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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40년 만에 밝혀진 5·18 시민군 손인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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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포항서 근무 제대한 해병 1사단 출신

80년 “국민에게 총 겨누는 군인을 보고 격분”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중학생 죽음 목격

5월27일 광주천변호텔 경비 포위망 벗어나

나주·영암 거쳐 걸어서 5일 만에 여수 피신

불안감에 사우디 건설현장으로 2년반 취업

5·18묘역 방명록에 “살아남아서 부끄럽다”

“유공자 못돼도 괜찮아…의로움 쫓아 살것”


한겨레

1980년 5월21일 광주시 남구 양림동 광주기독병원 부근을 순찰 중인 시민군 손인국(화물차 짐칸 맨 왼쪽)씨. 5·18기념재단, 이창성 전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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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이 나를 따라왔을까요?”

지난 3일 해병대 출신 5·18 시민군 손인국(66)씨가 전남 여수시 신기동 ‘갤러리 노마드’에 걸린 사진 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진 속엔 시민군 3명이 1톤 화물차 짐칸에 서 있었다. 깡마른 그는 오른손으로 카빈총의 총신을 그러쥔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왼쪽으로 치우친 반곱슬 장발에 8대2 가르마가 선명했다.

그는 1977년 만기전역한 해병대 예비역 병장이었다. 포항 해병 1사단 11연대 7대대 11중대 포사수로 근무하면서 개인화기인 엠원(M-1) 소총을 비롯해 대공화기인 캘리버 30·40·50, 포병 장비였던 105㎜ 곡사포 등을 두루 다뤘다. 해병대 빨간 명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는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겨누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여수에 사는 그는 갤러리 노마드에서 5·18 민주항쟁 40돌을 기념하는 ‘저항과 역사’ 사진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보고, 전시장을 찾았다. 한바퀴 휘돌아보던 그는 시민군 차량 대열을 찍은 사진 앞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26살 젊은 자신이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옆 사람을 붙잡고 “저 사람이 나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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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손인국씨가 3일 자신의 사진 앞에서 “사진이 찍힌 줄 전혀 몰랐다. 장소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안관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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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사진 한장은 80년 5월 광주의 기억을 빠르게 불러냈다.

전남 보성이 고향인 그는 고교 졸업 뒤 광주에서 지냈다. 80년 5월18일 보성 친구 집에 갔다가 19일 명봉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돌아왔다. 농성동 집으로 가려고 대인동 버스터미널을 지나는데 공수부대가 시내버스를 세웠고, 젊은 사람들을 다 끌어내렸다. 마침 주머니에 있던 20일 예비군 소집 통지서를 보여줬더니, 공수부대원이 ‘선배님’이라며 깍듯이 거수경례하더니 보내주었다.

21일 그는 금남로 전남도청 앞 시위대 틈에 끼어 있었다. 폭력진압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물결은 끊임없이 불어나 수만명에 이르렀다. 그는 인근 공사장에서 13㎜ 철근 조각을 주워 무장한 공수부대 쪽으로 던지며 맞섰다. 그 순간 자신을 조준한 듯한 총알 한 방이 날아들었다. 옆에 있던 중학생이 뒷머리를 맞고 허망하게 무너져내렸다.

“얼굴이 하얗고 깨끗해 잘생겼던데…. 내가 맞아야 할 총알을 그가 맞아버린 것 같았어. 황급히 큰 도로에서 골목 쪽으로 끌어냈는데 그다음에는 어쨌는지 몰라. 평생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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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으로 참여한 사실이 신군부에 드러나지 않을까 해서 선택했던 사우디아라비아 공사 현장. 손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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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는 그렇게 시작됐다. 희생자가 생기자 시민군도 무장을 시작했다. 그는 깨진 앞유리창 아래 판자를 대고 “구속 학생 즉각 석방하라”라고 써붙인 화물차 짐칸에 올라탔다. 시내를 돌아 부상자를 치료하던 남구 양림동 기독병원 뒤쪽 수피아여고 영광상회 부근 골목에 잠깐 멈췄다. 그 순간 누군가 사진을 찍은 듯했다. 그는 이 차를 타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공수부대에 울분을 토하며 외곽을 돌았다. 낮에는 전남도청 분수대 앞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광주공원 일대에서 공수부대가 들어오는지 살피며 며칠을 보냈다.

“시민군 차량이 지나가면 시장과 동네 아줌마들이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가득 실어줬어요. 차량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쳐서 며칠 동안 배고픈 적이 없었어요.”

