때 선택하는 일은 한 인물의 중요한 단면일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운동을 즐기는, 평범한 생활이 그의 삶의 무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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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선 지인’도 지인일까요?


지난 8년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본명으로 살겠다고 결심한 변화의 시기인데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사로 6년간 일했고, 공공기관에서 폭력 예방 위촉강사로도 활동했어요. 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등에서요. 최근엔 상담과 강의보다, 상담심리사 시험 공부에 몰두하고 있어요. 상담자로 산 지 16년째인데, 상담의 깊이를 더하려니 공부에 끝이 없어요. 두 번째 책도 쓰고 있고요.”

사전에 인터뷰 질문지를 보내면서, 맨 위에 ‘어릴 땐 어떤 꿈을 꾸었는지, 왜 상담사가 됐는지’ 묻는 평범한 질문을 썼다. 이것부터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존자는 학대로 인해 훼손된 존재가 아니라, 학대로 인해 침해된 꿈과 소신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10대 땐 커서 교육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원하는 게 구체적이었어요.(싱긋) 하지만 대학은 아빠라는 사람이 가라는 학과로 갔어요. 선택할 수 없었어요. 집을 나와 자립하는 동안 대학원에 가서 택한 공부는 사회복지학과 상담학이에요.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였고, 사람의 신뢰가 힘든 이 곁에 다가가는 삶을 살고 싶은 현재의 기반이 됐지요.”

한겨레

김영서 상담사.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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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성폭력 생존자 상담이 본명 공개에 영향을 끼쳤다고요.

“네. 지난해 9월부터 올해 4월까지 서울시 ‘지지동반자’로 활동했는데요. 수치심 속에서 살아가는 피해자에게 수치심은 가해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지 피해자의 것이 아니라고 계속 말했어요. 끔찍한 건 가해자이지 피해자가 아니잖아요. 그러면서, 이름을 알리지 않았던 제가 본명으로 당당하게 살아간다면 제 말이 피해자에게 더 큰 힘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피해가 당신을 수치스럽게 만들 수 없다’는 메시지를 삶 전체로 전한 셈이네요.

“그렇지요. 그들은 가해자한테 일상을 공격당한 피해자인데도 이 상황 자체를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기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수치심을 겪는 거예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요?

“피해자에게 ‘왜 직접 영상을 찍어 보냈냐’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저는 이 ‘왜’라는 단어를 정확한 방향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웃음기를 거두며) 왜 영상을 찍어 보낼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피해를 말하지 못했을까요? 대부분 경제적 문제와 협박 때문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한테, 여성을 비난함으로써 가해 행위를 두둔하고 싶은 거냐고, 피해자를 피해자로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렵냐고 묻고 싶어요.”

―생존자를 돕는 동안 상담자로서 무얼 배우셨나요?

“상담 내용은 철저히 비공개고요. 질문을 하나 드릴게요. 온라인에서만 아는 사람은 지인일까요?”

―(머뭇) 저한테는 아니에요.

“(다시 웃음) 그러시구나.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는 10·20대가 많은데요. 이분들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을 지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아요. 디지털 환경을 경험하는 젊은 세대만의 특징이 있는 거지요. 그 입장에서 보는 법을 연습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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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는 끝없고, 공소시효는 끝나버리고


한겨레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최근 ‘장관의 말’이 적힌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특별 인쇄본 200부를 주문했다. 이매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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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성폭력 피해 상담을 하던 시기에,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도 시작하셨어요.

“친족성폭력과 디지털성폭력은 비슷한 데가 있어요. 가해자가 겉으로 평범함을 유지한 채 피해자를 노예화한다는 점에서요.”

―‘평범함’이 학대를 은폐한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제 경우도, 아빠가 목사님이고, 엄마는 교사 출신 사모님이고, 저와 오빠, 남동생은 평범하게 학교 다녔어요. 집에선 기절할 때까지 맞고 그 짓을 당해도요. ‘박사’ 조주빈 보세요. 멀쩡하게 학교 다니고 자원봉사까지 하고, 겉으론 평범했겠죠.”

―가장된 평범함 속에서 노예화는 어떻게 지속되나요?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이 노예화의 핵심인데요. 사람을 사물화하는 거죠. 경찰이 들려준 이야긴데, 친족성폭력 가해자가 그랬대요. ‘내 딸 가지고 내가 그러는데 무슨 상관이야!’”

―딸을 물건 취급한다는 소리네요.

“그렇죠. 제 아빠라는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죽을 때까지 제게 사과하지 않았어요. (물건한테 사과하지 않으니까.) 저희 엄마는 폭력 상황을 알았지만 딸을 돕지 않았는데요. 엄마 역시 아빠로부터 오랫동안 맞아왔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노예가 된 상태였던 거예요. ‘박사’가 검거되기 전에, 접근한 취재진(SBS)한테 했던 말도 같은 맥락이에요. 자기는 사업가니까 수익 창출한 거라고 했잖아요. 여성을 사람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본다는 뜻이지요. 가해자들이 평범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죄책감도 없는 거죠.”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가해자와의 관계가 사실상 끝나지 않아요. 디지털성폭력도 영상물이라는 매체 특성상, 피해가 언제 종료될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운 지점이 있어요. 언제든 다시 유포될 수 있으니까요.

