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6 (화)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n번방 재판을 지켜보는 감시자들, 재판장을 바꾸고 있다[플랫]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른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여성의 성을 착취하는 범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는 점뿐이다. ‘eNd팀’(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은 지난 3월부터 서울, 대구, 춘천 등 전국에서 열리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을 방청하고 후기를 작성한다. 수십명의 여성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익명으로 활동하며 후기를 공유하고 있다.

지난 22일 수원지법 403호 법정. 20석 규모 방청석이 빈자리 없이 가득찼다. 기자와 변호인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젊은 여성이었다. 이날 수원지법 형사9단독에서는 n번방 사건 주요 관련자인 ‘흑통령’ 신모씨(32)와 ‘와치맨’ 전모씨(38)의 공판이 잇달아 열렸다. 이 자리에도 eNd팀의 ‘발바닥’과 ‘우주’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참석했다.

보는 눈이 많아지면서 법정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판사는 2차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재판방식을 고민하고, 검사는 가해자에 대한 적극적인 혐의 적용을 검토한다.

경향신문

출처 | eNd·수원지법 제공, 그래픽|이아름 areumlee@khan.kr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법정이 변하고 있다



오후 4시, 황색 수의를 입은 신씨가 피고인석으로 들어왔다. 승려였던 그는 불법 음란물 사이트 4곳을 운영하면서 판매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 1260건을 소지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 재판을 맡은 박민 판사가 공소 사실을 읽어내려가자, 방청객들의 펜이 바쁘게 움직였다.

신씨의 변호인은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한다”고 했지만 신씨가 소지한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1260여건 중 410건의 경우 ‘아동·청소년임이 명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럼 다음 기일에는 증거조사가 필요하겠네요. 사실 법원 입장에서 아동청소년이용음란물의 증거조사는 조심스럽고 민감한 사안입니다. 2차피해 우려가 있어 비공개로 법정에서 진행할까 하는데 특별한 의견 있으실까요.”

박 판사의 말에 검사와 피고인 변호인이 동의했다. 피해자의 국선변호사는 이날 불참했다. 박 판사는 검찰 측에 “다음 공판기일까지 반드시 피해자 국선변호인과 연락해 동의 여부를 확인해달라”고 당부했다.

경향신문

eNd팀(엔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은 지난 3월부터 서울과 수원, 춘천 등 전국에서 열리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을 방청하고 후기를 공유하고 있다. eNd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연이어 열린 전씨 재판에서도 ‘2차 피해’에 대한 우려가 논의됐다. 공판 시작 전, 피해자 변호사는 “공소사실에서 피해자 신원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낭독하지 말아달라” “증거조사가 불가피하더라도 실물 화상 형태의 영상 송출은 피해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박 판사는 “2차가해가 없도록 세심히 배려해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전씨는 텔레그램 성착취방 ‘고담방’을 운영하면서 ‘갓갓’ 문형욱(24)이 운영하던 n번방을 홍보하고 연결한 인물로 알려져있다. 그는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인 지난해 9월 검거돼 재판이 진행이다. 검찰은 당초 징역 3년6개월을 구형했으나 전씨가 n번방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변론 재개를 신청했다. 현재는 전씨에 대한 보강수사를 진행 중이다.

검찰은 혐의 적용하는 데도 적극적인 태도였다. 이날 검찰 측은 “전씨가 운영하던 음란물 사이트에 온라인 배너 광고를 올리면서 이익을 본 정황을 발견했다”며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기존에 적용했던 성폭력처벌법 14조2항이 아닌 ‘영리목적 반포’를 가중처벌하는 제14조3항을 적용하는 것이 골자다. 지난 5월 개정된 14조2항의 법정형은 징역 5년 이하 벌금 3000만원 이하지만 3항의 법정형은 징역 7년 이하다. 벌금형 선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경향신문

eNd팀이 작성한 방청연대 후기 일부. eNd팀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서는 활동가들의 짧은 대화에서도 검찰의 공소장 변경을 신청한 것이 화제였다. 방청 경험이 많은 한 활동가가 eNd 활동가들에게 설명했다.

“검사가 지난 기일에는 영리목적을 입증하기 위해 ‘피고인 신문을 하겠다’고 했는데, 오늘 신문을 생략하고 바로 공소장 변경신청을 했잖아요. 혐의 입증에 그만큼 자신있다는 것이겠죠. 온라인 배너 광고를 이익 창출 수단으로 본 판례는 정말 드물거든요. 앞으로 지켜봐야죠.”



여전히 갈길은 멀다



활동가들은 이날 재판을 어떻게 봤을까. 발바닥은 “판사가 다른 재판에 비해 2차 피해를 걱정해 변호인과 검사 측 의견을 묻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그러나 재판에서의 피해자 보호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우주는 지난달 14일 조주빈의 공판을 사례로 들었다.

“피해자 변호사는 피해자가 언론 보도로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있으니 피해자의 가명도 언급 자제해 달라는 의견을 냈어요. 판사는 ‘내가 기자들에게 가명을 쓰지 말라고 강요할 수 없지 않느냐’고 했죠. 피해자 측의 절박한 요청이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에 화가 났습니다.”

두 사람이 eNd팀에 합류하게 된 건 n번방 사건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우주는 “여태까지 정말 많은 여성 혐오와 성착취 사건이 있었지만 ‘정말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든 건 처음”이라고 했다.

지난 3월31일 춘천지법에서 열린 ‘로리대장태범’ 배모씨(19)와 ‘슬픈고양이’ 류모씨(20) 공판을 시작으로 eNd팀은 “셀 수 없이 많은” 재판을 보고 듣고 기록했다. 낯설고 어려운 법률용어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우주가 말했다.

“처음에는 뭐가 중요한지 몰라서 변호사 이름까지 받아적었거든요. 이제는 핵심 내용만 작성하는 법을 조금씩 습득했어요. 어려움보단 뿌듯함이 큽니다.”

경향신문

eNd팀(엔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팀)은 지난 3월부터 서울과 수원, 춘천 등 전국에서 열리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을 방청하고 후기를 공유하고 있다. eNd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피고인 측의 변명을 들을 때면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구나’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나도 박사에게 협박을 당한 피해자다”(부따) “어려운 가정환경을 고려해달라”(잼까츄) “피해자와 피고인은 호감이 있던 사이다”(거제시청 공무원)…. 가해자 대부분은 방청석 쪽으론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우주는 “피해자를 그렇게 많은 시선 속에 가둬놓고 자신은 버거워하는 게 어이없기도 하다”고 했다.

방청 연대를 이어갈수록 감시자의 중요성을 체감한다고 했다. 발바닥은 “한 재판장은 재판 시작 전 ‘오늘은 방청석에 사람이 많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며 “n번방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판검사들이 사건을 잘 모르고 기소하거나 선고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판사도 검사도 가해자도 감시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n번방 사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 느낄 때면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방청석을 메운 다른 연대자를 보면서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는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우주는 디지털 성착취 근절을 위해 싸우는 다른 이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