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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공화당 모두 불편한 볼턴의 '뜬금포'
당사자 아니면 검증할 수 없는 내밀한 얘기를 담은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은 전 세계 외교 안보사에 남을 메가톤급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음만 먹으면 책의 페이지마다 리포트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외교 비사를 담은 얘기여서 언론의 관심은 아직도 뜨겁습니다.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백악관 외교 안보 최고위 참모의 실명 회고록은 그만큼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겁니다.
볼턴 전 보좌관도 책 출간에 맞춰 미국 언론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책 홍보는 물론, 자신이 책을 낸 정당성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국 민주, 공화당 모두 볼턴의 회고록 출간을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니 민주당은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분위기는 떨떠름합니다. 민주당이 전력투구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문회에 볼턴은 결국 응하지 않았습니다. 탄핵의 이유였던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증언할 사람으로 볼턴은 최적임자였습니다. 민주당이 다수인 하원에서 증인 소환을 결의해도 안 된다고 법원 판결을 받겠다고 반발했었습니다. 결국 탄핵 청문회 출석은 불발로 끝났습니다. 그때 볼턴이 청문회에 나왔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야 트럼프 저격수로 등장한 볼턴에 민주당은 여전히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볼턴이 회고록을 저술하면서 인세로 200만 달러를 받았다고 미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데, 민주당 소속의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은 볼턴이 애국심보다는 돈벌이를 택했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볼턴은 뼛속까지 공화당원인 데다,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도 비판하는 상황이어서 민주당이 그와 손잡고 뭔가를 도모할 여지가 크지 않습니다. 하원 정보위나 법사위에서 대통령 선거 전에 그를 소환해 대통령의 위법 행위에 대해 상기시키는 일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의회 청문회에 볼턴을 불러내도 공화당 의원들이 질문하면 볼턴은 민주당의 외교 안보 정책에 대해 더 거세게 비판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공화당에도 볼턴 전 보좌관은 거의 반역자 수준이 됐습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회고록 폭로도 모자라 볼턴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실상 낙선 운동까지 벌이고 있으니 공화당 입장에서는 배신자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폭스 뉴스에 볼턴이 출연했을 때 불편한 질문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면서 바뀐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기밀 유출하면 형사 처벌"…볼턴의 보안 각서 실제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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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턴의 회고록 출간을 막아달라고 미 법무부가 소송을 제기하면서 법원에 당사자들이 기록을 제출했는데, 그 기록 전체를 입수해 검토했습니다. 이 책의 출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재판 기록은 생생히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소송 기록은 딱딱하기는 하지만, 양측의 주장이 건조한 언어로 표현돼 있어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볼턴의 기밀 유지 각서였습니다. 기밀 사항을 허가 없이 유출하면 처벌을 각오한다는 내용인데, 볼턴은 백악관에서 일을 시작할 때 한번, 퇴직한 직후 또 한 번 똑같은 내용으로 보안 각서에 서명했습니다. 실제 보안 각서에는 2018년 4월 5일, 2019년 9월 13일 자로 자필 서명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 서류는 백악관 입장에서는 전가의 보도 같은 존재입니다. 명시적인 허가 없이 대외비를 담은 저술 활동을 하는 백악관 직원의 저술 활동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 훨씬 수위 높았던 초고…밀당 끝 결국 회고록 출간 강행
볼턴 회고록의 초안은 지금보다 훨씬 수위가 높았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볼턴이 올해 초 백악관에 회고록을 내겠다며 제출했을 때, 이를 처음 검토한 백악관 NSC 직원의 이메일에 그런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백악관 직원은 "회고록을 한번 봤는데 기밀 사항이 아주 많았고, 최고 등급의 국가 기밀까지 포함돼 있었다"고 놀라서 답을 했습니다. 볼턴이 보안 각서를 썼기 때문에 회고록을 출간할 수 없다며 거부 의사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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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볼턴은 책 출간의 의지를 꺾지 않았습니다. 볼턴은 백악관 담당자와 모두 4차례 만나 초고의 문제점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수정 사항을 정리하겠다며, 39장 분량의 노트에 이를 빼곡하게 적었습니다. 볼턴이 북미 정상회담에도 항상 끼고 다니던 그 노란색 노트에 적은 것들인데, 초고 수정 메모는 재판 기록에 그대로 첨부돼 있었습니다. 사실 이 기록의 글씨는 다른 사람이 알아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을 의미하는 KJU, 문재인 대통령을 뜻하는 MOON이라는 단어는 군데군데 보이지만 이게 어떤 맥락으로 초안에 쓰였던 건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어쨌든 볼턴도 나름 뭔가를 바꿔보려고 시도했다는 흔적으로 이 많은 노트 기록까지 재판에 첨부했던 겁니다.