“맞아요. 제가 본명으로 살기로 한 데는 지난해 아빠의 죽음도 영향이 컸어요. 하지만 가해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피해도 없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지금도 가족관계증명서엔 가해자와 제가 함께 있어요. 관계는 못 끊게 해놓고, 공소시효는 왜 정해두는 건가요. 디지털성폭력도 그렇죠. 피해 영상이 있다는 건, 가해자뿐만 아니라 동조자와 유포자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어디까지 퍼질지 모르는 거예요. 피해가 현재진행형이라면 공소시효도 ‘현재 진행’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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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모임 ‘공폐단단’이 지난해 12월21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대형 쇼핑몰에서 손팻말 플래시몹을 하는 모습. 사진=혜영,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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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서 작가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친구들과 ‘공폐단단’이라는 이름으로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21일에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대형 쇼핑몰, 지하철 같은 일상 공간, 국회의사당 등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한 사람이 노래하기 시작하면 다른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드는 “잔잔하고 소소한” 방식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놀라지만 말고 가해자 처벌하라” “가해자는 은행원, 공무원, 경찰, 목사…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친족성폭력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일어나요”. 공폐단단은 이런 글들을 손팻말에 새겼다.

현행법은 13살 미만의 사람 및 신체·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성범죄는 특례를 통해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친족성폭력의 경우, 생존자가 성인이 된 뒤라도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어렵다는 특수성이 있음에도 특례에서 배제돼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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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보다 견고한 ‘관계의 다리’를 건너


작가님 책에선 고립보다 관계를 자주 확인할 수 있어요. 특별했어요.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된다고 믿어요. 저는 저를 그대로 수용해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아빠 욕하면서 밤새 술 마시고 뻗으면 해장국 끓여준 교회 친구, 용서하지 말라고 말해준 목회자, 알바 해서 등록금 보태준 친구….”

한겨레

김영서 상담사가 지난달 30일 <한겨레>와 만나 “피해자의 치유만큼이나 평범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적 지원과 환경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전한 뒤 한강변을 산책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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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다리는 절망보다 견고했다. 그래서 절망을 건널 수 있었다. 대개 피학대자는 겹겹의 고립에 둘러싸인다. 보호와 도움으로부터, 학대에 대처할 지식으로부터, 서로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피학대자로부터,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와 희망으로부터 고립된다. 그러나 생존자 김영서는 집을 탈출하기 전, 그러니까 철저한 고립 상황에서조차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단단하게 이어갔다.

“나는 자포자기하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주 더러운 경험을 할 때면 나는 ‘이게 끝이 아니다’는 생각을 강하게 붙잡았다. 견뎌내려고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냥 그날그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했다. 나한테 일어난 일 자체보다 그 경험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120쪽)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으세요?

“돌덩이 같아요. 단단한 돌덩이는 진흙탕에 빠져도 물로만 깨끗이 닦으면 본모습이 살아 있잖아요.”

최근에 들어준 친구 소원은 뭐예요? 배우 소지섭씨한테 편지 써서 죽음을 앞둔 친한 동생이랑 밥 먹게 해주신 적 있잖아요. ‘나도 낯선 사람이랑 밥 먹는 거 안 좋아하니까 이해하니, 만나주시든 아니든 연락은 달라’고….(231쪽)

“(환한 표정으로) 맞아요. 그 동생…. 최근 저는 지인들이랑 ‘일상 미투’ 문화를 만들어보려고 커뮤니티를 준비하고 있는데요. 작정하지 않아도, 무겁지 않게 일상적으로 미투 할 수 있는 문화가 우리의 소망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일상적인 성폭력도 예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생존자는 언어로부터도 고립되기 쉽지요. 피해를 표현할 언어요.

“저는 제 책이 캐비닛 같다는 생각을 해요. 제 상처가 잘 정리돼서 캐비닛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 그러면 상처와 제가 조금은 분리된 듯 편안해져요. 게다가 문자로 기록한 이상 피해 사실이 사라지지도 않죠. 생존자들은 담아두지 말고 계속 말하고, 글로 쓰고, 표출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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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친족성폭력 피해 수기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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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개정판엔 초판에 없던 페이지가 있다. 딱 한 단어로 된 한 장.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153쪽) 수능 전날, 성폭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밤새 매질당한 상황을 기록한 대목이다.

―생존자의 언어를 어떤 태도로 들어야 할까요?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때는 듣기 어렵다고 말할 권리가 있어요. 만약 들을 준비가 됐다면, 너무 오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고통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안 해도 돼요. 피해를 말할 정도면 그 사람은 용기 있게 잘 감당하고 있어요. ‘너무 공감이 돼서 못 듣겠어’라는 반응도 있을 텐데요. 폭력을 직시하기 위해선 함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측면도 있다고 봐요.”

성폭력은 개인적 재난이 아니다. 성차별과 인권의 문제라는 점에서 사회적 재난이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최근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200부를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전국 여성·아동 사건 전담 검사들에게 읽히기 위해서다.

한겨레

"운동하다가 신나서" 찍어본 김영서 작가의 일상. 김영서 제공


―듣는 이가 있을 때만 생존자는 고립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다. 증인이 생기는 거니까요. 고립을 벗어난다는 건 일상을 회복한다는 의미겠지요.

“제 목표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거였어요. 치유가 아니었어요. 정부의 디지털성폭력 피해자 지원도 치유에 집중돼 있는데, 그 범위가 일상 회복으로 확장되길 바랍니다. 중간, 기말고사 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생존자의 욕구를 들어야 해요. 끔찍한 피해를 당한 사람은 뭔가 다른 걸 원하겠지? 아니에요. 평범함을 해결해 주세요. 밥 먹고 잠자고 학교, 직장 다니고 아무 계획 없이 놀러 가고, 그렇게 살 수 있게.”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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