계엄군의 시내 진입이 임박한 26일 밤, 광주공원에서 M-1 소총과 탄창 1개를 받았다. 광주천 도심 방향인 동구 수기동의 5층짜리 호텔을 7~8명이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전남도청에서 2㎞쯤 떨어져 있던 호텔에서 총성은 간간이 들을 수 있었지만 대치 상황은 알 길이 없었다. 높은 층 한방에 있던 그들은 날이 밝아오자 계엄군의 진입을 직감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광주천 부근에 총을 버리고, 산길을 따라 광주를 벗어났다. 꼬박 닷새를 걸어 나주와 영암을 거쳐 여수 형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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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출신 5·18 시민군 손인국씨는 40~50대 때 해병대 여수전우회에서 봉사활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손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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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뒤론 5·18에 대해 입을 닫았다. 혼자만 살아남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폭도’로 몰릴까 두렵기도 했다. 현상금과 특별진급을 걸어놓은 ‘광주사태’ 관계자 수배 전단이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그해 11월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잠깐이라도 한국과 광주를 잊고 싶었다. 사우디의 알바틴과 얀부에서 조립식 주택을 대규모로 짓는 삼환기업의 에스엠-22 공사 현장에서 일했다. 폭염 속에서 조립건물 벽체에 철근을 잘라 넣는 건설 잡부의 월급은 70만~80만원에 이르렀다. 국내(20만~30만원)보다 두세배 많은 수입이었고, 누군가 잡으러 올 일 없다는 안도감 속에서 2년 반 동안 생활했다.

다시 돌아온 고향은 억울한 유가족의 아픔과 전두환에 대한 울분으로 잔뜩 움츠려 있었다. 87년 6·10항쟁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금남로로 나갔다. 그해 대선에서 신군부 일당이었던 노태우가 당선되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광주를 떠나 여수에서 일자리를 잡고 결혼해 정착했지만, 5·18 이야기는 함구했다. 술기운에 시민군 시절 이야기를 꺼낸 적도 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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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손인국씨의 젊은 시절 모습. 호리호리한 체구에 왼쪽으로 치우친 반곱슬의 8대2 가르마가 확연하다. 손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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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총을 잡고 뜨겁게 보낸 5·18을 결코 잊을 수는 없었다. 아닌 척 곁눈질로 광주 청문회와 신군부 수사, 전두환 재판을 지켜봤다. 5·18은 불순분자의 폭동에서 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역사적 평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5·18 뉴스를 챙겨 보고, 5·18 전시장에도 다녔다.

“그날이 다시 와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잖아요. 부마항쟁에 투입된 해병대 지휘관이 ‘시민이 때리면 맞아라. 그렇지만 총은 빼앗기지 말아라’고 훈시했다고 후배들한테 들었어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시는 군인이 국민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일이 없어야지요.”

그는 몇해 전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방명록에 “살아남아서 부끄럽다.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애쓰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자신 대신 총알을 맞은 것만 같은 중학생 희생자의 앳된 얼굴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전두환만 보면 울화통이 치밀어요. 그렇게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도 뻔뻔스럽게 골프 치고, 술 마시고 활보하잖아요. 못된 놈은 감방에 처넣어야지, 경찰이 경호하고 따라다니는 게 말이 됩니까. 내가 뛰어들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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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인국씨는 80년 11월 사우디아라비아 삼환기업 건설 현장으로 건너가 2년 반을 숨어 지냈다. 손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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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시절 사진을 발견한 뒤 그는 갑자기 여수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는 주민도 생겼다. 어떤 이는 ‘시민군’이 아니라 ‘계엄군’으로 잘못 알고 힐난해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믿지 않았던 부인과 아들, 해병 전우들도 전시장에 가서 사진을 확인하고, 전시물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 오기도 했다. 흐뭇해진 그는 며칠 뒤 웃옷 깃에 주먹밥 모양의 5·18 40돌 배지를 달았다. 앞서간 시민군 동지들을 추모하고, 되찾은 기억을 계기로 새 출발을 다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5·18 때 총을 들고 시민을, 정의를 지키려 했다는 게 자랑스러워요. 40년 만에 의로운 날들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감격스럽기도 하고요. 비록 5·18 민주화 유공자는 아니지만,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부터라도 5월 영령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지요.” <끝>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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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공사 현장. 손인국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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