하지만, 책을 다시 검토해도 여전히 기밀 사항이 많아서 백악관에서 415군에 수정 사항을 정리해서 문서로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한반도 관련한 내용만 110군데가 넘습니다. 이건 타이핑한 문서로 어떤 맥락으로 수정을 요구한 건지 확인할 수 있는데, 주로 단정적인 표현을 순화시키려 한 것들이 눈에 띕니다.
볼턴은 이런 지적 사항을 대부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것만 수용했는데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한때 한솥밥을 먹었지만, 자기보다 부하직원이 미주알고주알 지적한 걸 흔쾌히 수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볼턴은 나름 자기가 수정할 걸 다 했다며 이제 출간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본인의 주장을 담은 재판 기록에는 구두로는 책을 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볼턴은 책 출간 일자를 6월 23일로 확정하고 후속 절차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백악관의 분위기는 돌변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건을 실무자가 전담해서 검토할 일이 아니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부서 사람들까지 끼어들기 시작했고, 볼턴과 교신하는 사람의 이메일은 아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책 출간이 임박했던 6월 16일에도 NSC 법무 담당자는 볼턴에 이메일을 보내 보안 각서 위반이니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볼턴은 정부에서 출간을 금지하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곧 닥칠 소송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회고록은 주요 언론사를 통해 주요 내용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단독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언론의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관심도 커졌습니다. 법무부는 예상대로 출간 금지 소송을 제기했는데, 법원은 이제 와 출간 금지를 해봐야 실익이 없다며 책을 내는 건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결문 결론이 의미심장합니다. 볼턴이 국가 안보로 도박을 하고 있으며, 처벌 가능성이 있다는 부분을 명시한 겁니다. 일단 이 소송은 출간 금지 소송이니 그 부분만 판단하겠지만, 판사가 굳이 그 부분을 판결문에 넣은 건 '당신 앞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경고하고 싶었던 걸로 보였습니다.
● 형사 처벌 위험 알고도 볼턴은 왜 출간 강행했을까?
폭스 뉴스에 출연한 볼턴은 자기 회고록에 기밀 정보는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문제 될 내용이 없으니 자신을 기밀 유출로 처벌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자신이 들었다고 주장하는 비밀스러운 정상 간의 통화, 면담, 사적 대화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물론 회고록으로는 기록 가치 있을 수는 있지만, 기밀 유지 각서를 쓴 전직 참모가 백악관의 명시적인 허락을 받지 않고 업무를 복기하듯 쓴 회고록은 처벌받을 위험이 매우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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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입장에서도 이 책의 전체가 팩트라고 받아들이는 건 매우 위험합니다. 회고록에 자주 등장하는 멀베이니 전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은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만날 때마다 미국 농산물을 사달라고 한 건 사실인데, 그걸 자기 재선에 도움이 되니 요청했다는 건 볼턴의 주장일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자국 농산물을 사달라고 세일즈 외교를 한 건 미담이라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관련 이슈에 대해서 볼턴은 시종일관 북한과 대화가 망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실제로 회고록에 그렇게 적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상대를 힘으로 눌러 굴복시키겠다는 초강경파적 외교안보관으로 가득 찬 볼턴의 회고록은 찬찬히 보면 지독한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볼턴이 법적인 문제를 검토하지 않고 이런 회고록을 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처벌받을 수 있다는 보안 각서를 보면서 왜 이런 위험하고도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미국 ABC에서 특집으로 편성한 볼턴 전 보좌관 특집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유를 나름 짐작했습니다. 탈레반과 평화 협상에 화가 난 볼턴이 결국 사표를 던졌는데, 트럼프는 그걸 트윗 해고로 포장했습니다. 볼턴은 이 부분에 상당한 분노를 표시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카톡으로 해고를 통보하면 큰 문제가 되는데, 미국의 백악관 최고위 참모를 트윗으로 해고한다는 건 큰 모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모욕을 당했다고 느끼면 굉장히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볼턴이 그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배우 김영철 씨가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라고 말하는 대사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김수형 기자(sean@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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